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3. 역경은 축복이다

madangsoi 2014. 2. 2. 16:54

   공자께서는 인(仁)을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했다고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정보화 세계를 살아가면서 웬 공자냐, 라고 하는 사람이 많겠다. 하지만 진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그 뿌리는 지키되 그 열매를 필요에 따라 재생산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 고리타분하다는 수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중·정보산업고등학교 국어과 교사다. 2007년 종무식에서 고민주 교장선생님께서 이군현 국회의원의 [역경은 축복이다]라는 자서전을 당신의 삶과 닮은 듯 조금 달라서인지, 속독하듯이 빨리 읽었다는 말씀을 들었다. 내게도 한 권 선물하셨던 이군현 국회의원의 자서전, [역경은 축복이다]를 색안경을 끼고 읽지 않고 책상 밑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쳐 둔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현실정치가인 이군현 의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 예를 들면 그의 성장과정에서 평화시장의 공돌이 생활, 검정고시 합격, 1년 늦은 대경상고 입학, 그리고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 졸업, 마산제일여중 교사, 장훈고 교사 그리고 미국 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카이스트 교수, 한국 교육개발원 교수 등을 역임하고, 최연소 직선 한국교총 회장 당선에 이어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서, 교육위 의원으로서, 우리 학교와 같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 교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40년 소원’이었던 ‘교사라면 누구나 가입하는 교원공제회나 사립학교 교사들을 위한 사학연금조차 가입대상에서 제외됨은 물론, 퇴직금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던’ 교원공제회와 사학연금 벌률 개정안을 의원 입법하여, 결국 국회를 통과시켜 주었던 고마운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2008년도 4월 총선에 대비한 홍보책자려니 하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군현의 이야기, ‘인간 군현이’와 만난 첫 장부터 나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는 경남 통영 바닷가 소년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남평(藍坪) 이군현 의원의 사람 됨됨이의 세계에 흠뻑 빠져 고민주 교장선생님의 말씀처럼 책을 유난히도 느리게 읽는 내가,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마지막 장에 손을 올리는 기적을 보였다면 과장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은 직접 책을 사서 읽어 보기를 권하면서 내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에서 미운 오리 새끼같은 우리 문제 청소년 학생들과 성인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겪었고, 아파했던 이야기들에서 해결책으로 삼고 싶었다.

    ‘갈치 두 마리, 담배 두 갑’의 윤영숙이란 학생의 이야기와 박동수 학생의 이야기는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에서 내가 경험하고 변화하는 모습과 절묘하게 오버-랩 되어서 더욱 실감이 난다. 경청(敬聽)이나 긍정(肯定)의 미학은 최근 읽은 [시크릿] 류의 서적에서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별개의 것이라 이해해 온 내게, 이군현 국회의원의 삶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만이 가지는 도전과 목표의식에 대하여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교통사고로 일을 못하는 아버지 대신 돈벌이를 하는 어머니, 그래서 손이 몹시 거칠었던 영숙이……. 학생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가정방문을 하고 나서, 교직원 회의에서 용감하게 ‘진달래 장학생’으로 학업을 지속하게 하였고 지속적인 편지 왕래를 통해 교사로 성장하게 하는 일화-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진실한 이군현의 모습은 어려운 속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키우는 진취적 기상과 학생에 대한 사랑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문제 학생 박동수에 대한 참회의 글은 교사로서 내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초년 교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일화, 말로 해도 해도 안 되면,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므로 해서 오히려 학생들을 제도권 교육 밖으로 내모는 우를 반성하는 모습에서, 나는 책임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정치인 이군현의 모습에 감동의 눈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시장 ‘시다’로 일하면서도 잊지 않은 배움에의 열정, 상용한자 3,000자를 익히는 소년 이군현에게서 평생교육의 밝은 내일과 ‘한강의 기적’의 저변에 깔린 대한민국의 교육열의 진실을 보았다.

    또 한 가지는 카이스트 꼴지 학생들의 자살에 대한 일화는 내게 또 하나의 충격적인 교육 현실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들이 모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이야기! 항상 1등만 하던 대학생이 카이스트에서 꼴찌로 몰린 나머지 자살하는 학생이 해마다 4, 5명이란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강남 엄마 따라잡기]에서 보였던, 과학고에 진학한 학생이, 성적에 비관을 하여 자살하는 장면이 단지 드라마적 상상력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개 그것은 충격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의 ‘나’처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학생들 개개인의 개성을 방조하는 우리들의 단절된 대화와 교육의 평준화가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성악을 하고 싶었던 이군현 의원의 따님이 방황하게 되고 대학 진학까지 포기하려 했던 일화가 시사하는 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난 10월 19일, 서울랜드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현장학습을 가서 본 뮤지컬 [캐츠 타운]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신께서는 모든 고양이들에게 반드시 한 가지씩의 재능을 주셨다!”

   그렇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기준에서건 1등에서 꼴찌까지 순위가 정해진다. 그런데 우리들은 획일적으로 모든 교과의 성적을 바탕으로 종합순위를 매기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과학고와 외국어고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동일계열인 과학 분야 학과와 외국어 분야의 학과에 진학하게 하여 전문가가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율형 사립고든, 인문계고든, 아니면 특성화고든 간에 그들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세 분의 대통령이 상업고등학교, 지금의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나는 꼴찌들이 모인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 ‘소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닭의 대가리가 되라!’고 말이다. 기존 10년간의 교육정책은 평준화 교육이었다. 평준화 교육이라고 해도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존재하게 되므로 우리는 교육의 질이나 양의 차원을 넘어 생각했으면 좋겠다. 1등은 1등대로, 꼴찌는 꼴찌대로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기대한다.

   물론 이것은 고교등급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꼴지들 중에 1등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신연좌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직, 성실, 원칙이란 단어가 참 마음에 와 닿았다. 이군현 의원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준 가치관! 세상의 많은 자식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델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정말 가슴 저린 현실이었다. 엄마소가 얼룩소이기 때문에 송아지도 엄마를 닮아서 얼룩무늬가 아니겠는가?

내 교육 인생에 새로운 멘토를 만났다는 감사함으로 이렇게 글을 쓴다. 삶의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그것을 축복으로 알고 도전을 응전으로 받아들였던 인간 이군현!

   사립학교 교사라는 맛있는 열매를 포기하고 고생길이 뻔한 미국 유학의 길로 나섰던 그의 용기, 무일푼인 남편의 비전을 믿고 함께 교사로서의 안정과 명예를 포기하고 고생을 함께 했던 그의 아내의 모습은 인생의 새로운 전기의 첫날을 맞이하는 나와 아내에게 용기를 주었다. 또한 미국에서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도 이군현은 대한민국의 교육행정 선진화의 꿈을 저버리지 않는 원칙을 보여주었다(‘청무씨의 교훈’). 그에게서 사람 냄새와 함께 정직하고 성실한 인간상을 보았다면 지나친 아부는 아닐 터이다. 그는 지금도 도전에 응전하면서 ‘피그말리온’ 효과를 믿고 있다. 정직과 성실에 바탕 한 ‘원칙’을 준수하는 그에게서 희망교육의 꽃을 기대하는 이유다. 만약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꼭 ‘인간 군현이’의 [역경은 축복이다]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작은아들이 보낸 책을 읽고 있다. 참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된 사람의 글을 읽는다. 검정고시라는 말이 낯이 익다. 아내는 검정고시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검정고시는 무슨 검정고시냐며 말렸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내는 대전에 있는 성인 중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충남대학교의 최고경영자 과정은 물론 농촌지도소에서 운영해온 주부대학까지 나온 집사람에게 중학교 졸업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은아들이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에 근무하지 않았으면 그런 학교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게 아닌가? 하지만 집사람이 집을 나간 것과 중학교 졸업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일본에 가 있는 큰애를 보고 싶다면 가면 되는 거고 성지순례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첫사랑을 찾고 싶으면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내게 밥을 하라면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 이건 좀 아니다. 평생을 남의 눈치 보면서 월급 꼬박꼬박 받아서 사남매 모두 서울소재 대학에 보내고 그 어렵다는 서울대까지 보낸 이 마당에 무엇이 아쉬워서 내가 이 나이에 밥하고 설거지 하고 빨래까지 해야 하는가? 아니 십분 양보해서 할 수도 있다. 내가 현역 복무 때 장교 당번병 아니었는가? 밥과 설거지, 빨래와 다림질은 선수다. 물론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가출도 아니고 이게 노년에 노망이 들었단 말이냐? 내일 모레면 결혼 50주년이다. 두 살이나 연상을 구제해 주었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교육대학에 진학하는 꿈을 포기하고 농사일과 직장일로 오직 가족을 위해 봉사한 것을 정말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왜, 이제 와서 금혼식을 위해 북아메리카 크루즈 여행까지 준비한 나에게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건가? 아니면 실종? 그건 아닐 것이다. 실종이 되었다면 중국과 일본을 오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튼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황혼이혼이다.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이렇게 집을 나가서 한 달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란 말인가?

   신금강대교에 저녁놀이 물들고 있다. 멀리 저녁 준비를 마친 도우미 아줌마가 대평역을 향해 급하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소담하게 가방을 메고 달리는 모습이 어딘지 눈에 익다. 집사람이 농촌지도소 운영 주부대학을 다닐 때의 모습이다. 그때 아내는 생활개선 주도 농가로 선정되어 부엌을 입식으로 바꾸고 계란 과자 만들기 등 제과와 제빵을 배워서 아이들에게 먹이고는 했다. 아이들은 엄마의 새로운 모습에 반했다기보다는 새로운 과자와 빵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충남대학교 최고경영자대학원 과정 다닐 때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내가 날마다 오토바이로 종촌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아마도 저 도우미 아줌마는 또 다른 일을 하러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밤부터 시작한 일과를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불현듯 참으로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 날마다 아파트에 와서 간단한 청소를 하고 내가 먹을 밑반찬과 찌개, 국, 그리고 밥을 해놓고 틈틈이 무언가 열심히 필기하고 읽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자격시험을 준비하는가 보다. 우리 막내아들 나이처럼 보이는 실제 나이 오십대 중반, 동안의 도우미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날마다 아내의 일기를 읽는다. 일기는 일기로 끝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 계속되었다. 농사일과 주부대학 이야기, 가끔은 내 이야기도 있었다. 큰아이가 일본에 가기 전과 결혼생활 이야기가 종종 보였다. 나도 모르게 큰아이가 그리웠는지 눈물이 났다.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던 큰아이는 일본유학을 갔고 조총련계 일본인과 결혼해서 두 아들의 엄마가 되어 잘 살고 있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 이유도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제 엄마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디지털 시대에 휴대전화를 무시하고 아날로그 친필 편지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와 두 외손자의 동영상을 몇 번 봤지만 눈 여겨 보지 않았다. 눈 여겨 보지 않은 게 아니라 항상 무심한 듯 애써 보지 않는 척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일본에서 의사로 살고 있는 조총련계 일본인인 사위는 우리나라 이름으로 김청산(金靑山)이다. ‘기무라 아오야마’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조총련계 일본인 중에서 가장 일본적인 사람으로 통했다. 두 외손자 중 큰애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떠오르는 신예이자 주전 포수이며 작은애는 일본 공립고등학교 국어교사다. 일본어 선생님이다. 일본프로야구 선수인 큰애는 벌써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낳았다. 녀석의 아내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한국 아이돌 출신 가수다. 네 살 연상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름을 얘기해도 잘 모른다. 아무튼 반일감정의 질곡을 화해의 바다로 만들어가는 가정이 바로 우리 큰딸의 가정인 셈이었다. 요즘 들어 관심이 가는 게 둘이 있다. 하나는 일본어이고 또 하나는 인터넷이다. 그냥 컴퓨터를 켜고 검색창에 자판만 두드리면 된다는 데 참 어렵다. 아니 두렵다. 이십 년 전에 운전면허를 딸 때와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그때는 오십대 초반, 지금은 내일 모레면 칠십이다.

   일본어를 하게 되면 두 일본인 외손자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 사람 냄새나는 편지 말이다. 아무래도 인터넷을 배우기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더 드는 모양이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통화이외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으니, 참 기계치가 되어가는 내가 초라하다. 일단은 일본어를 배워서 외손자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프로야구를 자주 본다. 신문에서도 자주 기사를 본다. 이대호 선수는 일본 팀에 간다고 한다. 타격 7관왕을 했던 선수가 일본에 가서 잘 했으면 좋겠다. 우리 외손주와 함께 뛰었던 이승엽 선수는 한국에 돌아온다고 한다. 김태균 선수는 적응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범호 선수는 아예 돌아와서 친정팀 한화 이글스 대신 기아 타이거스로 이적을 했다고 한다.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를 기대한다.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선수가 뛰던 시절처럼 일본에서 이대호 선수가 오릭스의 태양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외손자와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사실 축구는 보는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야구는 참 어렵다. 무슨 규칙이 그리 많은지. 두산에 다니는 큰아들에게 표를 좀 구해달라고 했다. 서울에 가서 작은아들, 손자 녀석과 함께 잠실야구장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자식들이 바꾸지 못한 내 습성을 내 손자들이 바꾸고 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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