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17. 나랏말씀이 통하는 나라

madangsoi 2014. 7. 13. 00:52

문화대국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함!

한 권의 소설을 읽었고 그에 대한 답을 하려다 시간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의 천안함이 정체모를 타격에 의해 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저 후손들의 일이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을 겪고 보니 그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이렇게 그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전서공 난수의 후손인 임청수란 젊은이가 지은 [아빠 슐 먹어]는 행정중심복합타운 세종시에 대한 나와 전서공의 대담이었는데 그 문체가 대담하기에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전서공 : 이도(세종대왕)께서는 이 도시의 이름이 세종시라고 한 데에 대해서 공감하시는지요?

세 종 : 허허, 나와는 무관한 일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마도 세종시보다는 전서시나 행복시가 어울릴 듯합니다. 다만 전서공 난수공과 부안 임씨 가문에는 나름의 배려가 아닌가 합니다만.

전서공 : 역시 군벌(軍閥) 이성계 장군의 손자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문제의 본질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들고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그대로 묻어나시는군요.

세 종 : 아무튼 저야, 전서공의 충절을 기리고자 ‘임씨 가묘(林氏 家廟)’라는 액(額)을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을 내린 죄 밖에는 없습니다만, 행정수도니 행정중심복합타운이니 하더니 뜬금없이 지역민의 정서를 위로한다면서 세종시라고 하지 않았는지요?

전서공 : 군벌 이성계 장군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개창할 때도 수도를 옮기기는 옮겼지만 실제는 눈 가리고 아옹한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까? 개성에서 한양이야 지척이었으니 말입니다.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 수도 이전은 결국 고려 왕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죄를 지은 신하의 제 발 저린 일이겠지요. 수도 이전이라는 것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세 종 : 고구려의 광개토 대제의 아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정복 국가에서 수성 국가로의 변신이었겠지만 사실은 고구려 왕조의 붕괴의 시작이었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수도는 국가의 중심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수성과 공격이 쉬운 지형, 강을 두고 있고, 산을 등지고 있는 지형이야말로 최고의 입지가 아니겠는지요?

전서공 : 그렇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는 분명 한 쪽으로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수도보다는 통일 이후의 수도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이번의 행복도시, 세종시 이전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충청 지역의 민심에 환심을 사기위한 정치적 야합, 정치적 쇼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 종 : 하지만 전서공께서는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후손들의 문제는 후손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문제는 다만 우리들의 이름이 거명된다는데 있을 뿐이지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그들, 후손들의 문제입니다.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고 최소한의 노력을 할 것이냐, 아니면 그 물을 닦아버리고 말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지요.

전서공 : 자업자득이라는 말씀이군요. 아무튼 이씨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한 걸음 물러서시는 모습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만 문제를 직시하시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만은 성군(聖君)다우십니다. 누가 이도를 대왕이라 칭하는가, 묻는다면 중용의 도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백(白)만 알고 흑(黑)을 모르는 저 같은 이야 대왕을 따라갈 수 없겠습니다.

 

전서공 임난수과 대왕 세종을 만났다. 하찮은 꿈이었다. 두 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것같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이 있으니까. 창작도 마찬가지겠지? 누구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하지만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에 매몰되어 내일을 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전서공은 대왕 세종의 나이 열 살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서로 만날 일은 없었을 터이다. 말로만 들었던 지조 있는 충신에 대하여 세종은 참으로 집착이 대단하셨다 볼 수 있겠다. 아니, 조선 4대 임금 세종에게 죽은 전서공은 참으로 쓸모 있는 상대였겠다. 드넓은 영지를 줄만큼 쓸모 있는 신하, 하지만 부릴 수는 없는 신하였겠다.

 

처음 이 글을 대하고 조금은 상심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논리로 고향을 잃은 ‘임청수’라는 민초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 나라 위정자들의 흑백논리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강해져라. 강해지지 않으면 결국 어찌 되겠는가? 미국을 등에 진 대한민국이나 중국을 등에 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나 자주를 외칠 수 없지 않겠는가? [신기전]이란 영화를 보면서 정말 통쾌했다네. 명(明)나라의 그늘에서 숨죽이면서 조선력인 칠정산을 만들고, 조선의 시간을 갖고자 앙부일귀와 혼천의를 만들었던 것은 우리에게 맞는 과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힘은 결국 대, 중, 소 신기전과 귀선 등을 만들어냈다. 여진을 정벌하여 잃었던 압록과 두만의 이북 지역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명(明)도 감히 우리 조선에게 조공이니 무어니 하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던 때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준다. 실제로 일제가 동청철도부설권과 간도 영유권을 청과 맞바꿈으로서 사라진 조선의 영역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천주교 조선 교구 강역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음을 인지하라.

이제 조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이름을 버려야할 민족적 통합의 시점에 있다. 이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민족적 소통이다. 내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것이 단순히 중국의 한자를 제대로 읽어서 중국어를 잘하게 함으로 해서 세계화하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한인, 한웅, 단군 조선에서 우리 글자를 가지고 있었다. 한(漢)에게 400여년을 지배당함으로서 사라진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자를 살려내는데 자그마치 1,000여 년이 걸렸음을 인정하라. 내가 한글을 혼자 만든 게 아니라 새롭고 편하고 과학적으로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이제 남북의 언어는 70년이 못 되어 많은 이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나랏말씀을 가지고 있음으로 소통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조선 이래 하나의 문화 코드로 존재했던 우리 한민족의 역량을 기대한다. 우리 문화의 핵심은 소통이었다. 혈연적 단일민족이 아니라 문화적 단일민족이었음을 직시하라. 최근에 등장한 다문화가정이라는 단어는 내 마음에 흡족하다. 혼혈(混血)이 아니라 혼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의 국호 속에는 이웃 민족을 정복하고 살육하는 대신 함께 문화를 공유하고, 아우르던 한민족의 세계주의가 있음을 알라. 그래서 나는 백범 김구를 사랑한다. 물론 우남 이승만도 사랑한다. 박정희, 전두환도 사랑한다. 김영삼도 사랑하고 김대중도 사랑한다. 노무현도 사랑하고 이명박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모두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 모두의 초심을 사랑한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 김훈, [칼의 노래] 부분.

 

나는 북방의 4군과 6진을 개척하면서 최윤덕과 김종서에게 전권을 맡겼다. 그들은 진정한 군인이게 하는 것은 지도자의 믿음이다. 장수의 두 손과 두 발을 묶어 두고 중언부언하는 것은 정치적 발상이다. 현재 우리 남북한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 결국은 자주국방이라는 거대한 명제가 남는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민족의 안위와 안녕이 저변에 깔려있어야 한다.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 ‘율곡 사업’으로 불리는 국방예산의 막대한 낭비와 횡령, 권력자 소수의 착복은 율곡을 모욕하는 것이다. 율곡은 정치적 목적이 없었다.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다시 군비 확대를 운운하고 있다. 진실을 외면한 미봉책으로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 마라.

소통의 기본은 솔직함이다. 국민에게 솔직해지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한다. 가진 자들의 의무 이행이 부국강병의 시작임을 잊지 마라. 내 아버지 태종께서는 외척과 권신의 사병을 혁파하고 백성 앞에 정정당당한 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내 치세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내 아내의 친정은 조선을 위해 피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런 나를 도와 국익을 도모하였다. 그녀의 내조 덕에 나는 우리 민족의 문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소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다시 내가 사랑하는 후손, 지도자들의 초심을 사랑하고 싶다. 그들의 초심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이 지도자가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야기된다. 선거 과정에서 도와준 이들을 돕겠다는 일념과, 다음 선거에서 승리를 통해 자신의 퇴임 이후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그대들의 시대가 민주주의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절대 왕권 시대였던 조선에서도 여론, 민심은 천심이었다. 하물며 그대들의 시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초심을 지키고 담대하게 민심을, 여론을 받아들이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말라. 그대는 진정 눈 먼, 봉사가 되고 싶은 것인가?

이두를 통해 국문(國文)을 만들자고 했던 최만리에게서 나는 많은 힘을 얻었다. 그도 명(明)의 문자인 한자로 우리의 생각과 문화를 표현하는데 무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삼문과 신숙주를 여러 나라에 보내 각 나라의 운서를 찾게 한 것도 결국 소통의 보편성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우리 글자, 한(漢) 이전에 우리가 수천 년 사용했던 문자를 사용하는데 명(明)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국과 강병을 위해 과학기술의 진일보가 필요했다. 장영실과 박연처럼 태생적으로 미천했던 이들은 내게 큰 힘이자 짐이었다.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시간, 그리고 조선의 바다가 모두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어난 것이 조선의 꽃, 바로 조선 문자였다.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소통을 위해 자그마치 500년이 걸렸다. 중국 한족(漢族)의 문자에게서 벗어나는 데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2,000년이 결렸네. 이제 2,500년 전 화려하게 대륙을 지배했던 우리 한인, 한웅, 단군 조선의 문화코드를 되살릴 의무가 그대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민들에게 주어졌다. 한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 코드들을 인위적으로 세계화하려 하지 말라. 부국과 강병은 우리의 문화코드들을 세계화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지는 말라. 문화는 반드시 부국과 강병에서만 꽃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국강병을 이루기 전에 문화대국, 평화통일이 된 대한민국을 기대한다.

 

사족 하나!

전서공 부안 임공 난수 공의 후손인 [아빠 슐 먹어]의 저자 임청수와, 세종시 원주민 모두에게 대의를 위해 멸사봉공의 너그러운 용서와 포용을 부탁한다. 당신들의 할아버지 전서공처럼 그대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넉넉하고 고집있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될 것을 믿는다. 아울러 그대들의 희생은 우리 한민족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는 밑거름이 될 것을 믿는다. 고맙다.

나랏말씀이 통하는 나라, 평화통일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뿌듯하다. 함박눈이 내린다. 벌레들이 많이들 얼어 죽겠다. 풍년 소식이 기다려지는 오늘이다. 짙게 깔렸던 연기가 조금씩 걷히고 푸른 하늘이 우리 한민족에게 다가올 것을 믿는다.

2012년 2월 4일 입춘(立春)! 함박눈이 내리는 날, 대한민국 수도 서울 어딘가에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 이도.

 

“편지로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로 써보는 방송, 편지로 만들어가는 파란 꿈같은 방송에서 보내드리는 ‘나에게만 말해봐!’ 역사 속 인물에게 편지 쓰기! 임청수 선생님이 세종대왕에게 보내는 편지 잘 들어 보셨죠? 여러분들께서도 응모해주시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신중고 산타가 여러분께 특별한 선물, 문상을 드립니다. 많은 응모바랍니다. 아울러서 선정된 우수작에 대해서는 당신중고 다음카페에 게재함과 동시에 교지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많은 투고 부탁드립니다. 편지로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로 써보는 방송, 편지로 만들어가는 파란 꿈같은 방송, 편파방송 지금까지 저희는 임청수, 정성만이었습니다.”

 

임청수는 사무실의 오래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회갑 때 썼던 편지를 발견했다. 벌써 10년이 지난 편지는 색이 바래 있었다. 방금 전에 편파방송을 하면서 세종대왕과 중시조 전서공 임난수 공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역사와 만나는 방법을 소개한 후라서 같은 성(姓)을 쓴다는 것이 필연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십니다. 검붉게 그을린 당신의 얼굴엔 수 십 년 농사일이 훈장처럼 배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농사일이 서툴러 보입니다. 선무당처럼 선농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아버지일 겁니다.

우리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스물 두 해 동안 모나미 볼펜과 주판, 그리고 전자계산기로 이어지는 화이트 칼라의 낯익은 얼굴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22년이란 시간을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바꾸어 타시면서 네 명의 자식을 풍요롭고 정직하게 키우셨습니다.

밥 잘 먹고 똥 잘 누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다던 아버지. 당신은 애써 가슴 한 곳에 새카맣게 멍이 들어버린 상처를 환한 미소로 희석시키셨습니다. ‘울고 너는 박달재’처럼 궂은비 내리던 그 날, 살림 밑천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늘 자랑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큰 자식을 현해탄 건너 도쿄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제 나이 13살! 국민학교 6학년의 가슴에 맺힌 핏빛 하늘은 아마 어제 내린 비에 씻겨버렸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누나는 분명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웃고 있을 것입니다.

자랑처럼 짝을 맞추어 서 있는 우리 삼 남매 곁에 서서 아버지의 수연에 축복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즈음 인생을 설거지하고 계십니다. 스물 두 해, 농민과 가족을 위해 사셨던 당신.

당신께서는 과감히 컴퓨터와 함께 다가온 현실의 벽을 박차고 커다란 꿈을 꾸고 농사꾼이 되셨습니다. 안타까운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스스로 위안하고 있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였기에 여한도 없고 그저 용기와 격려, 박수를 보내준 분들께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만족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도 승부를 떠난 화합의 마당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제 다음 식사를 위해 깨끗이 더러운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수고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아버지, 인생은 육십, 회갑부터라는 커다란 명제 아래, 이 자리에 모이신 친지, 지기, 그리고 지역의 모든 어른들과 함께 더욱 힘차고 활기차고 아름다운 미래라는 식사를 위해 열심히 손에 익지 않은 설거지를 하고 계십니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저희 자식들과 평생을 같이하신 어머니가, 아버지의 설거지를 도와드릴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시고 격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으신 여러 어르신들과, 친지, 지기들께서도 아버지의 새로운 청춘을 위해 서툰 설거지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박한 차림이지만 술 한 잔 곁들이시고 흥겹게 노래 한 가락씩 하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안녕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제 아버지의 잔치는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 4월 17일 막내 청수 올림.’으로 끝나 있는 아버지 회갑에 부치는 글을 보면서 임청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어휘를 생각한다. 사람들이 만든 것? 도구! 그 중에서 물질적 도구, 정신적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것은 아마도 제사(祭祀)처럼 죽은 다음에 간절히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강요하는 것만큼 집착에 가까운 자기 합리화는 드문 것같다. 대단히……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것들에게 발목을 잡혀 산다. 그건 멍에다. 소의 모가지와 등줄기에 채워서, 코뚜레와 함께 작용하여 거구의 소를 지배하는 도구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도구들에 의해 굴종의 멍에를 쓰고 산다.

한 사람이 큰길 한복판에서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세 사람이 모여 한 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관심을 보이면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함께 세 사람이 보고 있던 한 곳을 바라본다. 이것을 동조현상(同調現狀)이라고 한다. 이것을 사회 현상에 대입을 해보면 재미있다. 앞서의 세 사람은 일반적인 세 사람으로 비유했지만 실제는 평판이 좋은 소수의 사람이다.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다수가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진술과 동조를 통해 축적되고 미화되어 전달된 정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열망의 증거이다. 이처럼 동조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이견을 내지 못하게 한다. 소외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교묘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들은 무리를 만든다. 당(黨), 파(派), 족(族), 벌(閥). 친(親)과 불친(不親)의 경계를 만든다. 이러한 당파와 족벌을 놓고 경계하는 자가 바로 리더다. 밀고 당기기에 능한 자, 그가 지도자다. 그는 왕이고, 그는 무소불위(無所不爲), 황제인 것이다.

전쟁도 불사하지만 평화를 항상 내세운다. 경찰국가로서의 지위를 지니려고 한다. 그건 영향력이다. 정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직장을 포함한 소속 집단은 항상 멍에를 씌워서 선택을 강요한다. 리더는 항상 선택을 강요한다. 리더가 원하는 선택에 반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리더는 선택의 순간에 찬반 두 가지를 내놓는다. 하지만 거기에 반대는 존재할 수 없다. 찬성이 있을 뿐이다. 그 찬성 안에 반대가 있다. 반대하지만 반대할 수 없음을 눈물로 감내하면서 찬성하는 척하는 방법밖에 없다. 반대는 퇴출이다. 반대는 쓰디 쓴 패배일 뿐이다.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처럼 항민(恒民), 원민(怨민), 호민은 언제나 함께 살고 있다. 항민은 반대를 감수하면서 찬성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대다수의 우리들이다. 여기에 원민은 비공식적으로만 불만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혼잣말처럼 세상을 욕하고 비판한다. 어쩌리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리더를 안주삼아 씹을 뿐이다. 사표를 던진다, 내일 아침까지만. 나에게는 그저 술기운에 리더를 욕하는 정도다. 호민(豪民)! 이들은 세상의 불만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이랑에 올라가 원민을 선동하는 선동가다. 역사 이래에 딱 두 명이 있었다고 한다. 견훤과 궁예! 하지만 오늘날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호민이라고 자처한다. 정치를 하는 이들이다. 원민의 불만을 폭발시키고, 원민과 함께 민중 봉기를 불러일으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항민을 부추겨서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라며 매 선거 때마다 원민과 항민을 부추기지만 결국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대부분 세 번 이내에서 그들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난다. 미디어의 힘도 결국은 한 번 이상의 정치 혁명을 불러내지 못한다.

김치를 담그고,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면서 민생정치를 표방하는 근래 정치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다. 두 번 이상 호민을 자처하는 자들은 없다. 한 번 기득권을 갖게 되면 호민은 더 이상 호민이 아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원민일 뿐이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수업을 마치면 집보다는 몇 사람 직장 동료 붙잡아 술자리를 하고 싶다. 하지만 엄처시하(嚴妻侍下)로 돌아가야 한다. 10년 전 편지를 읽고 있는 시간에 엄마는 아버지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환기되었다. 엄마는 호민이었을까? 아니면 원민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혁명의 날에 동참한 항민이었겠다. 혁명을 꿈꾸는 호민은 결국 혁명의 날을 위해 오늘은 깊은 숲속에서 잠을 자거나 자숙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오늘 집으로 간다, 아름다운 혁명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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