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죠. 책의 향기, 독서감상문입니다. 10년 전에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1학년에 따닐 때 썼던 독서감상문이라고 합니다.”
“네, 그럼 ‘좀머 씨 이야기’ 속으로 한 번 빠져 봅시다. 편파방송 레츠 고오!”
몇 년 전에 이 책을 구입해 놓고는, 부끄럽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채, 책을 책꽂이에 꽂아 두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름에 방학 과제라는 부담감을 안고서야 이 책을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잊고 지내왔던 어린 날의 단편적인 기억들……. 어린 소년의 성장 과정을 따라 내 어린 날의 추억들도 함께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느라 하루해를 보내기도 했고, 담에 올라가서 발끝에 중심을 실어 걸어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기차가 다니던 길도 어린 날의 나에겐 즐거운 놀이터였습니다. 철로에 귀를 대고 있으면 기차가 어느 정도에서 오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기찻길 안쪽에 몇몇 친구들끼리 누워 있다가 기차가 오기 전에 잽싸게 빠져 나오는 것으로 무모한 용맹심을 테스트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주인공 소년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 자전거 타는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이용 자전거가 있었지만 가정형편상 엄두도 나지 않았고, 아버지의 큰 자전거를 수없이 넘어뜨리고 상처가 나면서 조금씩 자전거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전거 타기는 책 속의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배움으로써 먼 거리도 빠르게 다녀올 수 있어 당시로서는 대단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양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길을 달릴 때면 세상의 무엇도 부러운 게 없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어린이용 자전거를 갖고 싶은 마음만 있었을 뿐, 가져보지도 못한 채 성장함에 따라 오토바이를 갖고 싶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가용을 갖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갖고 싶은 것도 소박한 거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미스 풍켈 선생님의 발작적인 히스테리에 주인공 소년이 상처받고 자살을 생각했던 부분 또한 우리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듯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주변의 사람은 조연이어서 주인공이 죽으면 드라마는 끝나는 것처럼, 내가 사라지면 세상도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나의 죽음을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나의 존재를 두고두고 잊지 못하면서 살게 하고,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은 황홀하고 행복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고 가까운 친지들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 관계라도 그들에 대한 그리움, 아픈 마음은 세월 속에 점차 묻혀 감을 알게 됩니다. 나 또한 이렇게 될 수 있을 존재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고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잊혀져가기 때문입니다. 언제 내 가까이 이런 사람이 있었나, 싶을 만큼 그들은 불면 손끝에서 날아가 버리는 재만큼의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 슬펐습니다. 말이 삼천포로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좀머 씨를 책 속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머 씨에 대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설명이 없었기에 그 사람에 대한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때가 2차 대전 직후였기 때문에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정신이 돈 것이 아닐까? 괴로움을 잠시라도 떨쳐버리기 위해 그렇게 쉼 없이, 목적 없이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닐까? 전쟁을 혹독하게 치른 피해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가만히 놔두시오!’ 고집스럽게, 분명하게 그가 말을 했을 때 그가 미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머 씨가 목적 없이 걷는 것도, 늘 똑같은 길을 쉬지 않고 걷는 것도, 이 사람의 삶의 방식일 수도 있을 거라는, 다만 우리와 같지 않게 살기에 우리에겐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년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좀머 씨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천진함을 말하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좀머 씨는 각박하게 사는 오늘날의 우리 현대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목적도 없이 바쁘게만 어딘가를 가야만 한다는, 쉬려해도 쉴 수 없는 정신이 여유롭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의 ‘빨리! 빨리!’ 근성을 얘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 그의 말은 좀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빨리, 빨리!” 어디를 가야할 것도 같고 바빠서라고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이 그의 행동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책 속의 어린 소년은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좀머 씨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내가 어른이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고 추억할 수 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우리 국어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임청수의 독서박사가 되기 위한 10계명!’을 소개 하겠습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직접 경험해 보시면 임청수 선생님처럼, 아니 저처럼 일 년에 적어도 100권 이상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믿든 그렇지 않든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임청수의 독서박사가 되기 위한 10계명!
1. 무가지와 스마트 폰은 버려라!
2. 동화책을 읽어라!
3. 음식처럼 독서도 편식은 금물이다!
4. 베스트셀러는 독서를 망친다!
5. 쪽잠처럼 쪽독서가 정답이다.
6. 전반은 독후감으로, 후반은 명상으로 대신하라!
7. 콩나물시루에서 배워라!
8. 영화, 드라마와 접목하라!
9. 고전은 중학교 때 마스터하라.
10. 읽고 후회하라, 후회하면서 읽어라!
“네, [좀머 씨 이야기]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존(實存)의 문제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고 하죠.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처럼 자신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실존주의는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임청수 선생님의 ‘독서박사가 되기 위한 10계명!’은 지금도 유효한가요?”
“네, ‘믿든 그렇지 않든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속에 답이 있습니다. ‘독서박사가 되기 위한 10계명!’에 대해서 더 궁금하신 게 있으면 편파방송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욱 자세한 설명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임부장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어서 임청수 선생님과 함께 하는 ‘책을 만나다!’ 시간입니다. 오늘은 [소설 속에서 국어 교과서 읽어내기] 라는 주제입니다. 임청수, ‘책을 만나다!’ 레츠 고.”
2002년 11월 30일 토요일. 중앙일보 문화면 ‘문학의 향기’에 실린 하나의 기사를 보는 순간, 나는 내 지적 갈증을 한 순간에 치유할 수 있는 문학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간부터 나의 독서는 교과서와 참고서에 매몰되었고, 그나마 읽어 내려가게 되는 것들도 짧은 소설이나 수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늘 지적 목마름에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푸념이 핑계의 전부였다. 가끔 들르는 서점의 코너들은 역겨운 돈 냄새로만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 내겐 자위였다. 그런 내게 핑계의 무덤을 파헤쳐 준 것은 김탁환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과의 만남 덕이었다. 하나의 계기가 사람들의 사고를 한층 키워주는 것이라는 확신은 대학 7년간의 경험에서 알게 되었던 나만의 노하우. 그래서 인지 이날 나는 두 마리의 월척을 잡는 수확을 거둔다. 낚시를 꺼리는 내게 그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황석영의 [손님]과의 만남. 천재 이야기꾼 황석영. 하지만 그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산화한 의정부 여중생들의 아픈 상처가 전국토에 메아리치던 어느 날, 이상 기류 속에서 만난 낯선, 아니 낯익은 모습이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졌던 우리 민족 내부의 역사!(황석영은 신천을 직접 답사하였다. 이일로 인해 그는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회에서 격리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전통과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적 개혁사상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황석영의 글쓰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망각의 강’에, ‘레테’의 심연(深淵)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냄비 근성’이라는 소리가 과연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필요가 발명을 낳았듯이, 사회적 이슈와 독서가 아우러지는 순간에 지적 호기심은 배가된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위편삼절(韋編三絶)을 몸소 실천하신 공자나 세종대왕과 비교할 수 없는 범인(凡人)인 내게 있어서도 필요는 분명한 지식의 각성제임에 분명하였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소설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필사본 시대의 지적(知的) 다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서러워라……]는 소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소설의 힘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배고픔을 이겨내며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던 장옥정은 끼니를 아껴 소설을 읽을 정도로 이야기의 역할을 절대시하는 일련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전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옥정에게 소설(매설)은 정치적 거울로 인식되어진다. 옥정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김만중을 제거하기 위해,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을 모티브로 하여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에 일종의 도박 아닌 도박을 감행한다.
남해의 노도(怒島)에 유배되어진 김만중의 소설을 강탈하기 위해 스파이를 파견하고자 하는 장옥정에게 그의 오빠 장희재는 모독(冒瀆)이라는 필명의 매설가를 추천한다. 모독이 누구인가? 남한산성의 비극으로 인해 간첩 혐의로 패가한 가문의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숨기고 당상관의 꿈을 꾸다가 연좌제에 의해 꿈이 깨어진 자가 아닌가? 또한 그는 필사본 시대의 최고의 매설가로서 옥정이 빈곤하던 시절 매설의 원본을 거저 주던 추억 속의 그대 아닌가?
모독은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작가 졸수제 조성기의 문하에서 이야기를 배운다. ‘백능파’라는 엽기적인 그녀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위해 모독은 김만중과의 신의마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모독은 현실의 원칙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쾌락원칙을 찾으려는 근대로의 이행기 속에 살았던 진보적인 사람으로 각인되어진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보여지던 이인몽의 모습처럼 김탁환의 ‘모독’은 진리의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절대적인 지식을 지키기 위해 추리적 수법을 따라 가면서, 진리의 한 축을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
이인화와 움베르토 에코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록 옷은 그들의 옷을 입었지만 혈관을 흐르는 맥박과 맥박 사이의 간격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박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역시 추리 소설의 핵심은 반전의 반전이 아닐까?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모독의 [서러워라……]의 이분법적 저술. 그리고 [주자요어]에 교묘히 숨겨지는 심리적 압박감. 화재(火災)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가져갈 것을 요구하는 서포. 박운동(朴運動)의 심리적 작전의 성공. 하지만 박운동의 죽음으로 다시 사건은 미궁에 빠져 들고, 숙종의 압박이 다가올수록 일신의 불안을 소설 [사씨남정기]로 일순에 반전을 꾀하는 장옥정.
[구운몽]의 성진이 바랬던 세계가 8첩(팔선녀)을 거느리려는 김만중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용(龍)으로 상징되는 왕권이야말로 8처뿐 아니라 18처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결국 [구운몽]이 혁명의 전주곡이라는 모함 아닌 모함! 장옥정은 좌포청의 황매우(黃梅雨)를 노도에 급파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고, 그 순간 서인의 상징인 김만중은 ‘일생의 역작’, [사씨남정기]를 남기고 사라져 간다. 백능파의 명예욕을 감지한, 김만중과 모독의 절묘한 [사씨남정기] 바꿔치기. 그리고 황매우의 백능파에 대한 순수하고 황홀한 사랑. 박운동의 주검을 부른 흑암(黑巖)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안개처럼 앞뒤 분간이 어렵던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결국 후일담의 옷을 입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사씨남정기]의 정체. 그리고 김춘택을 거쳐 이덕무에게 전해지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회오리.
장르상 로맨틱 역사 추리 소설 정도로 장황하게 불리어질 이 소설의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 그것은 낯익은 문체와 구성, 그리고 그 속에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상황 판단 능력. 소설의 시대를 읽어 가는 훈훈한 인간적 시각. 이 모든 것이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을 읽어 가는 내게 작지만 커다란 파장으로 다가왔다.
물수제비를 뜨는 가볍고 즐거운 생활 문학, 하지만 예리하게 물수제비의 자적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김탁환 교수의 다음 궤적(軌跡)이 궁금하기만 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랑과 학문에의 열정을 행동으로, 생활로 받아들이려는 그의 따뜻한 학자적 양심 때문이다. 오랜만에 소설 속에서 국어 교과서의 작품을 읽어내는 기회를 얻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네, 임청수 선생님의 ‘소설 속에서 국어 교과서 읽어내기’ 잘 들었습니다. 수능을 준비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수시에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교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함께 듣겠습니다. 윤시내가 부릅니다. 공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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