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4. 솔개 닮기

madangsoi 2014. 2. 4. 23:37

 

결혼기념일에 내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뉴욕, 남쪽으로 가는 그 버스 정류소는 언제나 붐볐다. 생기에 찬 모습의 젊은 남녀 세 쌍이 까불거리며 샌드위치와 포도주를 넣은 주머니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플로리다 주에서도 이름 높은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다. 승객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황금빛 사장(沙場)과 잘게 부서져 오는 하얀 파도를 향하여. 차창 밖으로 추위 속에 움츠러든 회색의 뉴욕 시가가 뒤로, 뒤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세 쌍의 남녀들은 알지 못한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흥분 때문에 계속 웃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들도 뉴저지 주를 지나갈 무렵쯤 되어서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여 조용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자리에는 몸에 잘 맞지 않는 허술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앞쪽만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만으로는 나이가 어림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고 뒤에서 조잘거리는 그 남녀들이 무안해질 만큼 한사코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밤이 깊어서 버스는 워싱턴 교외의 어떤 음식점 앞에 멈추었다. 승객들은 다투어 버스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웠다. 단 한 사람 그 돌부처 같은 사내만이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그의 거동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멋대로 그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던 선장일까, 아니면 아내와 싸우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사람?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역 병사일까?

식사를 마친 승객들을 태우고 버스가 워싱턴을 떠날 때 일행 중의 용감한 여자가 그 남자의 옆자리에 가 앉아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우리는 플로리다로 가는 길인데 처음 가는 길이거든요. 듣자니까 그렇게도 경치가 멋지다면서요?”

하고 명랑하게 물었다.

“그렇지요.”

한참 만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야릇한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렸다. 잃어버렸던 옛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이었을까?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자신을 얻은 젊은 여자가 그에게 다시 말했다.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여자가 컵에 따라 주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완강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여자가 다시 일행 가운데로 돌아가자 그는 잠을 청하려는 듯 등을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었다. 버스가 다시 음식점 앞에 섰다. 이번에는 그 사내도 승객들을 따라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어젯밤 말을 붙였던 그 젊은 여자가 그에게 자기들과 자리를 같이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몹시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마음이 뒤숭숭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연신 담배를 피워 물곤 하였다. 젊은이들은 즐거움에 들떠 해변 모래사장에서의 멋진 야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소리 높여 재잘거렸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다시 버스에 오르자 그 젊은 여자가 또 그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사내는 그 젊은 여자의 호기심에 두 손을 들었다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내의 이름은 빙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이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결혼은 하셨던가요?”

젊은 여자가 혀를 끌끌 차고 나서 물었다.

“잘 모르겠소.”

“모르다니요?”

그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냈었소.”

그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할 형편인 만큼 만일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는다든지, 혹은 혼자 사는 것이 괴롭고 고생이 된다면 나를 잊어달라고 했소.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재혼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나를 그냥 잊어버려 달라고 썼소. 편지를 안 해도 좋다고 말이오.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 동안이나……”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란 말이죠?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소.”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은 지난 주일에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나는 또 편지를 썼소. 옛날에, 우리는 그때 ‘부른스 위크’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가 한 그루 있소. 나는 편지에서,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 두라고 말했소. 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걸려 있으면 내가 버스에 내려 집으로 갈 것이라고. 만일 재혼을 했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라고, 나도 잊겠다고 썼소.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 버리는 거요.”

여자는 깜짝 놀랐다.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일행들도 빙고가 보여주는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제 잠시 후에 전개될 광경에 대해서 지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마치 자기들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들 흥분에 들떠 제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폈다.

꾸겨지고 낡아빠진 빙고의 사진 속에는 부인과 세 자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부인은 비록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그 표정 속에는 착한 마음과 얌전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었다. 사진 속의 어린애들은 아직 어렸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마침내 이정표는 부른스 위크가 20여 마일 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젊은이들은 모두 오른쪽 창문 옆자리로 다가붙어 빙고가 말한 그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을 기다렸다.

이 이야기는 다른 승객들에게도 전해져 부른스 위크가 가까워올수록 버스 안에는 뒤숭숭한 설렘의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이상스런 정적이 버스 안을 채웠다. 어두컴컴한 침묵의 구름에 휩싸인 듯한 버스 안의 분위기는 마치 그 빙고라는 사나이가 집을 비운 그 잃어버린 세월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빙고는 그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흥분한 표정을 보이거나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굳어진 그 얼굴에서 누구라도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이제 곧 눈앞에 나타날 그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여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마을과의 거리는 20마일에서 15마일로, 다시 10마일로 점점 가까워졌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버스 안의 정적은 계속되었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꿈결에서처럼 아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치며 춤을 추듯 뛰었다. 그때까지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빙고 한사람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넋 잃은 사람처럼 차창 밖 멀리 보이는 참나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나무는, 그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20개, 30개, 아니 수백 개가 바람 속에 환영의 깃발로 마구 물결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는 동안, 늙은 전과자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문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노란 손수건]이라는 소설인지 아니면 실화인지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을 여기저기 찾아도 실화라고도 하고 약간 다른 내용의 소설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이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어. 항상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당신과 도연재원이가 아빠를 위해 우리 집 앞 화단에 노란 손수건을 수백 개 걸어놓는 망상에 빠지고는 해! 그러다가 이순원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란 소설을 읽다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되었지. 오래 전에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흥청망청 쓰던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편지를 쓴다. 그리고 집 앞 나무에 노란 손수건 하나를 걸어 달라고 편지를 쓰지. 만약 용서하신다면 노란 손수건을 한 장만 걸어달라고. 함께 기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알게 되고 궁금해 하지. 기차에서 내린 사람이 집으로 향하지. 기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일제히 함성을 질러. 나무에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걸려있는 걸 본 거지. 아버지는 아들이 혹시 보지 못할까봐 섬세한 배려를 한 거지. 그러다 생각했어. 우리 아버지도, 우리 엄마도, 장인장모님도 작가 이순원의 소설 속 아버지처럼 그렇게 불효막심한 자식을 언제까지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강석경의 [숲속의 방]을 읽으면서 도연이의 이름을 작명하려고 했던 것도 아마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어. 이순원의 [나무]를 읽으면서 열꽃이 피었던 재원이를 생각했고, 그때마다 우리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지.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식을 위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내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 같아.

당신과 결혼한 지 벌써, 아니 이제 겨우 14년! 15년 째 함께 살을 맞대고 정신으로 교감하며 살고 있는 내가 정말 자랑스럽다. 당신은 내게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을 날마다 내 눈이 잘 보이는 집 앞에 항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라는 이름으로 걸어주는 천사야. 아니 혹시 내가 못 보고 지나칠까봐 집 앞뿐만 아니라 동네 입구의 가로수마다 수백 수천의 노란 손수건들을 걸어놓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자꾸만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

도연이가 어제 생일 선물로 준 멋진 편지 역시 내게 화해와 용서의 노란 손수건이야! 내 뇌구조를 어떻게나 잘 그려 놓았는지, 우리 맏이의 속 깊은 모습에 감동이 스나미처럼 몰려 왔어. 재원이가 어제 내 볼에 해주었던 뽀뽀 역시 마찬가지야. 오늘 새벽에는 잠을 잘 잤는지 내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안방에 불을 켰던 것을 끄는 거야. 재원이에게 이유를 물었지.

“엄마 편하게 자라고 끄는 거야!”

어제 제 누나에게 강제로 빼앗은 왕눈깔 사탕을 입에 넣으면서도 엄마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우리 재원이. 웃음이 감동의 파도가 되어 밀려왔어. 오늘 새벽 출근길 재원이의 노란 손수건이 내게 인내와 이해의 시간을 갖게 했어.

3년 전이던가? 전날 아버지와 통화를 못 해서 다음날 오전에 전화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내게 노란 손수건을 수화기 너머에서 보내 주셨었지.

“어제 엄마랑 맛있는 거 드셨어요?”

“맛있는 거? 나 봐, 청수가 맛있는 거 먹었냐는데?”

전화기 저편 엄마 목소리!

“맛있는 거 먹었지!”

“허허, 엄마가 맛있는 거 먹었단다!”

“다행이네요!”

“네 형한테 한 마디 했다. 네 동생이 제 생일 때마다 제 엄마 수고했다고 돈 부친다고!”

“참, 뭐 하러 그런 말을 해요? 형은 더 큰 걸 하잖아요.”

“그건 그거구. 잔정이 더 오래 남는 거지. 그래서 형한테 들으라고 일부러 전했다.”

“형이 뭐래?”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그렇게 내게 노란 손수건으로 나를 칭찬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대신하는 거 같았어!

장인장모님이 툭 던져주신 현금 봉투 역시 내게 노란 손수건이 되어 내게 다시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해주셨지.

“날마다 밤늦게 오니 언제 줄 시간이 있어야지!”

“제 생일에 제가 한 턱 내야죠!”

“도연이 엄마 줘. 생일상 맛있게 준비하라고!

“……. 감사합니다! 도연 엄마에게 잘 전할게요!”

그러고 보면 나는 복 많이 받은 사람이야.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내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고 감동받게 하니까!

결혼이라는 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잘못된 생각이었어. 한 가족과 한 가족이 만나서 또 하나의 가족이 되는 거였어. 서로 소통하고 상통하고 경청하면서 서로 가족이란 이름의 한마음으로 닮아가는 거, 이게 결혼인가 봐.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되는 것, 딸이 엄마가 되고 엄마가 할머니가 되는 것! 그래서 할아버지할머니는 아들딸과 손자손녀를 보면서 이제 마음 놓고 다음 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히 새로운 세상을 향해 조금씩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푸르른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가는 것 같아.

솔개는 팔십 년을 사는데 40세쯤 되면 산정에 올라 반년에 걸쳐 고행을 한대. 길어져 쓸모없게 된 부리는 바위에 쪼아 부수고, 먹잇감을 움켜잡지 못하는 무딘 발톱도 새로 난 부리로 뽑아 버린대. 무거워진 깃털마저 뽑아 정리한 후, 새로운 부리와 발톱, 깃털로 새롭게 남은 40년을 산다고 하네! 앞으로 남은 사십년을 위해 자신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거래. 나는 올해, 만으로 마흔하나가 된 계기로 내 삶의 밑거름이 될 장편소설 한 편 쓰려고 해. 편히 쉬라고 준 내 직장의 배려를 있는 그대로의 배려로 알고 학교의 가장 높은 곳, 조그맣고 아름다운 다락방에서 멋진 소설 한 편 쓰면서 내가 사랑하는 내 아내와 도연재원, 어른들과 형제들에게 조금은 색다른 임청수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어. 운전면허 취득과 자동차 운전도 그 중 하나겠지. 서울에 살든 어디에 살든 우리들의 보금자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자. 도연이가 잘 자라주고 있고 재원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은 항상 집안의 모든 일을 알뜰살뜰 만들어가는 믿음직한 당신이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을게!

내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당신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게. 올 한 해 야간 담임이라서, 2년제는 5일제가 아니라서 토요일에도 오후 4시 20분까지 근무해야 하는 거라서, 같이 할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위기는 항상 기회라는 생각으로 짧은 시간 가족과 함께 즐겁고 알찬 시간 만들어 볼게. 벌써부터 여름방학이 기다려진다. 1998년 3월 22일 정말 잊을 수 없는 날! 당신이 내 마음에 영원한 노스텔지어로 온 날! 그날로부터 내 행복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이다. 사랑해. 미안해.

2012년 3월 22일. 당신의 남자 임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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