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5. 아들과 함께 걷는 길

madangsoi 2014. 2. 4. 23:41

하늘이 정말 푸르네. 그래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나 봐요. 그런데 엄마, 왜 제가 어버이날도 쓰지 않은 편지를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 있는지 알아?

아마 엄마는 정말 궁금할 거야. 그런데 저는 제 인생의 첫 번째 선생님이 우리 엄마, 유선희 여사라고 생각해. 아니, 유선희 선생님이라고^^

엄마는 계속 선생님의 자리에 서서 있어서 잘 몰랐겠지만 저는 자꾸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제 삶의 첫 번째 선생님에 대한 동경이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엄마는 제가 세 살 때부터 아빠의 얇은 월급봉투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가족의 윤택한 미래를 위해 두 돌도 지나지 않은 딸과 함께 새벽길을 어둠을 헤치고 달려 갔었잖아여. 저를 업고요. 지하철 2호선에서 엄마는 수없이 울었겠지만, 저도 한 가지 사건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그 때 얼마나 울었겠어요. 그런데 젊은 아저씨들이 엄마더러 내려서 애 울음 좀 그치게 하고 타라고 해서 엄마가 한참이나 울었던 것 생각나요. 그래서 그 아저씨들이 미웠던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그 아저씨들도 지친 삶의 무게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으리라고 생각해요.(제가 이제 좀 나이를 먹어서 이 정도는 이해합니다요^^) 아무튼 저는 엄마의 영원한 제자입니다. 딸랑딸랑! 엄마이기 전에 제게 스승이었던 엄마에게 이렇게 스승의 날의 맞아 편지를 쓰는 게 쑥스럽지 않은 것은 엄마가 제게 절대적인 가치관을 심어준 유년의 기억이 제 뼈에 사무쳐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함께 걷던 길을 아빠는 이제 재원이와 함께 하려는 것 같아 좀 서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요.

 

아빠는 제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여섯 살 때부터 저와 함께 4월의 카페에 함께 갔습니다. 카페에 가서 파르페를 시켜놓고 한 동안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도 파르페가 나올 때까지 동화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파르페가 나오면 이내 저는 동화책을 놓고 파르페의 맛에 푹 빠집니다. 그러면 ‘나 한 입, 아빠 반 입, 나 두 입, 아빠 반 입……’ 이렇게 먹다 보면 아빠는 거의 먹지 못하고 저만 배가 가득해집니다.

“아빠, 파르페 많이 먹으니까 배부르다 그치?”

“그래, 파르페 네 입 먹은 사람이 배부르면 스무 입도 더 먹은 놈은 배 터지겠다, 그치?”

아빠의 한 마디에 저는 케이오 펀치를 맞고 링 위에 쓰러집니다. 아니, 카페의 소파 위에 보기 좋게 쓰러집니다. 아빠도 웃고 저도 웃고,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빠는 저보다 여덟 살 아래 동생 재원이랑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아빠는 제게 엄마처럼, 재원이의 선생님이 되려고 하나 봅니다. 이순원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란 소설을 사 들고 와서 밤을 새워 읽었던 아빠는 이내 해마다가 아니라 다달이 재원이를 데리고 기차여행을 갑니다. 저랑 함께 가기도 하지만 학교에 매인 몸인 저는 함께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운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엄마와 함께 서울을 지키고 아빠는 재원이랑 부자동행의 여행이라는 시간에 폭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가 기분이 나쁜 날에는 아빠가 딸인 저보다 아들인 재원이를 더 사랑한다는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열네 살의 사춘기, 민감한 여인이니까요.

 

조선일보에서 조금은 낯선 프랑스판 ‘흥부와 놀부’를 읽었습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프랑스판 흥부와 놀부를 내 블로그에 올립니다. 권선징악도 그렇지만 프랑스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용인하지 않고 놀부 격인 조세프를 개울에게 잡아먹히게 합니다. 한국식 인정주의보다는 서양식 합리주의가 나은 결과라고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동화인데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읽고 토론하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아빠가 말씀하십니다.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가치관의 차이를 이 작품 하나만 가지고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꽤 깊은 논리적 차별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아빠가 덧붙여 주었습니다.

 

옛날 프랑스 어느 지방에 조세프와 바티스트라는 형제가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형 조세프는 농장을 물려받았지만 동생 바티스트는 은화 한 줌만 받았다. 아들 다섯을 둔 바티스트는 먹을 것이 없어 온 가족이 굶을 판이다. 축제 전날, 그는 형을 찾아 가서 과자를 만들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형은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더니, 누더기를 벗고 빗속에서 벌거벗고 서 있어서 몸에 물기를 묻힌 다음 곡식 창고에서 구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몸에 달라붙은 곡식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곡물로는 과자 한 개도 만들지 못할 정도인 데다가, 그나마 창틀에 올려놓아 말리려는데 바람이 불어와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다시 형에게 찾아갔더니, 형은 이제 더 이상 해 줄 게 없으니 산 너머 여우 요정을 찾아가 보라고 한다.

 

바티스트는 요정을 찾아가는 길에 차례로 열매가 안 열리는 나무, 날지 못하는 독수리, 물고기가 찾아오지 않는 개울의 하소연을 듣는다. 여우 요정을 만난 바티스트는 자신이 부자가 되는 법과 함께 나무와 독수리, 개울에게서 부탁받은 질문을 한다. 그러자 여우 요정은 황금 낫을 한 자루 주며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열매가 안 열리는 나무 밑에는 두 개의 단지가 있어서 그 때문에 뿌리가 자라지 못하니 그 것을 치워주라는 것이다. 시킨 대로 하자 과연 단지가 나오는데 그 안에는 금이 가득 들어 있다. 독수리는 날갯죽지에 돌이 끼어 있어서 날지 못하고 있었는데, 돌을 빼자 훨훨 날아갔고, 그 돌은 커다란 다이아몬드로 바뀌었다. 개울에게는 사람을 한 명 잡아먹어야 물고기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부자가 된 바티스트는 농장을 사들이고 큰 집을 지어 아이들과 매일 과자를 먹으며 살아갔다. 동생이 부자가 된 이야기를 들은 형 조세프도 욕심이 나서 여우 요정을 찾아 길을 나선다. 그렇지만 나무에는 이미 열매가 잔뜩 열려 있고 독수리는 온데간데없다. 서둘러 개울을 건너려는데 사람 오기를 기다리던 개울이 곧 그를 삼켜버렸고, 그 후 이 개울에는 물고기들이 득실득실 거리게 되었다.

 

글쓴이인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는 프랑스판 [흥부와 놀부] 이야기인 [조세프와 바티스트]의 이야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민담은 문자를 모르던 일반 서민들의 심성을 파악하는 훌륭한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 것과 흡사한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과거 프랑스 농민들이 우리네와 생각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욕심 많은 사람은 화를 면치 못하고 남을 잘 도와주는 착한 사람은 결국 복을 받게 되어 있지 않은가. 새해에는 우리나라의 흥부나 프랑스의 바티스트 같은 착한 사람들이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흥부와 놀부’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명심보감(明心寶鑑)이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하고

적악지가(積惡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자신은 아니더라고 가족이나 후손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악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자신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후손에게 재앙이 생긴다는 뜻을 음미할 필요가 있겠다. 기부를 하고 봉사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여기에 후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면 더욱 반겨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내게 조선일보를 읽게 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라던 아빠의 말도 여운처럼 남았다. 남의 산에 쓸모없는 돌도 내게는 유용할 수 있다는 단어의 의미는 보다 구체적이어서 좋았다. 프랑스판 흥부와 놀부, 적선과 적악, 그리고 타산지석은 내게 흥미로운 지식의 새로운 습득이었다. 스스로 연구하고 터득하는 방법, 그리고 남에게 가르치면서 배우면 80% 이상을 기억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내 지식을 누군가에게 가르치면서 지식을 습득하는 아빠와 엄마의 직업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순간 박노해 시인의 ‘스승’이란 시가 스치듯 오버랩 되었다.

 

세상 직분 중에 으뜸은 사람 농사다

 

사람은 제자를 잘 길러야 하는 법

훌륭한 제자란 선생을 잡아먹는 자

훌륭한 스승은 추격하는 제자에 앞서 도망가는 자

 

생을 두고 끝까지 정진하며

나이 들수록 간소하고 단순하게

버리고 비우고 작아지고 날렵해져

제자에게 잡아먹히기 전

 

저 아득한 우주의 아가리로 몸 던져

꽃씨처럼 표표히 사라지는 자.

 

‘세상 직분 중에 으뜸은 사람 농사다’라는 구절에서 엄마와 아빠를 존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연의 ‘저 아득한 우주의 아가리로 몸 던져 꽃씨처럼 표표히 사라지는 자’에서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재원이도 올해부터 아빠와 4월의 카페에 가게 될 것이다. 파르페의 유혹 덕에 재원이는 아마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도 녀석은 동화책 기본 세 권은 읽어야 잠을 잘 정도로 책의 노예, 아니 책의 주인이 되어 있다. 아빠는 언제나 먹을 것 다음으로 책을 많이, 자주 사 오신다. 인터넷으로 구입하면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내가 말했더니 아빠는 공생(共生)과 공멸(共滅)에 대해 말씀하셨다. 인터넷 서점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건 인터넷 서점이 돈을 버는 것이지 출판사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그래서 결국 출판사는 손해를 보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홍보비용으로 생각하고 손해를 감수하고서 책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책을 많이 사면 살수록 인터넷 서점만 돈을 벌게 되기 때문에 출판사들은 하나둘 도산하게 된다. 출판사가 줄어들면 작가가 설 땅이 좁아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독자들은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래서 공생하기 위해 국어 교사인 아빠라도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꼭 off line, 즉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것이다. 참 아빠는 특이한 사람이다. 아빠는 내가 여섯 살 때부터 ‘메이플 스토리’를 매달 정기적으로 구독할 수 있도록 사주셨다. 엄마가 무슨 만화책이냐고 지청구를 하셨지만 양서든 그렇지 않은 서적이든 스스로 보고 좋고 나쁨을 터득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씀하셨다. 아빠도 초등학교 때부터 ‘어깨동무’라는 월간만화책을 매월 할아버지께서 구독하게 하셨는데 아빠는 만화에 중독되기는커녕 만화방과 멀어지고 좋은 책들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시골에 사셨던 할아버지께서 농협에 다녔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는 자식을 믿고 자식에게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려 하셨던 할아버지의 교육철학이었다고 한다. 이 교육철학은 물론 증조할아버지 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 내게 7대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하셨다. 그때 우리 집안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7대조 할아버지께서는 남의 집에 머슴을 살면서 성실하게 부를 축적하셨다. 아들인 고조할아버지에게는 한학과 신식학문을 가르치셨다. 배워야 무슨 일이든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부를 가르치면서도 아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치셨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알아야 하며 노동을 통해 사람 귀한 줄도 알고, 노동을 통해 먹는 것에 대한 감사함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7대조 할아버지는 지게로 논밭까지 쟁기를 지어다 주시고 아들에게 쟁기질을 하게 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이 지게까지 지게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나는 대목이라고 아버지는 입에 침이 튈 정도로 자랑을 하셨다. 그래서 아빠의 할아버지,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도 한학을 하셨으면서도 목수일도 하셨다고 했다. 세종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증조할아버지께서 손수 참나무로 깎아 만드신 장기판과 장기 알이 있는데 참나무를 일일이 켜서 모양을 만들고 인두로 지져서 유방의 한나라는 정자체로, 항우의 초나라는 초서체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솜씨 좋은 전설이 쥐라기의 화석처럼 이를 증거하고 있다. 지금은 세종시 때문에 사라진 우리 할아버지 댁도 증조할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셨고, 증조할아버지 댁인 기와집도 증조할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의 글씨는 연기군 지역에서 이름난 명필로 연기 지역 묘지석이나 비석의 대부분은 우리 증조할아버지의 작품이라고 하니, 문무를 겸비한 실학(實學) 가문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라고 아빠는 확신하셨다. 아빠는 장기 알 중에서 한나라의 궁과 초나라의 궁을 보여주시면서 한(漢)나라는 뒷면에 문(文)이 씌어 있고, 초(楚)나라 뒤에는 무(武)가 씌어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장기판에는 없는 특이한 형식이라고 하셨다. 증조할아버지의 가치관과 철학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문(漢文)이 바로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서 왔으며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문에 한나라에서 훈고학(訓學)이라는 학문이 유행하면서 학문이 발전했다고 하셨다. 분서갱유란 진시황(秦始皇)이 법가 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나머지 학문을 억압하면서 관련 서적들을 불태운 사건을 말한다고 했다. 진나라가 망하고 초한지(楚漢志)라는 소설로 유명한 항우와 유방의 역사적 대결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가 나온 해하대전(垓河大戰)에서 승리한 유방이 세운 나라가 한나라였다고 한다. 사면초가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슬픈 노래가 들려왔다는 것인데, 마지막 싸움에 진 초나라 병사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줌으로 해서 전의(戰意)를 잃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고 한다. 유방의 한나라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된 서적을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했으며 이를 훈고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나라는 문(文)이 발달하였고 한문(漢文)이라 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우리나라 고조선을 멸망시킬 만큼 군사력도 강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400여 년 동안이나 한문으로 유명한 이 나라에게 식민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를 한사군(漢四郡)이라고 불렀다.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 1부 3권에 보면 ‘낙랑 추출’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한사군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한나라가 우리 민족을 식민지배한 근거로,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는 2천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던 고조선으로 알고 있는 단군조선이 망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한글 같은 문자([한단고기(桓檀古記)]는 이를 가림토 문자라고 적고 있다고 한다.)가 있었을 것이며 400년 식민지배 과정에서 말만 남고 글자는 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아빠는 지금도 이를 믿고 싶다고 하셨다. 아무튼 증조할아버지의 장기판과 장기 알 이야기는 어느새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로 일파만파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아빠가 믿는 독서의 힘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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