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음으로 침묵했다.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
직장이라는 곳에서는 많은 하찮은 일들이 벌어진다. 내부 고발은 엄두도 못내는 대한민국에서는 결국 자신들 간의 피 터지는 고발전이 알게 모르게 혹은 대놓고 숨은 채로 발생한다. 상호비방전이 파벌(派閥)이라는 이름으로 내 편과 적으로 갈라진다. 커다란 사고라 하더라도 내 편이 한 일이라면 덮어주는 것이 미덕이다. 물론 적이 한 하찮은 잘못은 침소봉대하여야 한다. 그래야 내 편이 영원한 내 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교내 폭력을 없애자고 교문 앞에 플래카드 몇 장 걸어 논다고 해서 교내 폭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아니 이미 어린이집에서부터 많은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는 ‘왕따’라고 이름 짓는다. 성석제의 [아름다운 날들]의 진용이처럼.
그때 나라에서 ‘혼식분식운동’이라는 걸 했어요. “혼식분식에 약한 몸 없다!”는 노래까지 보급시켜가면서요. 혼식분식 운동을 하는 교실의 점심 풍경은 이러했어요.(중략)
대개 쌀과 보리를 7대 3정도로 도시락을 싸오기 마련이지만 당시에는 대개가 보리와 쌀이 7 대 3일 정도로 어려웠다. 원두네 반에는 진용이란 아이가 있었다.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 도시락을 쌀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하면서 혼식을 하지 않는 아이 못지않게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아이, 진용이도 혼을 내셨다. 손바닥 맞기 아니면 꿀밤이 전부였지만 진용이는 묵묵히 맞으면서도 얼굴엔 늘 미소가 가득했다. 그 다음에는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냄비우동을 배달시키는 것으로 하루치의 위대한 ‘혼식분식운동’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읍내 잘사는 집 아이들은, 흰 쌀밥 위에 보리밥을 얇게 펴서 위에 얹었다. 순전히 검사를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진용이 엄마가 원두 엄마에게서 찌그러진 도시락과 혼식 장려책에 대한 노하우를 듣고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날은 진용이 생일이었다. 그날도 도시락 검사가 있었다. 얼굴이 고약해진 선생님은 다른 날과 달리 존칭을 쓰면서 진용이를 나무랐다.
‘거국적인 전 국민 혼식분식 장려운동에 대한 반동분자!’
선생님은 진용이의 도시락을 압수했다. 억울한 진용이는 말을 더듬으면서, ‘오늘이 자기 생일!’임을 주장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진용이의 도시락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서로의 손끝이 외면하는 틈을 타서 도시락이 정말 드라마처럼 한 바퀴 돌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진용이의 도시락은 위만 하얀 쌀밥을 살짝 덮었을 뿐, 아래 대부분은 꽁보리밥인 채로였다. 진용이 엄마의 기발한 자식 사랑의 집합체! 할 말을 잃은 선생님은 ‘주번!’을 외치며 교실 문을 나선다. 그 후로 진용이는 영원히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고, 선생님도 더 이상 진용이의 도시락 싸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적의 적이 내 편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장이란 공동의 적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만만한 존재를 입방아의 대상으로 삼는다. 만만한 존재가 결국은 왕따가 되는 것이다. 공공의 적은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한 ‘무녀리’가 되는 것이다. 무녀리는 나약하지만 나약하지만은 않지만 그들은 무녀리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어미 뱃속을 빠져나오느라 힘에 겨워서, 힘을 소진해서 작은 체구를 가지고 태어난 장자! 그래서 더욱 애처로워 보이는 무녀리, ‘문열이’를 언제나 그들은 괄시한다. 집단으로 따돌림을 시키고 위안 삼는다. 애써 측은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측은지심을 보이는 순간 그 역시 집단 따돌림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로 자신의 편을 만드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은 아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처럼 그들은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집단의 따돌림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한 번 찍히면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패러다임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자신보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하는 평범한 학생 천지를 자살로 몰고 가게 한 절친 화연이, 자신만은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그릇된 왕따 만들기를 세밀하게 그린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을 보면서 우리는 항상 자신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공공의 외톨이를 만들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처럼 그들은 철저하게 미운 오리 새끼를 따돌림 시킨다.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단아하고 청아한 백조의 우아한 비상을 보면서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아니 애써 부정하고자 한다. 자신들이 따돌렸던 그,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고 자위한다. 감히, 어찌 네가 그렇게 변할 수 있느냐고 자위한다. ‘설마’라고도 자위하고, ‘결코’라고도 자신을 애써 변호한다. 그것은 동화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녀리는 보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자신들이 따돌릴 또 다른 대상을 찾아낸다. 집요하기까지 하다. 새내기는 언제나 그들의 포섭 대상이다. 포섭이 되지 않으면 그들은 새내기를 미운 오리 새끼로 치부하거나 무녀리로 전락시킨다. 철저하게 짓밟는다. 눈에 보이게 밟는다. 그리고 애써 손을 털면서 미소를 짓는다. 천상 미소 천사를 자처한다.
내일은 내 일이 아니다. 중계에서 중개를 잘 해내고, 방학에서는 방학 숙제를 여유롭게 해낸다. 내 일이 아니라면 애써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일이라면, 내 편의 일이라면 그냥 있지 않는다. 물론 내게 해가 되지 않는 일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래서 그들은 무섭다. 이수에서 졸업을 한다. 이수할 거라면 다니지도 않았을 거다. 서울대 입구에서 서울대를 찾는 것은 어리석다. 서울대는 고개 너머에 있다. 서울대 입구는 서울대가 보이지 않은 곳에 있다. 고개를 넘어야 방송에서 자주 본 서울대의 ‘서’자를 형상화한 서울대 정문이 보인다. 서울대 정문을 들어섰다 해서 서울대 학생이 되는 건 아니다. 등록금과 입학금을 내고 정식 합격증을 받아야 서울대 학생이 되는 것이다. 서울대 입구에는 서울대가 있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서울대 입구가 있는 게 아니다. 서울대 입구는 서울대생뿐만 아니라 서울대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와서 즐기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내 일이 아니라면 내일을 위해 눈을 감을 필요가 있다. 부조리(不條理), 모순(矛盾), 자가당착(自家撞着), 적반하장(賊反荷杖), 어불성설(語不成說)로 대별되는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은 일’에 왜 그럴까? 하고 고민하지 마라. 그것은 허영이다. 현실이 모순인 것이 현실의 실제 모습이다. 남의 편에 서지 마라. 자신의 편에 서라. 남의 편에 서는 순간 우리는 소외당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으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 있는 무리수를 두지 마라.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예라고 하라. 그리고 모두가 노라고 할 때, 노라고 말하라. 아니, 권력을 가진 사람의 대답을 따라가야 뒤탈이 없다. 복지부동(伏地不動)은 나를 살리는 부적이다. 사표(辭表)를 샘표로 바꾸면 된다. 내일 아침까지만 사표를 날리고 내일 아침에는 사표를 샘표로 바꾸고 비굴하게, 아니 당당하게 손바닥을 비비면 되는 것이다. 지문이 없다는 것은 처세술에 능하다는 상징이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만 끝나면 돌아올 거라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1983년 8월 6일 이후 이런 삶을 살았다. 해체된 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죽어있는 것도 아닌, 선계(仙界)와 인간계(人間界)의 중간에 우리 가족은 살고 있었다면 나를 미친 놈 취급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미치지 않고 현실을 살기가 어렵다. 미치지 않은 사람만이 정신병원에 가는 것이다. 모두가 비정상인 세상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가면 접신(接神)이 된 양 신처럼 반말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다. 고로 미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비정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부고발을 하는 즉시 조직에서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쳐야 사는 이 세상은! 오늘은 내일에서 빌려온 어제였다.
'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 나랏말씀이 통하는 나라 (0) | 2014.07.13 |
---|---|
16. 나비효과-Hand in hand, Arirang! (0) | 2014.07.13 |
14. 우리 시대의 어른론! (0) | 2014.07.13 |
13. 독서는 나의 힘 (0) | 2014.07.13 |
12. 극단의 시각 (0) | 2014.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