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재떨이가 날았다. 큰누나가 일본 유학을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무라 아오야마(金靑山)와 결혼을 하겠다는 편지가 왔다. 며칠 후 다시 국제전화가 왔다. 1984년이었다. 큰누나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곧이어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 했고 엄마는 아버지의 크리스탈처럼 빛나는 유리재떨이에 머리를 맞고 20여 바늘을 꿰매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며칠 동안 앓아누웠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아침마다 내가 끓여주는 밥을 먹고 출근을 했다. 그때는 유감스럽게도 무상급식 뿐만 아니라 유상 급식마저도 없던 시대였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가 2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서울 올림픽이 4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LA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로 당당히 세계 10위를 한 해였다. 물론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권이 불참한 반쪽짜리 대회였지만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양정모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의 영웅 양정모는 그렇게 역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만 남고 시나브로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올림픽 금메달이 매 대회 10개 이상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며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데 대한 보복성이 짙었던 이 대회에서 중국은 4위를 차지하면서 올림픽에 당당히 데뷔했다.
이후 중국은 미국과 치열한 1위 경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G2의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이 금메달 51(은21, 동28)개로 금메달 36(은38, 동 36)개에 그친 미국을 제치고 홈 어드벤티지를 십분 발휘하여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은 전체 메달 수에서 110개로 100개의 중국을 제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베이징 올림픽 3위 러시아(23, 21, 28), 4위 영국(19, 13, 15), 5위 독일(16, 10, 15), 6위 호주(14, 15, 17), 7위 대한민국(13, 10, 8), 8위 일본(9, 6, 16), 9위 이탈리아(8, 10, 10), 10위 프랑스(7, 16, 17)가 차지했다. 우리가 알만한 강대국들은 거의 대부분 10위 이내에 진입한 것을 보면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의 실력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비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동계 올림픽이었는데 항상 쇼트트랙만 잘하는 나라로 인식되었던 우리 대한민국은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남녀 500미터의 모태범, 이상화, 남자 1만 미터의 이승훈 선수가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도 금맥을 캐내는 성과를 거두어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2개로 종합 4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쇼트트랙 선발전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넘어지는 실수로 탈락했던 이승훈 선수의 5,000미터 은메달과 10,00미터 금메달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었다. 이로서 우리 대한민국은 쇼트트랙만 잘하는 나라에서 동, 하계 올림픽을 다 잘하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과 함께 스포츠 5대 강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선전은 2018년 평창 올림픽의 개최로 이어졌다. 그것은 기적(miracle)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은 국가 경제력과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효자노릇도 했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같이 체제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정치적인 제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1940년 동경 올림픽은 이러한 대회로 유치하려 했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964년 10월21일, 도쿄올림픽 마라톤 경기. 결승점인 국립경기장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지난 대회 우승자 이디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였다.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우승한 그는 맨발의 아베베란 애칭을 받게 되었다. 올림픽 2연패를 노리던 아베베는 대회 6주전 급성 맹장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일본 자위대 소속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도쿄 국립경기장에 2위로 들어와 그나마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부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던 그는 트랙 반 바퀴를 도는 사이 뒤따라오던 영국 선수가 결승점 앞에서 자신을 추월하는 대역전극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도쿄올림픽 육상 부문에서 일본이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 바로 이 비운의 젊은이가 목에 건 동메달이었음에도, 일본인은 이 순간의 낭패감을 오래 되씹어야 했다. 3년 뒤 이 책임감 강한 젊은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은 국가가 젊은이에게 지운 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 일본은 올림픽을 국격(國格) 과시와 국운 상승 그리고 민족의식 고양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그 희생양이 바로 영광의 올림픽 동메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였다. 그는 자위대 군인으로서 군인답게 패전으로 절망에 빠진 일본 국민들에게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 그것도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24년 만에 열리는 대회에서 전세계인이 위성으로 보는 영광의 이 순간에 우승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베베라는 철인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앞만 보고 달리다 영국 선수에게마저 추월당하고 말았다.
일본 대중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장하다! 할복하라!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육상부문에서 획득한 유일한 메달이라는 가치는 희석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국민들은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훈련과 국제시합 출전을 병행했다. 이어지는 강행군 탓에 디스크 수술을 받게 되었지만 병세는 큰 차도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운동에 전념해야 된다는 이유로 이미 여섯 살짜리 아들을 가진 약혼자, 동거녀와 헤어질 것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들은 동경 올림픽을 제패를 위해, 동경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결혼식도 미루고 그렇게 약혼자로, 동거인으로 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심적 부담은 더해갔으며 결국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올림픽에서 영국 선수에게 추월당한 사실을 일본인의 수치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1968년 1월 멕시코 올림픽 평가전을 앞두고 중압감을 못 이겨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일본인에게 할복(割腹)은 자존심의 상징처럼 되어 있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92년 8월 9일 황영조(黃永祚)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선수와 함께 사투를 벌이는 모습은 정말 우리들의 심장을 터질듯하게 만들었다.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다 고이치 선수와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인다. 그리고 39킬로미터 부근에서 모리시다 선수를 제치고 바르셀로나 주경기장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모리시다는 당당하게 올림픽 은메달의 기쁨을 동메달의 독일 선수와 함께 나눈다.
올림픽이 정치적인 모습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등장한다. 베를린 올림픽을 비유하기 위해 독일 선수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여기 일장기 대신에 모리시다 선수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황영조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 선수가 아니라 일제에 저항한 손기정 선수의 분신(分身)이 된다. 이것이 스포츠의 정치적인 테크니션이다. 아, 그런데 도쿄 올림픽의 영웅이자 희생양인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가 기무라 아오야마(金靑山)의 아버지란다. 역사는 아이러니이다.
기무라 아오야마(金靑山)가 누구인가? 재일 한국인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쓰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일본을 위해 할복을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는 자신의 아들 김청산(기무라 아오야마)을 위해 일본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수준에서 기무라(金)라는 성을 지켜준 위대한 한국계 일본인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내 큰누나의 남편이다. 참고로 누나는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한 날로부터 정확히 8개월 만에 태어난 팔삭동이였고 아버지는 그래서 천재는 항상 조산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라면서 압구정(鴨鷗亭) 한명회를 보라고 말씀하셨다. 한명회는 칠삭둥이였다.
서울올림픽!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에 걸쳐 서울을 비롯한 한국 주요 도시에서 개최된 24번째 올림픽 대회.
대한체육회가 1979년 3월 문교부에 올림픽 유치 건의안을 제출하여 교육부에서 관계기관의 협조를 받아 충분한 검토를 거친 후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이 유치계획을 정식으로 발표함에 따라 서울 올림픽 대회의 유치 및 개최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1년 2월 26일 유치신청서를 국제 올림픽 위원회 본부에 접수하고 일본 나고야(名古屋)와 유치경쟁을 시작,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 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52 대 27표로 나고야를 누르고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당시 서울유치대표단은 총 10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식대표는 박영수, 조상호, 정주영, 이원경, 유창순, 이원홍 등 6명, 총회대표는 김택수, 김운용, 전상진, 최만립 등 4명이었다.
대회 이념은 ‘화합과 전진’을 기본으로 하고 올림픽 헌장을 충실히 준수함으로써 범세계적 화합을 이루며 인류의 오랜 염원인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하는 전기로 삼고 한국의 전통문화 선양과 올림픽 운동에 활력소를 부여하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나라들에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두었다. 대회 목표는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봉사, 최대의 절약 등이며, 5대 특징은 화합의 올림픽, 문화의 올림픽, 복지의 올림픽, 희망의 올림픽, 번영의 올림픽 등이다. 대회운영인력은 조직위원회 직원 1,435명, 자원봉사요원 2만 7,221명, 지원요원 1만 8,281명, 단기고용요원 2,775명 등이 동원되었다. 대회물자는 2,925개 품목에 708억여 원어치가 소요되었으며 7만 3,000여 명에게 65만여 점의 유니폼이 공급되었다. 경기시설은 경기장 34개, 연습장 54개, 관련시설 4개 등 모두 92개소가 활용되었다. 경기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올림픽 공원 및 기타로 구분되었으며 서울종합운동장에는 올림픽 주경기장, 잠실수영장, 잠실체육관, 잠실학생체육관, 잠실야구장 등 5개 경기장이 포함되었다. 올림픽 공원에는 사이클·펜싱·체조·테니스·역도·수영 등 6개 경기장이 포함되었고, 기타 경기장으로는 화랑양궁장, 서울승마공원, 원당종합마술경기장, 동대문운동장, 새마을체육관, 장충체육관, 로열 볼링 센터, 근대5종경기장, 대전공설운동장, 광주무등경기장, 대구시민운동장, 부산구덕운동장, 수원실내체육관, 성남공설운동장, 한강조정 카누 경기장, 태릉국제사격장, 서울대학교체육관, 한양대학교체육관, 상무체육관, 부산 요트 경기장, 마라톤 코스, 경보 코스, 도로 사이클 코스 등 23개소가 활용되었다. 경비는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를 포함하여 직접비 7,477억 원이 소요되었는데 조직위는 텔레비전 방영권판매, 복권사업, 기념주화, 메달판매, 휘장사업, 광고사업, 입장권판매, 선수촌 및 기자촌 입촌비, 아파트 분양에 의한 기부금 및 성금 등으로 자체 조달에 노력해 3,414억 원의 흑자를 남겼다.
경기내용은 올림픽 12년 만에 160개국 1만 3,304명의 동서양 진영 선수단이 참가하여 육상경기를 비롯한 23개 정식종목과 237개 세부종목으로 진행되었으며, 야구·태권도·배드민턴·볼링 등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다. 결과는 세계신기록 33개, 세계 타이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기록 42개 등 각종 신기록 307개가 수립되었다. 세계신기록은 수영과 역도에서 각각 11개, 육상에서 4개, 사격에서 3개, 사이클과 양궁에서 각각 2개가 나왔다. 사격의 3개, 역도·육상에서 각각 1개씩의 세계 타이기록이 나왔으며, 올림픽 신기록은 역도에서 85개, 육상에서 42개, 사격에서 37개, 수영에서 34개, 양궁에서 29개가 세워졌다. 개인선수로는 역도 60㎏급에서 터키의 나임슐레이마놀루 선수가 6개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고 동독의 여자수영선수 크리스틴 오로 선수는 6관왕을 차지했다. 미국의 남자수영선수 매트 비온디는 5관왕, 소련의 체조선수 블라디미트 아르테모프는 4관왕을 차지했으며 미국의 여자육상선수 그리피스조이너 등 4명이 3관왕, 한국의 여자양궁선수 김수녕 등 27명이 2관왕을 차지했다. 국가별 메달 순위에서 소련이 금메달 55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46개로 1위를 차지했으며, 동독이 금메달 37개, 은메달 35개, 동메달 30개로 2위, 미국이 금메달 36개, 은메달 31개, 동메달 27개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차지했으며 이어 서독·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프랑스·이탈리아 등이 5위에서 10위를 각각 차지했다. 한국은 레슬링에서 자유형 82㎏급 한명우와 그레코로만 74㎏급의 김영남, 유도에서 엑스트라라이트급의 김재엽과 하프라이트급의 이경근, 양궁의 남녀단체와 여자개인의 김수녕, 여자 핸드볼, 탁구여자복식의 양영자·현정화 조와 남자단식의 유남규, 복싱 플라이급의 김광선과 라이트미들급의 박시헌 등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성화는 1988년 8월 23일 그리스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 수석 여사제 카테리나 디다스칼루에 의해 채화(采火)되어 그리스 국내 봉송을 거친 후 8월 25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김용래 서울시장에게 인도되어 타이의 방콕을 거치는 항공로에 의해 제주로 운송되었다. 제주를 기점으로 한 국내봉송은 전국 21개 주요도시를 거치는 총거리 4,167.8㎞인 1,595구간에서 주자 1,467명, 부주자 2,782명, 호위자 1만 6,640명에 의해 21박 22일 동안 주자봉송, 선박봉송, 차량봉송, 승마봉송, 사이클 봉송, 오토바이 봉송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되었다. 개회식은 1988년 9월 1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다. 식전행사·공식행사·식후행사로 나뉘어 열린 개회식은 대회이념과 아름답고 씩씩하고 평화스러운 한국문화의 참모습을 고유의 춤과 소리와 색채로서 다양하게 표현한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폐회식은 10월 2일 오후 7시부터 90분 동안 공식행사·공연행사로 벌어졌다. 개·폐회식에는 남녀 초·중·고·대학생을 비롯한 전문단체·군인·외국인 등 1만 7,079명이 출연했으며, 행사용품만도 의상 90종 3만 9,613벌을 비롯하여 소품이 352종 24만 958점 투입되었다. 각 종목별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은 12개 팀 358명의 이동시상 팀에 의해서 27개 종목경기에서 270회가 거행되었으며 수여된 메달수는 금메달 580개, 은메달 570개, 동메달 628개였다.
선수촌·기자촌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62만 6,664㎡의 부지 위에 6층에서 24층의 건물로 86동 3,692세대 및 36동 1,848세대가 각각 건립되었다. 대회 입장권은 443만 5,505매가 판매되어 275억 원의 입장수입을 올렸다. 대회기간중에 동원된 보도진은 123개국 1,453개 언론사의 4,933명으로, 무역회관에 설치된 480석의 공동기사 작성실과 115개 개별사무실의 메인프레스 센터를 중심으로 열띤 취재활동을 벌였다. 수송시설로는 3,355명의 인력과 2,401대의 차량이 동원되었고, 의무시설로는 경기장의 31개 선수진료실, 선수촌과 행사장 외 13개 의무실 및 42개 지병원에 1,952명의 의료진이 투입되어 3만 613명을 진료했다. 문화예술행사로는 경축행사·공연행사·전시행사가 열렸으며 스포츠 과학학술대회도 열렸다. 경축행사로는 한강축제를 비롯하여 청소년축제·지구촌축제·거리축제 등이 포함된 서울축제가 열렸으며, 공연행사로는 서울국제무용제·서울국제연극제·서울국제음악제·전통예술축제 등이 열렸다. 전시행사는 서울미술대전, 서울문화재특별전, 올림픽 기념종합전, 세계현대미술제 등이 함께 열렸다.
서울올림픽은 Daum 백과사전의 내용처럼 대한민국의 국격을 한 단계 끌어올려서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하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바탕 한 선진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우리는 혈맹(血盟)이자 우방(友邦)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전쟁의 어드바이서 소비에트 연합, 소련(蘇聯)을 응원하는 해프닝을 접하게 된다. 세계적인 그룹 코리아나가 불러서 세계적인 히트곡이 된 ‘Hand in hand’의 상징은 바로 이념을 넘어서 세계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사실상 반쪽짜리 대회가 된 데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잠실벌에 들어선 올림픽 주경기장과 부대시설들은 판자촌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났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바로 경제성장과 이에 따르는 선진국 진입과 직결된다고 모두가 믿었다.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988년 7월 19일, 이른바 7.19조치가 내려짐으로서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울올림픽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자의적 월북작가는 물론 타의적 납북작가에게까지 지워졌던 이념의 굴레가 해금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임꺽정]의 홍명희를 포함한 5명은 제외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를 불문하고 이 조치는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월북작가와 납북작가의 작품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는 시절이었으므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가 당시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게 사활을 건 최우선 과제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개회식에서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Giovanni Giorgio Moroder, 미국의 작사가 Tom Whitlock, 그리고 한국의 작사가 김문환에 의해 탄생된 4분 13초의 노래이다.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 잡고//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 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 잡고//
See the fire in the sky/ We feel the beating of our hearts together/ This is our time to rise above/ We know the chance is here to live forever for all time//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Everytime we give it all/ We feel the flame etenally inside us/ Lift our hands up to the sky/ The morning calm helps us to live in harmony for all time.//
코리아나가 부른 ‘Hand in hand’은 당시 독일, 일본, 홍콩, 스위스, 스페인을 비롯한 17개국에서 1위를 차지한다. 코리아나가 서 있는 무대 주위를 돌고 있는 독수리와, 곰, 그리고 호랑이가 손에 손을 잡고 무대를 도는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다.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와 소련을 상징하는 불곰,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호랑이이의 내포였던 것이다. 독수리와 불곰을 호랑이가 화합하게 한다. 바로 서울올림픽의 모토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들어도 세련된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상, 즉 냉전 시대를 살아가던 1988년 당시 세계인들의 염원이었던 세계 평화에 관한 가사는 말 그대로 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전쟁으로 100년이 지나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던 맥아더의 예상, 악담을 당당히 깨고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세계 유일의 나라,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당당히 나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던 것이다. 주제곡 선정에 많은 시비가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대회이므로 한국어로 불려야 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와 작사가, 가수가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시비에 대해 올림픽 조직 위원회는 정공법을 택했다. 올림픽 조직 위원회는 당시 국내에서 만들어졌던 모든 올림픽 관련 곡들과 ‘손에 손 잡고’ 등을 비교 감상하는 이벤트를 열어버렸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워낙 ‘손에 손 잡고’의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결국은 공식 주제가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북소리와 아리랑,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와 이데올로기를 넘어 평화를 염원하는 노래 가사는 한 편의 서사시가 되고도 남았다.
한국의 역사와 세계인의 염원이 녹아난 올림픽 주제곡 ‘Hand in hand’은 올림픽의 성공 못지않게 대한민국 문학사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월북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고여 있던 한국 문학이 새로운, 아니 잠재되어있던 반쪽을 찾아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공전의 히트곡이 된 것도 바로 이러한 흐름의 반영이었다. 가수 이동원이 작곡하고,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테너인 박인수가 부른 이 노래는 가요 탑10에도 상위 랭킹이 되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사건이었고 월북문학에 대한 새로운 기대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일은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얼마나 열린 시각으로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합은 독립국가 연합을 거쳐 러시아와 각각의 나라로 분리독립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올림픽은 그렇게 세계를 평화의 장으로 나가게 하는 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 현장에 고르바초프, 즉 고르비와 노태우가 있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겠지는 몰라도/ 대한 독립만세 때부터 펄럭이고 있습니다/ 오늘도 시청 앞에 걸린 저 태극기/ 삐딱하게 걸린 널 보고 있으니까/ 왠지 나를 보고 있는 거도 같은데/ 우리 앞을 지나가는 저 많은 사람 중에/ 왠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소외감/ 나는 그래도 내가 만든 삐따기야/ 하지만 너는 우리가 만든 삐따기/ 바람이 부는 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절대로 삼풍은 또 불지 않았으면/ 이 비가 오는 데야 어쩔 수 없겠지만/ 절대로 태우는 또 오지 않았으면.//
삐딱하게 걸린 저 태극기! 삼풍은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산업화, 근대화, 도시화라는 삼풍(三風)이 오로지 고속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상징되는 것은 말할 것이 없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받지 않는다! 이 명제를 6.29 선언으로 집권한 노태우 정권의 부도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삼김(三金)으로 상징되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어서 친구 전두환과 함께 민주주의를 꽃피웠다고 자만했던 노태우(盧泰愚)! ‘크게 어리석다’는 말의 반어를 승화한 그가 남긴 또 하나의 공약은 평생교육법이란 이름으로 기존의 제도권 밖에 있었던 고등공민학교와 전수학교를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제도권으로 귀속, 아니 구속시키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을 대표하는 젓가락 문화와 교육열은 고등공민학교와 야학이라는 비제도적 교육제도를 통해 한국인의 향학열이라는 갈증을 해갈시켰다. 1987년 대선을 1년여 앞두고 노태우 후보는 이를 법적 절차에 의해 합법화시켰다. 전국에 50여 개의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겉모습만 바뀌는 혁명이 일어났다. 학력인정 학교는 정규교육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손익의 문제를 넘어서 개인이 국익을 위해 태어난 자랑스러운 학교 형태였다.
그렇게 성장한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들은 2011년 위기를 맞는다. 특성화 고교에 지원하는 학비 지원을,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들은 법의 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고 이에 반대한 특정지역 학교들이 감사원, 헌법재판소, 해당 교육청, 교육과학기술부에 탄원 및 법 개정을 요구하다 속칭 괘씸죄에 걸려서 법대로 존속되지 못하고 법대로 폐교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초중등교육법에 기준을 맞추고 평생교육법으로 설립을 인가한 교육과학기술부와 지방 교육청은 협박과 공갈로 적게는 20년에서 많게는 5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재(私財)를 털어서 음지에서 대한민국의 교육의 사각지대를 책임졌던 이들에게 사기꾼, 범법자의 멍에를 씌우고 있는 것이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비도덕적이고 비교육적인 표적 보복 행위에 대해 하늘이 해당 교과부 장관과 시도 교육감, 그리고 실무 교육공무원들에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필요할 때는 각종 혜택과 포상을 하더니 이제 와서 교육주체에서 제외시키려는 그들을 향해 헌법 소원과 손해배상 청구 등을 통해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 구성원들, 교장, 교사, 교직원 및 그 가족을 대신해서 항의하고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념의 대립이 해빙을 맞은 그 작은 시작은 바로 월북작가와 그들의 작품의 해금, 바로 7.19조치였던 것처럼 우리 지역 교육감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학교들의 자립, 자결, 자위의 역사도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의 창대함을 믿을 뿐이다.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 잡고.
Hand in hand, 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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