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방송(임흥수, 장편소설)

9. 내 시각이 소수의 시각이 될 때

madangsoi 2014. 2. 22. 21:30

2011년 12월 24일.

크리스 마스 이브를 맞아 아내와 함께 영화 [마이웨이]를 보러 갔다. 예의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한 기대는 하지 말라는 혹평과 함께 나를 이 대작으로 끌어들인 것은 무엇인가? 그저 아내에게 습관적으로 성탄절 이브를 볼 만한 영화 한 편으로 대체하기 위해서였을까? 텔레비전마다 영화 예고 프로그램은 마이웨이를 추천하고 있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이 대작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참으로 많은 평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이 영화로 이끈 것은 [원빈 일병 구하기]가 보여준 사람 냄새 때문이었다. 자주 눈에 띤 장동건과 오다기리조의 낯선 모습도 한 번 시도해보자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조금의 사전 지식을 모두 잊고 영화에 몰입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조선 청년 기데이 손(손기정)에게 올림픽 금메달과, 남승룡에게 동메달을 빼앗긴 일본에게 조선 청년들은 반갑지 않은 존재였겠다. 대동아 공영을 위한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1940년 동경 올림픽을 향한 일본인들의 마라톤 전쟁은 핏빛 전쟁으로 끝이 났다. 조선 청년 김준식과 일본 청년 하세가와 타츠오의 갈등과 이해를 다룬 이 영화는 그냥 아주 시원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지는 전쟁만을 찾아서 조선 경성에서 프랑스의 노르망디까지 펼쳐지는 사건은, 사실은 비약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노르망디에서 찍은 독일 군복을 입은 동양인 한 명의 사진 속에서 비약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하세가와 타츠오 역의 오다기리 조의 인터뷰가 얼마나 객관적인가를 영화가 끝나고 나서 알았다. 객관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주관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다기리 조의 객관을 애써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규는 이 영화를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만들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철저하게 주관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1926년 처음 만난 두 청년에게 마라톤은 희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아니 식민지 청년 김준식에게는 놓지 못할 희망의 끈이었다. 하지만 손기정의 1936년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청년 김준식에게 절망의 시작이었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인력거꾼 김준식의 희망을 통해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조선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의 방문은 또 다른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결국 승자가 된 준식은 반칙패를 당하고 이에서 촉발한 폭동은 결국 조선 청년들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황군이 되어 충성하라는 판결과 함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 관동군 사령부. 소련군과의 전쟁에서 퇴각을 명령한 대좌를 대신해 나타난 타츠오 대좌는 피로서, 죽음으로서 이 전쟁을 이기고자 한다. 여기에 우리들의 희망 판빙빙이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일본군만 저격해 죽이고 김준식에게 붙잡힌 그녀는, 일본 관동군에게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와 자신이 강간을 당하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하는 모습은 처연하다. 전쟁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었던 강제규 감독은 잠시 중국인과 여성을 상징하는 판빙빙을 통해 전쟁은 사람을 개로 만들고, 그 개는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판빙빙을 구해 탈영하던 준식은, 개미떼처럼 다가오고 있는 소련제 탱크를 보고 남은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관동군 사령부로 돌아간다. 자살특공대를 결성하여 전쟁을 승리로 전화하려는 계획은 소련군의 가공할 탱크부대의 무게에 무참히 격멸되고 만다. 여기서 하세가와 타츠오는 개죽음으로 조선인들을 몰아간다. 물론 일본인도 함께. 그렇게 조몬한 전투는 일본군의 패배로 끝이 난다. 끝없이 다가오는 탱크부대를 가미가제 정신으로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탄과 함께 쓰러진 김준식과 하세가와 타츠오는 소련의 모스크바 행 열차에 태워져 강제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잃게 된 김인권(안똔)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을 보여준다. 일본이 자신들, 포로들을 버린 사실을 믿지 못하는 타츠오는 시간이 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일본군 대좌의 모습에서 차츰 마라토너 타츠오로 변해가는 모습을 김준식과의 갈등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소좌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폭동의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이 집행되는 가운데 극적으로 독소전에 참전하게 된다. 독소전에서 타츠오는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개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보게 된다. 격렬한 폭음 속에서 독소전마저 끝이 난다.

준식은 독일군으로 위장하여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에 도착하고 여기서 부상당한 타츠오를 구하기 위해 독일군에게 약을 구하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와 달리 의사였던 아버지의 권위로 독일 유학을 준비했던 덕에 타츠오는 독일군으로서 동방부대에 편성될 수 있었다. 노르망디에 배속된 동방부대에서 타츠오는 준식을 찾지만 동양인은 단 한 사람, 자신이라는 말에 절망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언제나처럼 조몬한의 연병장과 소련의 벌목장을 달리던 한 사람을 너무나 닮은 한 청년이 노르망디의 모래사장을 달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알프스에서 격은 신기루라 생각하는 순간 노르망디의 푸른 물결처럼 달려오고, 달려가는 준식을 보고 둘은 전쟁처럼 뜨거운 포옹으로 만남을 맞이한다.

칼레리로 상륙작전이 변경되었다는 잘못된 첩보로 인해 부대가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타츠오는 쉘브르 항구로의 밀항을 위해 새벽 탈영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 새벽에 연합군은 칼레리가 아니라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둘은 죽음을 무릅쓰고 달린다.

“내 등만 보고 달려!”

준식의 그 말은 참 무겁게 들려왔다.

타츠오와 준식은 포탄을 뚫고 달려간다. 그러다 준식이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 자신의 희망이었던 마라톤 제패를 위한 희망이 절망으로 변해간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 달리다가 다시 한 번 포탄에 맞는다. 이제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순간 김준식은 자신의 인식표를 뜯어 타츠오에게 건네주면서 말한다.

“이제부터 너는 일본인 하세가와 타츠오가 아니라 조선인 김준식이다. 경성으로 돌아가서 김준식으로 살아라. 그게 네가 사는 길이다. 전쟁이 끝나면 나를 위해, 김준식으로 올림픽 마라톤에 나가라. 조선인 김준식으로 말야.”

꼼짝없이 전범이 될 수밖에 없는 하세가와 타츠오는 조선인 김준식이 되어 194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나선다. 그리고 아마도 올림픽 월계관을 목에 걸었으리라. 여운처럼 달려가는 오다기리조는 장동건을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아, 대한민국 김준식 선수 런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을, 앞서 달리던 모든 선수들을 물리치고 감격의 결승선을 통과하고……

 

영화가 끝나고 클로징이 내려오고 있었으나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이마저 다 끝나고 신림동의 서쪽 하늘을 보면서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오히려 문장 속에 갇힌 나의 감수성은 영화에 대한 내 감동을 불식시키고 희석시키고도 남는다. 나는 그저 남들보다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하 2층 세종서점에서 만난 영화 [마이 웨이]의 원작, 김병인의 소설, [디 데이](열림원, 2011)는 읽지 않았다, 애써.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이승철과 크리스티나의 [I believe]를 듣는다. 순간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의 감동은 문장 속에 갇히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독서에서도 음식을 먹을 때처럼 좋아하는 것만 먹게 된다. 독서의 편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미 마음은 읽고 싶은 책에 손이 간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필독 도서라는 다양한 식단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자위한다. 성장기 청소년에게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필수아미노산처럼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알려준다. 무기질이 부족하면 몸에서 알레르기와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면 좋지 않지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양다리로 오해받아 양쪽에서 고립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삶이 괴롭지 않게 된다. 중용이란 남모르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임을 알게 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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