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관중학교임재혁일기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와 신구의 '니들이 게맛을 알아'에서 배우는 긍정적 독서일기 쓰는 습관 이해와 실천

madangsoi 2021. 1. 18. 22:05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와 신구의 '니들이 게맛을 알아'에서 배우는 긍정적 독서일기 쓰는 습관 이해와 실천

이날치 밴드는 2020년 7월 30일 공개된 한국관광공사의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에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 참여했단다. 배경음악은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날치 1집의 ‘범 내려온다’, ‘어류도감’, ‘좌우나졸’이 사용되었단다.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 등에 공개된 지 두 달여 만에 세 유튜브 영상의 총 조회수가 1억 뷰를 넘어섰다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거기에 더하여 '범 내려온다'가 판소리 '수궁가'에 나오는 부분임을 KBS1TV '1박 2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설마 내가 '별주부전', 아니 국립극장에서 5시간 이상 들었던 '수궁가' 완창을 들으면서도 몰랐던가? 턱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던 별주부가 턱관절이 덜 풀려 '토선생'을 '호선생'으로 잘못 발음하여 생긴 에피소드라는데.
tvN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설민석 강독,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보고 참 신선함과 감동을 받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 - 시루 임흥수

국어 시간에 심화학습 문제를 풀고 있었다. 학생들의 관심과 그들의 취미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A4용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 물론 예문이 있었으므로 분량은 그 정도로 하도록 정해주었다. 그때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이나 중학교 선생님, 그리고 담당과목 교사인 나를 적고는 다소 아부 섞인 반응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관심이 가는 두 학생의 답이 공교롭게 같았다.

   “없음. 선생님들은 다 거기가 거기다."

다소 충격적인 학생 둘의 답이 가슴 아팠다.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박지원의 [양반전]의 심화과정으로 [허생전]을 맛보기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선재'라 불릴 수 있는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꽤 많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선재(善哉-좋구나!)'라는 말을 되새김질하며 하루하루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즐기고 있는 요즘.

C중학교에서 ‘강전(강제전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떠나는 일부 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이즘, 다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관심이 가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20년이란 긴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숙제를 끝내겠다는 생각이 나를 ‘홀든'에게 다가가게 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자인 내 동기 김혜정과 동명이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읽게 되었던 [가출일기]라는 성장소설이 ‘가출(家出)'을 너무 미화했다고 비판했던 나는, 연구발표의 주제 역시 ‘청소년 가출의 실태와 그 대안으로서의 문학’으로 거창했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에서 보이는 ‘기표'의 숨 막히는 모범생에의 함몰 과정과 일탈이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처럼 어른들에 의해, 교사에 의해 모범생으로 만들어지는 그들의 숨 막히는 모습은 교육의 악화(惡貨)다. 하지만 학교는 양화(良貨)라는 긍정적인 모습보다 악화라는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 현실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나'처럼 종국 그들은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을 치달을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학교의 역기능을 돌아보는 성장소설의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기능을 양보할 필요는 없겠다.

“열일곱 살, 나도 이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나에게는 책임질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 (안도현, [짜장면] 부분.)

가출 후 중국집 배달원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수학여행의 사진이 없음은 가슴 아픔이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고서 속도를 낼 때만은 그것은 등 푸른 자유였을 것이다. 가출은 일탈이다. 하지만 그 일탈이 자유의 상징처럼 보여지는 것은 모범생이란 사회의 잘못된 사회화 탓이다. 하지만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탈은 삶을 꼬이게 하는 문제적 행동이다.

안도현의 [갈매기 학교]에서도 어린 갈매기들은 태양이 뜨는 곳에 대한 접근 자체를 용서받지 못한다. 어린 갈매기들은 어른들이 정해놓은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학교와 집, 이외의 곳은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어둠으로 치부된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양성(養成)되는 것이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반항에 해당하며, 학교로부터의 퇴교를 명받을 수 있는 불손한 행동이다. [위대한 똥파리]의 젊은 똥파리처럼 행동하는 것은 결국 유리창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바보같은 행동인 것이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젊은 똥파리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뿐이다. 하지만 젊은 똥파리의 숭고한 희생은 보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또 다른 젊은 똥파리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면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헛수고일 수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의 ‘왜냐 선생님’이나 [난․쏘․공]의 ‘수학 선생님’은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개구멍'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눈물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홀든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의 호수 이야기를 한다. ‘오리들이 아직도 살고 있을까?’ 하는 생뚱맞은 질문은 결국 일탈을 의미한다. 세 번이나 학교에서 잡초처럼 퇴출당한 홀든. 네 번째 학교에서마저 다섯 과목 중 영어작문만을 제외한 네 과목에서 낙제를 당한다. 수요일까지 남은 6일을 시간 죽이기로 버텨야하는 홀든에게 기숙사의 친구들은 모두 속물일 뿐이다. 기차에서 만난 두 수녀와 어네스트의 엄마에게서 인생을 살면서 필요한 융통성과 사회성을 배우는 홀든은 아름답다. 이성적인 셀리에게 사랑은 결국 정상적인 가정을 위해 학교를 다녀야하며, 학교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모범적인 설교를 들어야함을 알게 된다.

사랑에 배신당한 홀든에게 교장 선생님의 이중적인 모습(학부모에 대한 경제적 부(富)의 차이에 따른 차별적 대하기, 이중적인 토요일만의 만찬(晩餐)), 역사 선생님(스펜서)의 집착, 앤톨리니 영어 선생님의 변태적 모습 등등…… 기숙사의 속물들의 모습으로 인해 결국 가방을 싸서 뉴욕으로 향한다. 하지만 190센티미터의 ‘미성년자'라는 주변적 모습은 ‘홀든'을 더욱 사회혐오자로 만들어간다.

스트라드레이터와의 ‘제인을 둘러싼 싸움’은 홀든의 성(性)에 대한 순결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뉴욕의 호텔에서 만난 창녀와 거리를 둔 채 말만 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정부에게 5달러를 강탈당하면서 더욱 성에 대한 혐오를 가져오는 홀든의 모습은 청교도적인 순결을 지켜내려는 서술자의 안타까운 모습의 다름 아니다. 일탈로서의 파멸이 아닌 일탈이 가져오는 순기능을 보여주려는 이 수작은 변태 성욕자나 학생들의 은어, 속어 등을 지나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때문에 문단의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보수적인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동생 ‘피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동생을 위해서 ‘자신을 죽여 버릴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타협하는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여동생 피비가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오랜 횡설수설 끝의 진지한 답변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사람이 되겠다."

이렇게 다짐하는 홀든의 말은 무척 감동적이다. 나보다 다른 이들은 생각하는 소년. 어른으로서 어린이들을 돌보겠다는 홀든의 모습은 샐린저의 인생관과도 닮았을 것이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호수에 있는 오리들의 모습만을 동경하던 홀든에게 택시기사가 보여준 관심은 이 소설의 다른 즐거움이다. 얼음이 얼고 오리(철새)들이 이동을 하면 모두가 호수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얼음 아래 물고기들이 얼음 속에서 봄을 기다리면서 먹고 마신다는 사실. 아주 느리게 먹고 배설하는 물고기들의 모습은 여자친구 셀리가 말했던 학교의 순기능을 믿고 묵묵히 사회화를 순종하는 대대수의 학생들의 상징이라고 믿고 싶다. 어른이기보다 먼저 교사로서 나는 성장소설의 이런 순기능을 사랑한다.

나는 문제아라고 오해받고 있는 우리 C중학교 일부 소수 학생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결국 그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홀든에게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말 한 마디가 그의 퇴원과 동격이라는 데서 이 소설의 재미는 배가된다.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에 순종하는 일만이 우리의 선택일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이미 읽었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같은  듯 다르게 강독하는 설민석 강사의 말솜씨가 경탄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내가 읽어보지 못했거나 영상이나 참고서의 서머리를 통해 읽어다고 생각한 작품들은 이해는 갔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해서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영화로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구입해 읽었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단신으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벌써 84일째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세월을 허비하는 중이었다. 처음 40일째는 한 소년이 같이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는 노인이 최악의 불운을 만난다고 하여 소년을 다른 배에 타게 했다. 그러나 소년은 노인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매일 노인을 돌보러 찾아왔다.
노인은 아내도 없었고, 잠들어 꾸는 꿈은 아프리카나 라이온이었다. 85일째 되는 날, 노인은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로 나갔다. 그는 "오늘은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낮이 기울 무렵 큰 것이 물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녹새치였다. 참으로 오랫동안 녹새치와 노인의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해가 졌다. 녹새치는 조각배를 끌고 끊임없이 바다로 나갔다. 쉴 수가 없었다. "그 애가 있었다면"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녹새치가 날뛰는 바람에 노인은 그만 넘어지고 만다.
해가 떴다. 다시금 넘어져 손을 다쳤다. 녹새치가 펄쩍 수면으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배보다 큰 것이었다. 하룻밤 더 버티어 볼 셈인가? 태양이 뜨겁다. 누워서 라이온의 꿈을 꾸고 싶다. 해질 무렵, 젊었을 때 아프리카에서 흑인과 팔씨름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거의 하루 동안 서로 버티다가 아침 무렵에 쓰러뜨렸었지. 밤이 왔다. 노인은 조금 잤다. 꿈속에서 라이온을 보았다.
달이 떴다. 갑자기 녹새치가 몇 번이고 뛰어오르는 바람에 노인은 눈을 떴다.
사흘째가 되었다. 녹새치는 수면에 나와 있었다. 노인은 작살로 찌르려고 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작살은 녹새치의 심장을 찔렀고, 드디어 노인은 녹새치를 배에 붙잡아 맸다. 1,500파운드는 넘을 듯했다.
배는 항구를 향해 나아갔다. 상어가 나타났다. 노인은 밤중까지 상어 떼와 싸웠다. "죽기까지 싸우라." 몸이 뻣뻣해져 왔다. 나이프도 몽둥이도 모두 부러졌다. 녹새치는 뼈만 남았다. 배는 항구로 돌아왔다. 노인은 오막살이 침대에서 늘어지게 잤다. 아침에 소년이 와서 위로했다. 노인은 다시 잠들어 라이온의 꿈을 꾸었다.
- NAVER 지식백과(세계문학사 작은 사전)

1952년 9월 8일에 발표한 E. 헤밍웨이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12년 동안 쓴 시(詩)를 산문으로 옮긴 것이다. (중략)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에 등장하는 노인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위대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작품에서 인간은 상어로 상징되는 죽음에 의하여 소멸되지만, 용기와 자기극복(自己克服)으로 과감하게 죽음과 대결하는 데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는 헤밍웨이 나름의 실존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그의 간결하고 힘찬 문체는 이 작품에서 극치를 이루고 있다. 1958년 영화화되었다.
- NAVER 지식백과(두산백과)

나는 아마도 1958년 제작된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2002년 롯데리아 크랩버거로 재생산 되기도 하였다. '니들이 게맛을 알아?' 탤런트 신구 선생님의 찰진 대사는 히트를 쳤으나 크랩버거는 새우버거와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해 광고로서의 대박은 일으키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17년 후 2019년 오징어버거로 다시 신구 선생님의 광고로 되살아 났다. '니들이 오징어맛을 알아?'
꿈이나 현실에서 기시현상이란 게 있다. 처음 보는 곳인데 이미 본 것 같은 착시현상, 기시현상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화, 영화, 드라마, 또는 어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읽어보지도 않은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기독현상이다.
요즘에는 오디오북이 유행하고 있지만 내겐 먼 나라 이야기다. 부디 우리 학생들이 기독현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책으로 먼저 만난 후에 영상 강독으로 자신과 전문가의 시각 차이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요즘은 멘토링의 시대다. 학습방법 중 최선은 내가 아는 것을 멘티에게 가르쳐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부디 독서일기 쓰기를 습관화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시나리오로 멘토의 입장에서 또다른 멘토와 대화하기를 바란다. 이게 독서 습관의 힘이다.

"설민석 선생님의 강독 영상은 그때(독서일기 쓰기와 멘토와의 대화 후) 봐도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