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과 반어적 표현의 대명사 황동규,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그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반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참신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겠지만 언젠가 그대가, 또는 내가 짝사랑이 아닌 사랑임을 알았을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서로를 부르겠다니.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았던 이들에게는 진정한 반어적 표현이 아닐 수 없겠다.
황동규의 첫시집 《어떤 개인 날》(1961)에 수록되어 있다. 황동규의 초기 작품인 이 시는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 때 연상의 여성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연애시로서 지금도 널리 애송된다.
전2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사랑과 기다림을 주된 제재로 삼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늘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다림을 통해 극복해나가겠다는 사랑의 굳은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인한 젊은 날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때묻지 않은 시각과 감성이 풍부한 서정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낭만적·우수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작가 개인의 서정적 관심을 바탕으로 객관성보다는 주관적인 의표를 표출하는 데 중점을 둔 이미지즘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반어적 표현법을 사용해 그대를 생각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과 시적 표현에서 유사성을 지닌 작품으로 김소월(金素月)의 시 《먼 후일》이 있다.
제2연에서 시인은 본질적인 사랑의 영속성을 믿기보다는 사랑이란 내리는 눈과 같아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그치는 때가 있는 것이므로,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실존주의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섬세한 파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시인은 그러한 조건을 모두 인정하면서 기다림이라는 변함없는 정서를 바탕으로 그대를 사랑한다고 노래한다.
이 시는 황동규의 첫시집 《어떤 개인 날》에 실린 대부분의 연가와 마찬가지로 서구적 인식의 로맨티시즘에 바탕을 둔 투명한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작가의 초기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연애시이다. 특히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등의 연시에서 보여지는 임을 향한 일편단심의 전통적 정서를 뛰어넘어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 기다림의 자세를 노래함으로써 전형화되어온 전통적 연애시의 계보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사랑을 주제로 한 한국 영화 《편지》(1997)와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은 이 시에서 주된 모티프를 얻어 제작되었다.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