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2. 책 정리 해, 아빠!

madangsoi 2014. 2. 4. 23:42

“책 정리 해, 아빠!”
토요일 아침 7시, 조용히 책을 읽던 나는, 책꽂이에서 굴러 떨어진 책 몇 권을 집어서 책꽂이에 꽂으며 장난에 열중인 재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세 살 박이 녀석이 신기하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순간, 말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안동 하회탈처럼 웃는다. 그리고는 내 교통카드 수첩을 내놓으라더니 한참을 가지고 논다. 수첩은 세 살 박이에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재원이 돌보기보다 내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무얼 읽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읽고 있는 녀석이나, 놀아달라는 속뜻도 모른 채 자기 독서에 열중인 제 아비나 가관이라는 듯이 아내가 도끼눈을 뜨고 지나쳐 간다. 뒤통수가 시베리아 벌판처럼 시리다.
 
아빠는 무슨 책인가를 읽고 있다.
나는 책꽂이를 정리하고 있다. 아빠는 내가 놀자는데 눈치를 못 채고 있다. 나는 아빠와 놀고 싶은데 아빠는 책만 읽고 있다. 아유, 엄마는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도연이 학교 보내려고 할머니네 아침밥 하러 간다. 다시 집으로 오더니 엄마는 오늘은 도연이 학교 안가도 되는 날이라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잠을 잔다. 아빠가 읽는 책은 무지 두껍다. 내 동화책보다 글씨도 작다. 아빠에게 남색 수첩을 강제로 빼앗았다. 거기에는 아빠 교통카드가 있다. 아빠는 내가 그 교통카드가 무엇에 쓰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그 카드로 기차표를 기계에서 자동으로 사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 수첩이 없으면 아빠가 곤란할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걸 어디다 숨기나? 하다가 나는 남색 수첩을 책꽂이 2층 왼쪽 구석에 잘 보이게 꽂는다. 히히, 아빠가 고생을 좀 할 거다.
 
토요일 아침 9시, 기차를 타고 시골집에 가려고 급히 집을 나왔는데 예의 교통카드 수첩이 없다. 그래서 이미 예약해 놓은 좌석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하다가 집으로 되돌아갔다. 미리 병원에 간 아내는 언제나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 통화를 포기하고 신림교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가는 발걸음마다 불안이 묻어서 무겁기만 하다.
‘집에 들렀는데 없으면 시간 낭비만 하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들어선다. 시간이 자꾸만 흐르고 조마조마한 시간은 빠르다. 벌써 10분이 순식간에 흘러가고 있다. 미리 집을 나가서 시간을 아끼려고 이균 내과에 가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다. 조금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다. 괜한 일로 얼굴 붉히며 시골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장난감 정리된 곳, 텔레비전 뒤, 장롱과 벽 사이, 장롱 밑, 침대 밑……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아내는 투정을 부릴 테고 도연은 짜증을 부릴 것이다. 오만 가지 생각으로 이제 영등포역으로 가야하는 시간이다.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정말 걱정이 된다. 조치원까지의 1시간 40분이 내게는 쉬운 발걸음이지만 입석으로 내내 서서 가야하는 도연과 재원이 못내 걱정이 된다.
순간, 포기하려는 내 귀에 들리는 환청!
‘책 정리 해, 아빠!’
책꽂이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재원이 키 높이로 무릎을 꿇는다. 재원이 시선과 손길이 갈 수 있는 높이를 집중하여 찾는다. 중심보다 가장자리에 시선과 손길을 집중한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의 왼쪽 구석에 남색 교통카드 수첩이 책들과 함께 서 있다. 감쪽같다. 아이들의 시선은 참 희한하다. 어른들이 모르는 곳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는 곳에 물건을 둔다. 그것을 어른들은 감춘다고 하는 것이다. 도연과 재원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된다. 참, 이럴 시간이 없다. 어서 서둘러야 한다.
부랴부랴 이균 내과를 향해 달려간다. 헐레벌떡 도착했더니 아내가 없다. 허스키 보이스 간호사 왈, 왔다가 갔단다. 아래층 문화 약국에서 왜 이렇게 늦었냐는 표정이 역력하다. 범인 임재원은 언제나처럼 장난 끼 어린 눈으로 아빠를 환하게 맞이하고 도연은 시골에 가는 게 귀찮은지 울상이다.
 
와! 아빠는 역시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남색 수첩을 찾았지? 엄마는 아빠가 땀깨나 흘린 줄을 모를 거다. 아무튼 늦지 않게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갈 수 있다. 편하게 기차를 타고 도연이랑 함께 앉아서 시골로 간다. 조금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도연이가 참 좋다. 조금 말랐지만 누나답게 공부도 잘하고 엄마랑 아빠랑 싸울 때면 중간에서 화해도 잘 시키고, 참 잘하는 누나다. 가끔 나를 괴롭히지만 그건 내가 누나 사랑을 많이 빼앗아가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야지 어쩌겠나? 먹을 것도 좀 빼앗아 먹기는 하지만 날씬하고 긴 다리를 보면 많이 안심된다. 나도 누나처럼 긴 다리에 날씬한 몸매를 가질 테니까!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강아지랑 토끼를 보면 재미있게 놀아야지. 아무튼 오늘 아빠는 나랑 안 놀아준 벌로 땀깨나 흘렸을 거다. 아빠, 미안해. 아니,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꼭 자주 놀아 주세요.
 
자초지종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신림역을 향해 재원을 안은 채 고속 항진, 신림역 출발 신도림역 하차, 영등포역 방향으로 급한 발걸음! 영등포역까지 다행이도 예상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커피전문 카페 Angel-in-us에서 ‘책 정리 해, 아빠!’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흐뭇하게 웃는다.
“그러게 재원이랑 좀 놀아주고 그래야지. 집에 오면 자기 일만 하냐?”
“왜, 많이 도와주잖아?”
“많이? 도와 준데요?”
“나처럼 집안 일 잘 도와주는 사람이 어딨어?”
“도와주는 게 아니지. 서로 돕는 거지. 도와주는 게 무슨 자선이야? 당신은 그게 문제야. 아니, 대한민국 남자들의 문제야. 가사는 서로 나누는 거라고. 도와주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요. 그런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 바로 가정의 평화가 오는 거라고. 그래야 저출산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엄마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기도 많이 출산할 테고. 또 그러지? 어머니, 할머니 시대에는 더한 어려움이 있어도 아이를 순풍, 순풍 잘만 낳았다고? 그게 아니라고, 이제는 예전과 다르다고요, 당신부터 좀 바뀌어 봐!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라고, 알았지?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매일 일찍 들어와서 재원은 당신이 책임지고 키워! 아들은 아빠가 키워야지!”
유구무언(有口無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웃고 말았다. Angel-in-us에서 나는 천사를 가장해서 환하게 웃었다. 검은 빛깔 커피에 하얀 크림처럼 나는 점점 색을 잃고 회색분자가 되어간다. 그런데 커피는 왜 회색이 아니라 갈색이 되는 것일까? 아마도 아내는 설거지나 청소보다는 좀 더 가정적인 아빠가 되길 바라나 보다. 애들의 아빠! 딸의 아빠, 아들의 아빠. 아빠의 정체성을 위하여 나만의 독서 시간을 줄일 지어다. 아니, 나만의 독서가 아니라 가정의 독서를 해 볼 일이다. 집안 사면을 온통 책꽂이로 배치하고 책으로 벽을 삼고, 책으로 베개 삼아 서침(書枕)을 완성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하는 시간을 줄이고 책속에 파묻혀 선인들과 대화하고, 동시대인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시간은 꿈이 아니다. 이룰 수 있는 이상(理想)인 것이다.
 
“책 정리 해, 아빠!”
시골에 다녀온 일주일 후 토요일 아침 7시, 조용히 책을 읽던 나는, 책꽂이에서 굴러 떨어진 책 몇 권을 집어서 책꽂이에 꽂으며 장난에 열중인 재원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세 살 박이 아들 녀석이 신기하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순간, 말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안동 하회탈처럼 웃으며 내 남색 수첩을 조용히 반바지 뒷주머니에 녀석 모르게 숨긴다. 그러면서 재원과 함께 푸르게 웃으면서 책꽂이를 정리한다. 그리고 토마스를 위해 철길을 놓아주고, 경찰 놀이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자전거를 타게 하고, 재미있게 네 식구가 이불을 발로 빤다. 재원이 어젯밤에 그려놓은 세계지도를 지우기 위해. 혼자 하는 빨래보다 가족이 함께 하는 빨래가 더 재미있는 것은 같이 하기 때문인가 보다. ‘같이’의 가치를 느껴보는 오후다. 도연, 재원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아내는 푸르게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비누거품처럼 버블버블 옥상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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