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인문책쓰기(타임캡슐2044)

5. SeungSoo's Movie Story-Telling

madangsoi 2015. 4. 18. 22:45

SeungSoo's Movie Story-Telling

 

 

 

 

 

 

 

갑자기 마감 6시간 전에 타임캡슐 원고를 채워야 된다는 걸 알았다. 6시간 안에 20쪽을 채우는 건 쉽지는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학원시간까지 빼면 3시간 안에 20페이지를 다 채워야 한다. 그러나 글씨 잘 쓰고 글 잘 쓰는 사람으로서, 글을 빨리 써야 제 맛이라는 생각을 한다. 글을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야 더 잘 써진다.

 

30년 뒤의 내 나이는 46살이다. 결혼은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되도록 이면 안 하고 싶지만, 누가 나랑 하고 싶다면 할 생각이다. 어쨌든 30년 뒤의 나는 중년이다. 그렇게 젊은 나이도 아니다. 아마 지금 생각대로 46세의 일 년을 살고 있다면,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것 같다. 원래 꿈은 판사지만, 판사라는 법조인의 요구조건은 20년 이상 법조계에서 근무한 법조인이고, 46세라는 나이로는 20년이라는 세월을 다 채울 것 같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왜 하필 내 꿈이 변호사, 검사, 그리고 판사라는 세 가지의 법조인 직종 중에서 변호사인지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 말고 한 사람 더 알지도 모른다. 일단 분명한 이유는, 나는 냉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살면서,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성격은 변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검사라는 직업이 어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 사람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알고 그 사람을 심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아무 이유도 없이 살인을 저질렀을 리 없다. 복수를 한 셈이거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거나, 너무나도 그 사람이 미워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다. 3심 제도에서, 모든 사람에게 발언권의 기회를 제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내 삶의 가치관은 ‘Je veux rentrer chez moi.’이다. 실화로도 잘 알려진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이 연기하는 송정연은 재판의 막바지에 흑인 판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송정연은 1년 8개월 동안 교도소에 갇혀 지내면서, 얄카에게 직접 프랑스어를 배운다. 그래서 흑인 판사에게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지금 말할 수 있었다. ‘Je veux rentrer chez moi.’ 불어로 ‘저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라는 뜻이다. 전도연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부터 버림받으면서 1년 8개월간이라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억울하게 사법 피해를 받은 전도연은,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평범한 대한민국 주부였기 때문이다. 내 삶의 가치관의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성선설을 믿는다. 모든 인간은 본능을 따르지 않는 이성적인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고, 자라가는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나쁜 영향을 받게 된다는 내용의 성선설이다. 적어도 성선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한해서는, ‘Je veux rentrer chez moi’라는 말의 뜻처럼 다시 집에 돌아갈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법조인이 돼서 해야 할 일이다. 만약 전도연이 상류층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전도연의 아버지나 남편이 대기업의 사장이거나, 국가의 고위 관료였다면 24개월 동안 마르티니크라는 프랑스 최서단의 영토에서 억류될 상황에 처했을까? 법이라는 장치는 오래 전부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다. 그만큼 법의 혜택은 약자들에게 더 많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과연 그럴까? 절대로 아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로빈후드 법(Robinhood Law)이라는 당연한 논리까지 주장하며 상류층의 세금 탈세를 막으려고 할까? 현대인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모르고 살아가면, 약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삶을 마치게 되고, 후회가 너무나도 많은 삶을 살게 된다, 법조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았던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의 가치관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말만 쉽고 행동하기는 어려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조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를 책임질 생각이 없으면 애초에 법조인이라는 꿈을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2020년대와 30년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야할 점은, 바로 하나의 직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유망한 ceo나 작가, 요리사 등 정년 연령을 쉽게 정할 수 없는 직업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직업은 50, 60대에 ‘정년’이라는 위기를 맞게 된다. 평범한 회사원도, 웬만한 기술직종도(기술직종의 경우는 정년연령이 더 어리기 마련이다.) ‘평생 직업’으로는 살 수 없다.

법조인이라는 직업직종도 마찬가지다. 평생 동안 ‘법’이라는 걸로 먹고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법조인이 되면, 정년퇴임 이후에 법학 관련 대학교수로 재직하거나 다양한 전문서적을 써 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딱히 그럴 생각은 없다. 지금부터 꿈을 변호사라는 하나의 꿈으로 못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꿈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생각해냈다.

영화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해보고 싶은 꿈이었다. 구지 영화감독이 아니더라도, 영화 평론가나 영화 시나리오 작가도 괜찮다. 단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만큼 영화는 죽어라 많이 봤고, 웬만한 아카데미상 수상작도 다 봤고, 사람들이 ‘이건 명작이다’라고 할 만한 영화도 다 봤다. 진짜 죽어라 봤다. 심심하면 컴퓨터로 보든 새로 바꾼 TV로 보든 뭐든지 본다.

이쯤 얘기하면 사람들은 ‘어떤 영화가 가장 명작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명작은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너무나도 훌륭한 매체이다. 영화로는 동시대든, 과거 시대든, 미래 시대든 모든 시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갔던, 또는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들의 모든 것을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녹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딱히 정확한 시기나 장르를 지목하지 않는 한 명작을 하나의 구체적인 영화로 지목할 수는 없다. 다만 ‘잘 만들어진 영화’와 ‘잘못 만들어진 영화’가 있을 뿐이다. 딱히 하나 정도를 지목하자면 최근에 본 영화인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발키리’를 꼽고 싶다.

하나 이야기하자면, 나는 지나친 액션을 싫어한다. 액션이나 섹스신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진 영화는 그 안의 캐릭터들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만을 모으기 때문이다. 또 하나 정도를 지목하면, 바즈 루어만 감독의 뮤지컬 영화인 ‘물랑 루즈’를 꼽고 싶다.

‘발키리’는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말기, 게르만 민족을 구원해줄 존재라고 평가받던 히틀러의 잔혹함과 광기를 멈추기 위해 이른바 ‘히틀러 암살작전’인 ‘발키리 직전(Operation Valkyrie)를 구상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이야기를 다룬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90%의 독일 국민은 전적으로 히틀러를 신뢰했고 나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과 집시 학살, 소련과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잔혹함은 히틀러의 광기를 하나하나 드러내 주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발키리 작전‘은 15차례나 되었던 히틀러 집권 시기의 히틀러 암살 사건 중 최후의 시도였다. 아프리카 북부에서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제10 팬저 기갑사단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그 내각은 독일이 영원히’ 히틀러의 독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랬다. 적어도 게르만 민족의 나라 독일에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아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다른 국가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영화는 톰 크루즈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으로 캐스팅하면서, 암살사건의 전말과 그 과정, 그리고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처형 장면까지를 다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 구성은 단순하다. 복잡한 액자식 구성도 아니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내용을 담은 영화도 아니다. 단지 2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그려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최고의 명작으로 꼽은 건, 영화 주제 자체나 그 구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2차 세계대전의 독일은 영원한’ 나치 히틀러‘의 독일이었을까? 독일은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와 함께 영원한 ’전범 국가‘로 기억되어야 했을까? 나치 독일이라는 나라는 히틀러라는 너무나도 뛰어난 연설가에 의해서 이끌어졌고, 히틀러의 뜻대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래서 영화 주제를 너무나도 잘 구성했다는 생각을 했다. 구성은 단조롭지만,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존재만으로도 독일은 역사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었다. 모든 독일인이 나치 독일 안에서 살았던 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독일의 역사를 바꿔놓은 것처럼, 나도 세상을 바꾸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하나의 영화인 ‘물랑 루즈’는 다행히도 ‘발키리’처럼 무거운 주제를 다룬 영화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무거웠다고 생각했다. 사실 ‘물랑 루즈(Moulin Rouge)’는 1900년대 프랑스 파리에 있던 대형 클럽의 명칭이었다. 영국의 유력층의 자제인 크리스티앙은 보헤미아 운동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파리로 향하지만, 정작 그가 파리에서 처음 접한 건 물랑 루즈에서의 공연을 위한 뮤지컬단과의 만남이었다. 우연하게 크리스티앙은 뮤지컬단의 극본을 책임지게 되고, 그렇게 가게 된 물랑 루즈에서 새틴을 처음 만나게 된다.

새틴은 창녀였다. 크리스티앙은 새틴을 사랑하지만, 주위에서는 그를 말린다. 창녀는 결국에는 돈만을 원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다는 말로 크리스티앙을 설득한다. 처음에도 새틴은 창녀로서 자기 자신 스스로 처지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새틴의 눈앞에는 당장 얻을 수 있는 돈,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새틴은 크리스티앙이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고, 자기 자신 또한 크리스티앙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사랑할 수 없었다. 물랑 루즈를 뮤지컬 무대로 개조하게 위해 필요한 자금은 모두 공작이 대고 있었고, 공작은 그 대가로 새틴을 요구했다. 새틴은 공작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사랑할 수 없었고, 사랑하기도 싫어했다. 크리스티앙은 그런 새틴을 보면서 그냥 파리를 떠나버리자고 하지만, 뒤늦게 뮤지컬 단장이 새틴에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린다. 새틴이 파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말이다. 결국은 뮤지컬 생활을 계속하게 되고, 둘 사이의 사랑은 새틴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마하라자 뮤지컬 무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물랑 루즈라는 뮤지컬 영화는, 학교 음악시간에 뮤지컬 대본을 준비하면서 보게 된 영화였다. 단순히 뮤지컬 준비 때문에 뮤지컬만 보는 게 아니라,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작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직업을 가지던지, 물랑 루즈가 사랑의 진짜 의미를 파헤친 것처럼 어떤 무언가의 진짜 의미를 꼭 파헤치는 일을 하고 싶다. 이 말에는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도 있다. 영화는 무언가에 대한 진짜 의미를 던져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일을 재조명하든지, 어떤 일을 창조해내든지 간에, 나는 영화를 보고 감동받는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건 영화일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일을 영화와 관련지어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영화가 많은 일이나 사건들을 재조명하는 데에 그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또한 영화를 많이 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법 분야까지도 영화와 관련해서 해석한 경험도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을 접한 적이 있다. 영화는 몇 년 전 프랑스 현지에서 마약 운반 혐의를 받고 불구속 기소된 장미정 씨의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장미정 씨의 이야기는 영화 내용과 흡사하다. 보증을 섰다가 빚을 지게 된 남편. 원석을 운반하는 것이라고 사기를 당한 다음, 마약 운반 혐의로 체포된 장미정 씨.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되는 의무감은 사라진 채 장미정 씨에 대한 서류 한 장조차 쓰지 않는 주 프랑스 한국 대사관. 대사관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가 자신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채 살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장미정 씨는 2006년 결국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추적 60분에 출연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게 되면서 가장 중요하게 느낀 건 ‘국민들이 자기 할 일에 조금만 더 충실했더라면..’이었다. 남편이 보증을 서지 않았더라면, 남편의 지인이 사기극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장미정 씨의 어이없는 불구속 기소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장미정 씨가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고 쳐도, 우리나라의 대사관에서 자국민을 최대한 빨리 조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노력을 했더라면, 4개월을 주기로 재판의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장미정씨는 1년 8개월이나 빨리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주 프랑스 한국 대사 직원들은 ‘프랑스 국민성이 원래 느리다’라는 이유로 영화 속 송정연 씨의 편지와 요청을 무시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정작 자신들은 미래에 대한 권력욕과 출세욕에 눈이 먼 채로, 대사관으로 찾아오는 손님 접대를 위한 음식점의 미슐랭 스타 개수를 따지고 있는 멍청한 짓을 한다. 아마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나라와 정부를 향한 분노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행동은 국민의 세금으로 행동하고 일하는 공무원으로서 나라의 자존심을 깎는 일이다. 오히려 나는 국가 망신을 주는 존재는 바로 마약 운반 혐의로 검거당한 송정연 씨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장미정 씨가 검거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 즉 마약사건 담당형사와 외교부 관련 직원들, 그리고 대사관의 사람들은 ‘마약 운반’이라는 죄목 자체만으로 우리나라의 망신이라고 큰소리를 뻥뻥 친다. 과연 그들이 대한민국의 망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정부와 관료 시스템이 지금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 프랑스의 수준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국민성이 느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의 책임성이 결여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전도연이 연기한 송정연씨가 프랑스 현지에서 억울한 마약 운송 혐의를 받고 피해를 당한 내용을 나열해보면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주 프랑스 대사관에서 국민 보호 차원에 대한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오히려 방치를 당했으므로 헌법에 나와 있는 권리를 제대로 추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인권을 침해당한 것이다.

구속의 내용과 재판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통역 시스템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대사관에서는 마르티니크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이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유학을 온 학생도 포함되었다. 대사관이 대사관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통역을 도와줄 사람이 오지 않음에 따라 대사관은 대한민국에 나라 망신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극중에서도, 실제로도 프랑스 판사와 법조인들은 장미정 씨의 사례에 대해서 ‘나라가 당신을 버렸다. 당신 국가의 대사관이 나쁘다.(Your embassy is bad.)’라고 표현했다. 오죽하면 이랬을까.

가장 중요한 피해사례다. 대사관은 가장 중요한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실제로 장미정 씨를 포함한 두 여자를 속여 마약을 운반하게 한 고수의 지인 문도에 대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에 관련되어 프랑스에서 장미정씨를 대한민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재판 관련 서료는 실제로 대사관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대사관에서 실수로 그 서류를 처분해 버렸다. 물론 극중에서는 대사관의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서류를 무시하고 물론 실수상의 문제발생이었지만 대사관이 얼마나 그들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상황은 실제와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공문서를 대사관에서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서류가 없는 덕분에 장미정씨는 1년 8개월을 마르티니크의 악명 높은 교도소와 대한민국과 완전한 반대편에 있는 마르티니크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남편과 딸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극중에서 송정연 씨는 자살 시도까지 감행한다. 국가에서 국민을 버린, 명백한 사실이다.

 

이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평범한 주부에 대한 너모나도 가혹했던 수감의 현실이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는 의문도 제기된다. 송정연 씨는 마약 운반이라는 행위를 할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둔 평범한 주부였을 뿐이고, 그런 대한민국 국민이 1년 8개월 동안 먼 대서양의 섬인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서 1년 8개월 동안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이 중에는 교도소에서의 열악했던 현실을 예로 들 수 있다. 극중에서 송정연 씨는 남편인 고수가 보내준 속옷을 선정성 논란이 있다는 이유로 다 뺐겼다. 기본적인 위생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않는 엄격한 사법체계가 우리나라 정부의 무책임성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인지, 실제로 마르티니크 교도소의 실태를 비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정연 씨가 인권을 침해당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교도소로 맨 처음 들어갔을 때 극중의 장미정 씨인 송정연 씨는 전신 탈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 행위이다. 마르티니크 교도소의 현실이 얼마나 열약한지를 보여줄 수 있다. 아직 혐의가 확정된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채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가혹 행위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위법 행위이다. 송정연 씨 옆에 있던 프랑스 여성은 임신을 한 상태였지만 전신 탈의를 한 상태로 교관에게 가혹 행위를 당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약간 비중있게 다뤄진 부분은 아니었지만, 극중의 송정연 씨는 프랑스 파리의 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관으로부터 언어를 알아듣지 않는다는 모욕을 듣는다. 교도관의 태도도 잘못되었고, 송정연 씨를 최대한 변호하기 위한 대사관의 노력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오히려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문서 내용에 대한 설명도 없이 서명을 요구하는 추 과장이라는 사람의 행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호송차 안에서 송정연 씨가 교도관에게 강간을 당한 사실이었다. 지나가던 행인 두 명이 이 장면을 목격하지만 공무집행 방해를 이유로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한다. 송정연 씨는 최대한의 발악을 하고 도망까지 가지만, ‘강간을 당한’이유로 유일한 친구였던 발카와도 헤어진 채 독방에 수감당하게 된다. 약간 의미없는 말이긴 하지만, 마르티니크 섬이 위치한 카리브 해는 송정연 씨(전도연)가 남편인 고수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함께 올려고 계획을 세웠던 곳이었다. 결국 남편인 고수는 송정연을 찾아오고, 둘은 만나게 되지만, 1년 8개월이라는 너무나도 힘든 시간은 더 이상 보상받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이유는 그 시간은 위자료로 해결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딸과 헤어져야 되기 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정연 씨는 재판 중 이러한 말을 한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죄를 지었다고. 1년 8개월 동안 집에 없으면서 딸을 만나지 못한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녀는 24개월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지만, 재판에서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으면서 1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수도 있다는 판결 내용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그 시간이 위자료라는 돈만으로 해결되었을까?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한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딸이라는 존재였다. 송정연 사건, 실제로는 장미정 사건이라고 명명되어진 이 사건은 설명하기는 쉬운 사건이지만 실제 사건의 주인공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사건이다.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극중 장미정 씨를 연기하는 송정연(전도연 분)은 재판의 마지막 과정에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발카와 남편이 한국에서 보내준 프랑스어 사전으로부터 배운 프랑스어로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Je veux rentrer chez moi.(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집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흔한 말이다. 그러나 송정연 씨의 상황에서도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을까? 우리에게 집으로 가는 길은 학교에서부터 몇 걸음, 학원에서부터 몇 걸음, 길어봤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몇 분이나 몇 십 분에 불과하지만 장미정 씨가 갇혀있던 곳은 대한민국으로부터 22,000km가 떨어져 있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이었다.

이 사건은 법원의 판례라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내가 국제판사가 아니더라도(국제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행 판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사건을 맡게 된다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꼭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극중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법원에서 재판에 대한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고수에게 친절하게 아내가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 판사의 올바른 모습과, 프랑스 법원에서 송정연 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흑인 판사의 모습을 본받고 싶다. 영화에서 결여된 ‘남과의 소통, communication(커뮤니케이션)’을 이 두 사람이 가장 잘 보여줬다는 생각을 했다. 내 가치관인 ‘Je veux rentrer chez moi’도 그만큼 내가 이러한 영화에서 소개된 판례 사례를 조사하면서, 꿈에 대한 확신을 더 키워나갔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공부에 대해서 너무나도 편협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영어, 수학시험이나 암기과목 같은 ‘작심삼일’공부는 진짜 사람을 만들 수 없다. 내 가 영화 같은 다양한 매체를 접하는 또 다른 이유도 바로 이러한 말에서다. 외우고 시험 보는 것만이 공부라면, 난 그런 공부만은 절대로 안 하고 싶다. 그 예로 국어라는 과목을 내가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말해보고 싶다.

국어 공부라는 것은 한국어라는 대한민국의 언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과 원만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말과 글을 이용하여 인문적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공부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국어교과서에 국한된 국어공부가 아닌, 다양한 인문독서의 체험 및 독후감 작성, 그리고 더불어 영화와 노래 감상을 통한 폭넓은 공부를 해 왔다. 수업시간 때 교과서의 다양한 경수필과 중수필, 현대 시, 설명문, 그리고 주장하는 글을 통한 국어 공부도 꾸준했지만 특히 일주일에 적어도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고자 했다. 토요일 밤 시간, 주일 오후 시간뿐만 아니라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생겨나는 시간을 짬짬이 독서에 매진했다. 물론 가장 폭넓게 읽은 책의 장르는 당연 인문학이다. 특히 현대문학에 매진했는데, 좋아하는 작가 몇몇을 선택해서 한 작가의 인문적 저술 활동을 자세하게 읽었다. 그 중 몇 명을 꼽자면 록 음악 작사가로도 잘 알려진 브라질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영원한 젊음의 감성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프랑스의 소설가 기욤 뮈소, 현대 추리소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뽑을 수 있다.

또한 국어라는 과목에 있어서 논리적 감수성 또한 키우기 위해 매일 1시간씩을 투자해서 신문을 읽었다. 신문의 중요성은 옛날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들어 왔고 그래서 다양한 NIE활동을 해 왔지만, 최근 나에게 가장 큰 모티브가 된 신문활동의 중요성은 진로체험활동 때 직접 멘토의 자격으로 학교로 찾아오신 신종범 변호사님의 한 마디였다. 변호사님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인 습관 하나는 바로 매일 하루 적어도 30분을 투자해서 신문을 정독하는 것이었다고 직접 말씀하셨다. 신문을 통해서 시사적인 안목뿐만 아니라 어려운 한자 어휘(그 당시 신문에는 한자 어휘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논리성과 독해능력까지 키우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매일 신문을 더욱 열심히 정독했고, 신문 안에 포함된 경제부문 중심신문이나 다양한 칼럼집, 남성 패션잡지와 가장 좋아는 영화잡지인 M Megazine까지 구독해서 읽었다. 특히 M Megazine은 영화채널 OCN의 이동진 평론가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잡지이기도 해서 많은 영화에 관련된 정보, 직접적인 영화용어와 스크린샷의 종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많은 시사적 안목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예를 들자면 국어와 연계된 방과후학교인 스토리텔링 수업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던 중 ‘명량’이라는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명량’은 올해 1000만여 명의 관객 누적 숫자를 달성한 영화라는 화려한 칭호를 받기도 했던 영화인데, 방과후학교에서 명량을 실제로 감상하게 되었다. 감상 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그 주위 사람들의 입장의 차이, 그리고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해 영화 속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봤고, 더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해 M Megazine의 명량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 물론 액션 영화라는 오락적인 영화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를 느끼긴 했지만, 한 번은 이순신 장군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구루지마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정 씨 여인의 관점에서 보는 식으로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하며 김한민 감독의 ‘임진왜란 3부작’을 기대하게 되었다. 또한 신문에서 ‘1,000만 관객, 명량’이라는 칼럼기사를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현대정치를 명량을 통해 비판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국어공부라는 것은 언어라는 수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글만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글, 영화, 신문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부할 수 있는 과목이 국어다. 나는 이런 게 공부라고 생각한다. 빨리 공부해서 빠른 결과를 만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 조금씩 공부해서 조금씩 결과를 천천히 만나는 시험을 평생 동안 응시하고 싶다.

내 삶의 전환점은 없다. 전환점은 매일 매 시간에 있고, 항상 생겨나기 때문이다. 삶에 한 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될 거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게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전환점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