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
천호중학교 독서토론동아리 임흥수
국어 시간에 심화학습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학생들의 관심과 그들의 취미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A4용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 물론 예문이 있었으므로 분량은 그 정도로 하도록 정해주었다. 그때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이나 중학교 선생님, 그리고 담당과목 교사인 나를 적고는 다소 아부 섞인 반응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관심이 가는 두 학생의 답이 공교롭게 같았다.
“없음. 선생님들은 다 거기가 거기다."
다소 충격적인 학생 둘의 답이 가슴 아팠다.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박지원의 [양반전]의 심화과정으로 [허생전]을 맛보기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선재'라 불릴 수 있는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꽤 많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선재(善哉-좋구나!)'라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하루하루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즐기고 있는 요즘.
천호중학교에서 ‘강전(강제전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떠나는 일부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이즘, 다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심이 가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20년이란 긴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숙제를 끝내겠다는 생각이 나를 ‘홀든'에게 다가가게 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자인 내 동기 김혜정 때문에 읽게 되었던 [가출일기]라는 성장소설이 ‘가출(家出)'을 너무 미화했다고 비판했던 나는, 연구발표의 주제 역시 ‘청소년 가출의 실태와 그 대안으로서의 문학’으로 거창했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서 보이는 ‘기표'의 숨 막히는 모범생에의 함몰 과정과 일탈이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처럼 어른들에 의해, 교사에 의해 모범생으로 만들어지는 그들의 숨 막히는 모습은 교육의 악화(惡貨)다. 하지만 학교는 양화(良貨)라는 긍정적인 모습보다 악화라는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나'처럼 종국 그들은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을 치달을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학교의 역기능을 돌아보는 성장소설의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기능을 양보할 필요는 없겠다.
“열일곱 살, 나도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책임질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안도현, [짜장면] 부분.)
가출 후 중국집 배달원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수학여행의 사진이 없음은 가슴 아픔이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서 속도를 낼 때만은 그것은 등 푸른 자유였을 것이다. 가출은 일탈이다. 하지만 그 일탈이 자유의 상징처럼 보여지는 것은 모범생이란 사회의 잘못된 사회화 탓이다. 하지만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탈은 삶을 꼬이게 하는 문제적 행동이다.
안도현의 [갈매기 학교]에서도 어린 갈매기들은 태양이 뜨는 곳에 대한 접근 자체를 용서받지 못한다. 어린 갈매기들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학교와 집, 이외의 곳은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어둠으로 치부된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양성(養成)되는 것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반항에 해당하며, 학교로부터의 퇴교를 명받을 수 있는 불손한 행동이다. [위대한 똥파리]의 젊은 똥파리처럼 행동하는 것은 결국 유리창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바보같은 행동인 것이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젊은 똥파리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뿐이다. 하지만 젊은 똥파리의 숭고한 희생은 보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또 다른 젊은 똥파리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면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헛수고일 수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왜냐 선생님’이나 [난․쏘․공]의 ‘수학 선생님’은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개구멍'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눈물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홀든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의 호수 이야기를 한다. ‘오리들이 아직도 살고 있을까?’ 하는 생뚱맞은 질문은 결국 일탈을 의미한다. 세 번이나 학교에서 잡초처럼 퇴출당한 홀든. 네 번째 학교에서마저 다섯 과목 중 영어작문만을 제외한 네 과목에서 낙제를 당한다. 수요일까지 남은 6일을 시간 죽이기로 버텨야하는 홀든에게 기숙사의 친구들은 모두 속물일 뿐이다. 기차에서 만난 두 수녀와 어네스트의 엄마에게서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융통성과 사회성을 배우는 홀든은 아름답다. 이성적인 셀리에게 사랑은 결국 정상적인 가정을 위해 학교를 다녀야하며, 학교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모범적인 설교를 들어야함을 알게 된다.
사랑에 배신당한 홀든에게 교장 선생님의 이중적인 모습(학부모에 대한 경제적 부(富)의 차이에 따른 차별적 대하기, 이중적인 토요일만의 만찬(晩餐)), 역사 선생님(스펜서)의 집착, 앤톨리니 영어 선생님의 변태적 모습 등등…… 기숙사의 속물들의 모습으로 인해 결국 가방을 싸서 뉴욕으로 향한다. 하지만 190센티미터의 ‘미성년자'라는 주변적 모습은 ‘홀든'을 더욱 사회혐오자로 만들어간다.
스트라드레이터와의 ‘제인을 둘러싼 싸움’은 홀든의 성(性)에 대한 순결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뉴욕의 호텔에서 만난 창녀와 거리를 둔 채 말만 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정부에게 5달러를 강탈당하면서 더욱 성에 대한 혐오를 가져오는 홀든의 모습은 청교도적인 순결을 지켜내려는 서술자의 안타까운 모습의 다름 아니다. 일탈로서의 파멸이 아닌 일탈이 가져오는 순기능을 보여주려는 이 수작은 변태 성욕자나 학생들의 은어, 속어 등을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때문에 문단의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보수적인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동생 ‘피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동생을 위해서 ‘자신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타협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여동생 피비가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오랜 횡설수설 끝의 진지한 답변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다짐하는 홀든의 말은 무척 감동적이다. 나보다 다른 이들은 생각하는 소년.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돌보겠다는 홀든의 모습은 샐린저의 인생관과도 닮았을 것이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호수에 있는 오리들의 모습만을 동경하던 홀든에게 택시기사가 보여준 관심은 이 소설의 다른 즐거움이다. 얼음이 얼고 오리(철새)들이 이동을 하면 모두가 호수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얼음 아래 물고기들이 얼음 속에서 봄을 기다리면서 먹고 마신다는 사실. 아주 느리게 먹고 배설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여자친구 셀리가 말했던 학교의 순기능을 믿고 묵묵히 사회화를 순종하는 대대수의 학생들의 상징이라고 믿고 싶다. 어른이기보다 먼저 교사로서 나는 성장소설의 이런 순기능을 사랑한다.
나는 문제아라고 오해받고 있는 우리 천호중학교 일부 소수 학생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결국 그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홀든에게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 한 마디가 그의 퇴원과 동격이라는 데서 이 소설의 재미는 배가된다.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에 순종하는 일만이 우리의 선택일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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