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1. 가출 또는 실종(표지, 차례포함)

madangsoi 2014. 2. 1. 18:24

 

 

 

 

세종시 첫마을 아파트는 금강보의 풍부한 물줄기를 담아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저려오는 발끝으로 아버지 한숨 소리

농사꾼보다 시골 선비의 자식 소릴 들으면서

아버지도 들녘보다 책상에서 주판을 갈았다.

거친 손가락에선 흙내음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는 농사꾼이 진짜 아니다.

아버지는 어린애가 되어 가신다.

발에 맞지 않는 구두처럼 아버지는 애써

설거지를 거부하신다. 텃밭에 고추 심으면서

아버지는 고추 떨어지는 시늉만 하신다.

하지만 밭고랑 같은 주름이 깊어질수록

아버지는 한숨 섞인 담배 연기 사이로

지나간 시절을 설거지하신다. 오늘도

아버지의 어깨 너머에서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아버지는 요란한 세수라며 우기신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 얼굴밭 고랑만큼

묵직한 뿌리가 아버지를 부엌으로 이끈다.

아버지는 지금 설거지 수업 중이다.

- 임청수, [아버지는 지금] 전문.

 

옛 지명 연기(燕岐)와는 상관없는 연기(煙氣)같은 안개가 풍부한 금강의 수량을 짐작케 한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미곡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사람의 힘으로 둑을 쌓고 장남평야를 만든 것은 기적이었다. 두 번의 농지 정리를 마치고 열다섯 마지기 삼천 평 단위로 잘 다듬어진 들녘은 성재, 원수산, 전월산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잘 그려진 수묵담채화보다 더 화려하고 풍성해서 가슴이 절로 아려왔다.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정부청사는 노무현 정권, 집권의 상징이었지만 그 시도는 이명박 정부의 작품이었고 이제 그 누군가의 정부가 완성하고 그 초대 국무총리가 원수산을 배경으로 북악산의 청와대 못지않은 산수를 자랑할 것이다. 역설처럼 포구(浦口)였던 자리는 동양 최대의 인공호수가 들어선다고 한다. 포구의 펄이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도 하고 조경을 중시해서 환경 도시, 자족 도시의 청사진을 위해 자연미 물씬 풍기는 인공호수는 대형 덤프트럭들이 수백, 수천 대가 들고 나서 순식간에 호수의 외형을 만들고 있었다. 순간 포구를 막고 이를 들로 만드느라 지게와 삽으로 흙을 퍼 날랐다던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어깨가 붉은 색으로 겹쳐 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땅을 갖고 싶어서 이 들을 하얗게 메웠을까? 이농향도(離農向都) 이전이었으니 인구가 많았으리란 막연한 통계를 믿어도 중장비 하나 없었던 시절에 겨우 소달구지가 우리 할아버지들의 어깨를 조금 가볍게 했으리라 짐작하는 것뿐이다. 일제 강점기 노력봉사의 양에 따라 토지를 불하받기로 하고 시작한 이 기적은 결국 땅에 대한 우리 할아버지들의 집착이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내 땅 한 마지기를 소유하기 위하여 들로 산으로 지게를 지고, 리어카, 우마차를 끌고 종횡무진 다녔으리라. 산을 평지로 만들고 물길을 마른 땅으로 만들어냈다. 우공이산(愚公移山)만이 기적은 아니었다. 그렇게 장남평야는 해방의 공간에서 토지개혁과 함께 참농사꾼들의 손에 경작되고 옥토가 되어갔다. 금강이 홍수로 범람이라도 할라치면 피같이 소중한 땅을 잃지 않기 위해 누구랄 것도 없이 하천 둑으로 모여들었다. 홍수 한 번에 하천 둑은 몇 미터씩 그 높이가 올라가고 그 길이 넓어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벽강(碧江)이 황답(黃畓)이 되었던 것이다.

멀리 구 금강대교에 대평리발 조치원행 시내버스가 달리고 있다. 하루 40여 차례 운행되는 버스는 25분내지 30분 간격으로 대평리와 조치원을 오간다. 장남평야로 향하던 하루 7, 8회의 버스 운행에 비하면 참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제 50만 자족 도시 세종시가 본 괘도에 들어서면 아마도 10분 내외로 배차 시간이 조정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옆으로 보이는 첫 마을은 배경처럼 금강보의 풍부한 수량으로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제2금강대교와 함께 한 폭의 수채화를 빚어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대전 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향 진의리, 장남평야 쪽을 애써 외면하는 모습은 참 얄궂다. 엄마가 사라진 방향이 대전 방향이라도 되는 듯 아버지는 벌써 며칠 째 저러고 있다. 반대방향에는 4대강 사업으로 드넓어진 금강 둔치에 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선을 긋고 있다. 운전면허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쉰 살이 넘어서 운전면허를 따던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벌써 8주가 지났다. 4월이 시작되었다. 5월이 오면 아버지의 생신, 어머니는 아마도 그때나 오실 것이라고 누나와 형수가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듯하다. 다녀온다는 말도 없이 옷가방조차 챙기지 않고 편지 한 장 없이 떠난 엄마!

남은 것은 엄마가 평생을 써온 일기장 다섯 권이 전부다. 생각날 때마다 써 왔던 일기장을 아버지는 오늘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읽고 있다. 처음부터 읽어야 하냐, 아니면 최근 것을 읽어야 하냐? 물으신다.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일기장에 무슨 단서가 있겠냐는 시큰둥한 반응의 얼굴들뿐이다. 아무튼 엄마의 일기장은 결혼 이후 거의 10년을 단위로 씌어졌다.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올해 엄마의 일기장은 5권 째의 마지막 부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었다.

 

올해 환갑 기념 여행을 계획하고 행선지를 금강산으로 정했다. 추석에 아이들이 문의하니 벌써 예약이 끝났단다. 가을 단풍을 보러 갈 마음에 서둘렀는데 포기하기에는 너무 서운했다. 청주로 조치원으로 예약을 하러 다니던 중 큰아들한테서 연락이 왔다. 11월 2일 떠나도록 예약을 했단다. 그때는 가을일 끝내고 단풍이 다 떨어질까 걱정이었다. 며칠 후 큰며느리한테서 10월 19일 가는 편이 생겨 다시 예약했다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가을 밭걷이를 했다. 들깨도 털고 고구마도 캐고 그러는 동안 18일이 돌아왔다. 청주에서 딸 내외가 왔다. 북쪽이라 추울까봐 내복을 싸고 수건을 몇 장, 치약, 칫솔이랑 가방을 챙기고 김밥을 쌌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4시에 조치원에 가서 차 시간까지 30분 남은 동안 머리 손질도 하고 마치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인다.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한참을 가자니 차들이 마치 곡예를 하듯 이리저리 앞지르기를 한다. 안 그러면 시간을 못 맞추는지 기사 아저씨는 잘도 질주를 한다. 잠을 잘 요량이었는데 가슴이 두근거려 잘 수가 없었다. 6시 45분쯤 큰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산본에 내려 택시로 아들 집 앞에 도착하니 여덟 시가 되었다. 저녁에 김밥을 먹고 나니 서울 작은아들이 온다고 했다. 큰며느리가 사온 찐빵을 먹고 나니 서울 애들이 왔다. 안주를 차리고 삼부자가 술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었다. 청주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공들여 키운 자식들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막내내외를 밤이 늦어 돌려보내고 잠자리에 드니 잠이 잘 안 온다.

19일 아침을 일찍 먹고 큰아들이 하남시의 가나안 신협 본점까지 태워다 주었다. 8시 45분에 그곳에 도착하니 몇 사람 와 있지 않았다. 큰애에게 직장에 가라하니 떠나는 것을 보고 간다고 안가고 있다. 9시가 돼서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10시가 다 되어 도착해 일찍 온 사람은 1시간 넘게 마음 조리며 기다려야 했다.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우리나라가 이런 작은 일들 때문에 선진국의 문턱에서 미끄러지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한숨으로 다가왔다. 아침 태양처럼 얼굴이 붉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버스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에게 팔을 흔들며 큰아들은 직장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대관령 휴게소에 4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입북 절차를 끝내고 세관을 나와 미리 와 있던 ‘봉래(蓬萊)호’에 오르니 5시 반에 배가 떠난단다. 멀미약을 먹고 숙소인 4층 550호실에 여장을 풀고 배 위에 올라 보니 어둠이 짙게 깔려 시나브로 내려온다. 설레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그 무엇인가가 작용했을 지도 모른다. 어둠은 저만치 우리 일행을 지켜보는 듯했다.

저녁을 기다리는데 8시에 저녁을 먹게 된단다. 시장기가 들어 라면 하나를 시켰다. 반주 삼아 술을 마신다. 술이래야 이곳 선상의 특별식, 북한산 소주 반병에다 라면을 안주 삼아 허기를 때우고 8시에 저녁을 먹고 6층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고, 11시가 넘어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망망대해 어둠을 뚫고 북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맡긴 채, 북의 장전항을 향해 북으로, 북으로 배는 가고 있었다. 어둠을 뚫고 배는 우리들의 설레임과 두려움을 싣고 그렇게 동해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동해의 일출을 맞으며 배는 공해상을 지나, 식전에 낯익은 듯 낯선 장전항에 배가 닿았다. 저녁에 배에 오를 때의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그곳은 군사 기밀 장소라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가’반이 6시 반에 아침을 먹고 숙소에 들러 ‘봉래(蓬萊)호’에서 준 여행용 가방을 챙겨 9시 넘어서 배에서 내렸다. 북으로 가는 여행권을 내보이고 입북 절차가 끝난 뒤에 10시에 만물상을 향해 가는 중, 길 양옆으로 이삼 백 년 된 홍솔이 기다랗게 하늘을 찌를 듯 줄지어 서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원시림이 맑은 공기를 뿜어내니 아주 기분이 상쾌했다. ‘나’반이 주차장을 내려온 후에 우리는 버스가 맞비낄 수 없는 소로를 올라 화장실을 다녀와 산을 올랐다. 조장의 설명을 들으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만 가지 형상을 했다는 만물상을 오르면서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

기암괴석의 조화를 말로 표현키 어려웠다. 거북 바위와 토끼 바위, 코끼리 바위랑 큰 바위며 삼선암(三仙巖), 귀면암(鬼面巖), 용두암(龍頭巖) 등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다운 바위와 골짜기를 정신없이 보며, 허겁지겁 정상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망양대(望陽垈)! 제 일봉, 제 이봉, 제 삼봉에 오르니, 동해 바다가 보인다.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오면서 선녀들이 내려왔다는 천선대(天仙垈)며 하늘 문을 두루 거쳐 내려오는데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는 남편의 말이다.

주위 산의 아름다움에 빠질 틈도 없이 공동으로 정해진 시간에 주차장까지 와야만 하니 쉴 틈도 없고 용변 보기도 어려워 서둘러 내려왔다. 올라갈 때 늦게 떠났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3시 40분에 정류장에 도착해 4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고 온천에 들러 목욕을 하고 나와, 세관을 통과한 후 배에 올라 저녁을 먹었다. 오늘 저녁에는 노래자랑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불러 인기상을 탔다. 덕분에 나도 무대에 올라 부부 스타가 되는 영예를 경험하기도 했다. 남편 덕을 본 것이다. 이것도 두고두고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

그 좋은 산천 경계를 여유롭게 감상을 못하고 바쁘게 내려온 것을 나의 인생살이와 견주어 보게 된다.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온 것이 아이들 키우며 농사지으며 힘겹게 살아온 나의 인생 역경과 같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자라준 것의 행복을 느낄 새도, 나를 돌아 여유도 없이 살아온 것이 인생 황혼에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어제와 같은 절차를 밟고 9시 반에 구룡폭포를 향해 가는 길에 슬기넘이 고개, 신계원, 삼록수, 창터솔이며 목람다리, 신계사 오선암이랑 금주다리, 만경다리, 금강문을 지나, 천문대, 옥류담, 옥류다리, 옥류 폭포, 련주담, 담소고개, 비봉 폭포를 지나는데 아쉽게도 가물어 물이 없었다. 어느 시인은 금강산을 보지 않고는 산수를 논하지 말라고 했단다. 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 단풍이 어우러져 별천지에 온 것 같다. 깨끗한 물에 단풍잎은 한 폭의 그림 같다. 화폭으로도 옮길 수 없는 자연 경관, 그 아름다움에 고마움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제 정오에 한 십 분간 흐리고 비가 조금 오는가 했더니 이내 개고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금상첨화다.

우리의 명산 금강산은 어느 곳이 좋다고 말할 수 없이 신비의 산이다. 고운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옥구슬을 뿌려 놓은 듯 그 아름다운 산 속으로 푹 빠져버리고 싶다. 힘든 줄도 모르고 올라가니 목적지인 구룡폭포가 펼쳐진다. 북쪽 안내원이 산에 담배는 가지고 오지 말라는 말에 동감했다. 자칫 부주의로 이 아름다운 산이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되겠기에 말이다. ‘토끼, 고라니, 사슴…… 이들을 다시 보려면 50년이 걸립니다.’ 라는 광고의 문구가 가슴 저미게 다가왔다.

내려오는 길에 옥류담에서 사진을 찍었다. 올라갈 때 감상하지 못한 단풍을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황홀경에 시간 가는 것이 아깝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단풍철이 하나 더 있는 듯하다. 그 오색찬란한 빛깔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절정을 이루고 있어 오늘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중국 어느 시인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한다. 아름다운 산에 날씨까지 좋아서 내 생애 최고의 행복감에 젖어본다. 그곳의 자연 경관과 무분별하게 마구 파헤쳐진 남쪽의 산하를 비교하니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봄에는 이 산 저 산에 산불이 일어나 막대한 국가 경제 손실이 있는가 하면 마구 버린 쓰레기는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산을 아끼고 가꾸어 자손만대에 맑은 물 맑은 공기를 물려줄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마지막 날, 그 아름다운 우리의 금강산을 뒤로 한 채 다시 오마고 기약 없는 기약을 하고, 저녁에 배는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우리가 본 산은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안다. 내금강-일만 이천 봉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또 해금강은 어떠했을까. 못보고 온 것이 서운했지만 비로봉이며 앞으로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고 기원해 본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북쪽 곡예 단원들이 우리와 같이 불렀던 통일 노래가 귀에 쟁쟁하다. 단일 민족으로서 분단의 아픔을 더 이상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되겠기에 서로가 감싸주고 아끼고 사랑하며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한다.

어린 시절, 6·25 때 피난 갔던 일이며 결혼하고 나서 군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강원도 인제에 두 번 면회 갔던 일들, 일주일에 두 번 씩 편지를 주고받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애들 키워 대전으로 고등학교 유학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보내고 같이 못 있어 애태웠고, 이제는 사남매를 결혼시키고 나서도 근심 걱정 면할 날이 없는 숨 가쁜 삶을 잠시 접어두고 이번 나들이에서 건강하게 정상까지 무사하게 다녀온 것에 감사를 드린다. 여름부터 삼십 분씩 들 한 바퀴를 돌고 살이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다리가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이 들어 살이 빠지니 기운이 없다. 진작 건강관리를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된다. 나태하지 말자!

수확 철에 벼를 못 베고 가서 집에 오는 길은 빨리 와야 한다고 서두르게 되었다. 금강산 갈 때 설레이던 마음과 두려움에서 안정된 우리 농촌의 들판을 보면서 집에 가서 부지런히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동해시에서 10시에 차가 출발해 하남시에 1시에 도착했다. 잠실까지 와서 강남역에서 2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 청주행 버스에 올랐다. 청주에 도착해 딸 내외와 해물 철판구이를 먹었다. 소주 한 병을 반주로 시켜놓고 금강산의 감흥을 풀어놓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신경 써준 자식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너무나 흐뭇했다.

사위가 태워다주어 집에 오니 8시가 되었다. 여장을 풀고 9시 넘어서 아이들을 보냈다.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 받고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하게 늦잠을 잤다.

다음 날 조치원 언니 집에 가서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가 가기 전, 여비에 보태라며 10만 원을 주어 황태를 답례로 사다 건네주었다. 집에 오는데 비가 몹시 내렸다. 비로 인해 잠시의 휴가를 더 얻은 셈이었다. 24일 오후에야 네 귀퉁이 벼를 베었다.

25일 남편은 연기군 농협 동인회원들과 문경 새재로 가을 나들이를 갔다. 26일 10시에 들에 벼를 베러 갔다. 절반쯤 베고 나서 점심을 먹고 2시에 벼를 다 베었다. 집에 와 점심 설거지하고 들에 나가 벼를 한 번 젓고 5시에 채서 덮고 나서야 늦은 저녁을 먹었다.

27일엔 벼를 먹을 것은 담고 오후에 펴 널고 경운기로 집에 실어왔다. 28일 날씨가 흐려 벼를 널지 못하고 있는데 밤에 막내아들이 늦게 왔다. 부자가 술을 나누며 여행 다녀온 얘기며 정담을 나누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벼를 널었지만 햇빛이 흐려 마음이 안 놓였다. 할 수 없이 11시부터 벼를 담아 창고에 넣었다. 오후 늦게 아이들 보내놓고 조카 네서 저녁을 먹었다. 아들 덕분에 일을 좀 덜었지만 하루만 날씨가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30일은 날씨가 너무 맑아 속이 상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을 어쩌랴. ‘성재’집 벼를 베는데 너구리를 잡았단다. 벼를 실어오고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31일엔 기계에 벼를 말려냈다. 벼 56가마가 나왔다. 일 년 내내 피땀 흘려 지은 농사가 비용을 빼고 나면 남는 게 고작 먹고 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으로 위안해 본다. 불로소득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는 아니지만 마음만은 부자인 것을 하며……

이제는 캐다 만 고구마도 캐고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삭막한 들판에서 내년에 지을 농사 준비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들판을 보면서 내 인생을 뒤돌아본다. 더 여유롭게 살 것을. 다시는 살 수 없는 인생, 돌이킬 수 없는 세상살이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더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 다음 생이 있다면 더 부지런히 착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으면……

35년 전에 군에 간 남편을 면회 갈 때의 그 그리움으로 남편에게 절실한 사랑을 해보는 것으로 남은여생을 살고 싶다. 아이들이 떨어져서 공부할 때의 그 애틋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어미는 한 많은 세월 속에 남은여생 더 부지런히 일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련다. 그 아름다운 명산을 다녀오고서야 나에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준, 늦었지만 인생의 재발견을 한 것같은 넉넉함으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석양이 지는 이 인생에도 샛별이 떠오른다는 기대감. 늙은 호박이 꿀이 많지 않은가. 늙음을 탓할 수는 없다. 어린 손주들 크는 재미, 그 재롱에 내 자식 키울 때 맛보지 못한 또 다른 인생의 기쁨을 맛보면서 사는 것도 좋으리라. 죽을 때까지 배워도 삶의 진리를 모르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이 가을엔 평생소원인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다녀오고 나의 건강이 원만한 것에 감사하면서 더 부지런히 새벽 운동을 열심히 하며 열심히 일하고 좋은 곳 남편과 여행하며 인생의 마무리를 후회 없이 하고 싶다.

그 동안은 어두운 면을 많이 보고 산 것 같다.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반성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때는 남편을 원망하고 이곳을 탈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억척스런 남편이 있었기에 나의 건강을 유지하고 오늘의 삶이 있게 된 것 같아 고맙게 생각한다. 식전 체조를 하고 들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마음이 상쾌하고 몸이 가볍다.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몸이 가볍다.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운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올 여름부터 운동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새로운 면을 한 가지 더 발견한 것이다. 젊었을 때는 바빠서 느끼지 못한 매력 같은 거랄까? 겉모습은 늙었지만 이제 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는 나의 남편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든든하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땀 흘리며 산을 오를 때는 힘들지만 참고 견디는 인내심이 필요했듯이 부지런히, 꾸준히 가는 사람은 결국엔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는 것과 같다.

그 아름다운 산에 매료되어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녀온 산행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경치만 눈으로 느끼고 온 것이 아니라 황혼에 삶의 의미까지 새삼 가르쳐준 관광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남편도 자식도 가족이란 나의 울타리의 소중함도 절절히 느끼면서 더 큰 의미의 울타리인 한민족의 밝은 미래까지 넉넉하게 기원해 보는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사족 : 2000년 경진(庚辰)년! 나의 꿈은 2012년 임진(壬辰)년에 가 있다. 함께 해로(偕老)한다면 아마도 결혼 50주년이 될 그 해 나는 내 칠십 평생의 소원의 절반은 성취할 꿈에 젖어 있을 것이다. 금혼식 정도면 남편도 아이들도 엄마의 꿈을 이해해 주겠지.

 

[금강산이 어디메뇨?]라는 엄마의 글을 읽는다. 10년 전 엄마 회갑 기념 금강산 여행 후에 편지로 우리 4남매에게 왔던 내용이었다. 내가 워드 작업을 해서 태블릿 PC에 저장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사족이라는 것은 그 후 다른 펜으로 첨부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2012년이면 엄마가 집을 나서고 나서 2년 후가 되는 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는 메모를 했다. 지금 기분에 아버지에게 금혼식은 안중에 없을 것이다. 함께 햇수로 49년을 살았던 아내가 중국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후 서울공항에 도착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제 세종특별자치시를 기정사실로, 분명한 현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포자기의 마음도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보낸 편지도 엄마의 일기장 옆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아버지께 드리는 글!

태풍 나비가 남부 지방에 커다란 상처를 주고 오늘내일 수그러진다고 합니다. 모두 집중 호우와 강풍에 대비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에 또 다시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해마다 지역을 달리해서 두더지 잡기처럼, 정말 개그처럼 반복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공무원 사회의 무능한 모습은 대통령에 대한 불신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는 오늘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와 고향은 아직도 행정복합타운 문제로 알게 모르게 이웃과 형제, 친척과 지인이 원수보다 더 못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지금도 고향은 보상 운운, 반대 운운 하며 시나브로 변해있더군요. 할아버지들의 산소에 풀을 깎으며 귀에 심하게 거슬리는 예초기의 모터소리를 자랑인양, 예의인양 온 산을 울려대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고향은 그렇게 명분을 위해 서로 아등바등 싸우고 있나 봅니다.

아버지 이마의 주름살이 늘어만 가고 자식들은 튼튼한 날개를 자랑하며 자꾸만 둥지에서 더 멀게 날아가고자 합니다. 멀어져 간만큼 둥지를 찾는 횟수도 줄어드는 것이 인지상정인양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하기 위해 바쁜 저는 얼굴이 홧홧 거립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현실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방법을 너무 빨리 익힌 카멜레온, 도시의 변절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향과 부모님의 품을 애써 외면하고만 있습니다.

도시화다, 산업화다, 세태가 그렇지 않느냐? 다들 그러는데 우린들 어쩌겠느냐? 말로는 청산유수, 부모님 은혜를 읊어대고 있으니…… 예절과 사람사랑을 말로 배웠으나 가슴이 차가운 제게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제 딸 아이, 아버지의 손녀가 조금씩 자라나면서 저를 아주 많이 닮아가는 데서 놀라고 또 두렵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똑같이 따라하려는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이렇게 아버지께 오랜만에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아버지!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어서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제가 그렇고 아내가 또한 그렇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 조금 더 나아지면 잘해드려야지.

풍수지탄(風樹之嘆)!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慾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아니 하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으신다.’

자식들 들으라는 뼈 있은 이 말이 오늘 유난히 가슴을 찌릅니다. 아버지! 이제 열흘만 더 있으면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들녘에 익어가는 고개 숙인 벼이삭처럼 저도 조금씩 인생의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와 엄마의 심정을 시나브로 느끼고, 알게 되겠지요. 그런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살찌우겠습니다.

아버지 건강하시고 힘드시더라도 농주 좀 줄이세요. 아버지께서 원하는 손자는 내년쯤 품에 안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신념대로 행하시되 건강 헤치지 않게 타협의 미덕도 구사하는 지혜를 활용하세요.

2005년 9월 7일. 아버지의 아들 임청수 올림.

 

벌써 6년이 지난 편지! 아버지는 이제 겉으로는 세종시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 사라지고 보니 아버지는 여전히 엄마를 포함한 고향 상념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 사는 큰누나는 차치하고라도 청주의 작은누나, 안양의 형은 아버지가 이번 일을 잘 헤쳐나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의 누나에게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다. 오직 사랑만을 찾아 가족의 반대, 아니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1살 꽃다운 나이에 조총련계 매형과 결혼을 하고 그렇게 일본인이 되었던 큰누나. 우리에게 큰누나는 이미 기억의 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일본으로 가신 것은 아마도 큰누나를 보기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짐작만이 있었다. 언제나 우리에게 최고였던 누나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했고 우리들의 자랑이었다. 그러던 누나가 일본을 알겠다면서 1학년을 마치고 일본에 유학을 갔고 조총련계 매형과 결혼을 올린다는 편지가 온 것이 1983년 봄이었다. 그리고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 투하 되었던 그날을 기념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가족은 모두 참석할 수 없었다. 그해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후로 큰누나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엄마의 기억에서는 항상 전화가 아닌 필기체 선명한 편지로 오롯이 남게 되었다.

 

엄마가 다니는 절에서 신도들이 중국 성지 순례에 나섰다. 엄마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국 여행을 강행하였다. 근래 들어 무릎이 좋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에 아버지는 엄마의 성지 순례를 심하게 말렸다. 하지만 엄마는 저렴한 비용에 성지 순례를 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무릎이 아프다는 단점을 이기고 결국 성지 순례를 결행하였다. 사실 성지 순례는 메카와 이슬람, 예루살렘과 기독교, 스리랑카와 불교 정도로 생각했던 내게 중국 성지 순례는 많이 낯설었다. 그런데 무릎 수술까지 이야기했던 엄마가 성지순례라니? 아무튼 엄마는 성지 순례를 다녀왔고 기쁜 마음에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성지 순례 간다고 해서 처음에 안 갈라고 했다. 그런데 지나는 소리로 나이가 어쩌구 저쩌구 하기에 지난번에 있잖냐, 십년 전 금강산 생각하구 간다고 우겼다. 그런데 정말 중국에는 불교 유적이 어찌 그리 많으냐? 내가 간 곳이 그러니까 툰황 쪽인데 왜 그, 혜초라는 우리나라 스님, 신라의 혜초 스님이 바닷길로 왔다가 비단길로 돌아가려다가 이곳에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기행문이라는 걸 쓰고 미라가 되었다더라. 비단길, 그러니까 이 실크로드를 걸어가는데 이게 길이 아니라 사막이라 덥기는 해도 습기가 없어서 땀도 잘 안 나고, 그냥 걸을 만하더라. 가도 가도 끝없는 비단길을 따라서 걷다가 만난 툰황은 정말 웅대했다. 실크로드가 신라의 길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는데 그도 그럴듯하더라. 아무튼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부터 시작해서 그 분을 모델로 쓴 [서유기(西遊記)]의 삼장법사는 참으로 어질고 어질어서 참으로 뵙기에 좋았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백팔 요괴가 벌이는 신비한 세계가, 왜 그 재원이가 보던 만화의 미스터 손도 서유기를 가지고 만들었다면서, 비싼 장난감 사라고 해서 하나 샀는데 비행기 타고 와서 보니까 어디서 흘렸나,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잃어버렸나 보다. 없어! 아무튼 다음에 또 보이면 하나 더 살란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만화 주인공을 중국 사람들이 짝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도통 현지가이드랑 우리 가이드가 입을 맞췄는지 자꾸만 사라고 하니, 외국에 나와서 엄청 고생하는 젊은 사람 돕는 셈 치고 샀는데, 어디다 흘렸는지! 어쨌거나 다음에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가서 길림성 쪽에 가기로 했다. 그때는 아무래도 백두산 근처에 가니까 북한 스님이나 만나면 좋겠다. 그 나라에도 종교가 있다니 믿어 봐야지! 내 돈 안 내고 갔다 왔으니까 이번에는 내 돈 내고 한 번 가야 쓰겠다. 그때 용돈 달라고 안할 테니까 갔다 와서 글 쓰면 워드나 좀 쳐줘라. 애들 잘 키우고 그럼 끊는다. 잘 살아라!”예의 장광설을 펼쳐놓고 엄마는 내 얘기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참 속 편하신 분이다. 아무튼 엄마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성지 순례를 가시겠다고 했다. 북한의 스님을 만난다는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거슬렸다. 일본에 가서 누나를 보고 온 일이 잘 안 되었을까? 다시 서울을 거쳐 중국으로 가신다니 정말 걱정이 된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집에도 다시 들리지 않고, 아니 집은 고사하고 그리 바쁘시면 자식들 집이라고 좀 들렸다가 가면 얼마나 서로 마음이 편할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 말이 드물었던 엄마는 최근 들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시면서 말수가 점점 늘어났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엄마였기에 오랜 전에 엄마를 알았던 분들은 세상 좋아진 만큼 엄마의 말재주도 좋아졌다고 난리들이었다. 해는 점점 길어져 입춘이 지나고 이제 경칩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입학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형에게 엄마의 소식을 전했다. 형은 엄마가 중국에 가셨다가 인천공항을 거쳐 일본 도쿄에서 일주일 정도 큰누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중국 연변으로 갔다고 내게 소식을 전해왔다. 아마도 출입국 관리소에 근무하는 내 고향 친구 임연주에게 확인한 결과인 듯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사람을 통해 연결되고 이해되고, 사람을 통해 끊어지고 사람을 통해 오해되는 일이라서 형의 말을 듣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속으로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지금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중일 삼국지에서 엄마가 찾는 그 사람은 이념의 저편에서 애써 망각을 강요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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