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27. [광야]를 배우는 시간

madangsoi 2014. 7. 13. 01:22

이육사, [광야(曠野)]에 대한 단상!

국어 시간이었다. 아직은 나, 사다예의 담임선생님이 되기 전이었다. 단원과 상관이 없다는 듯 선생님은 겨울의 첫 자락에 눈이 내리던 그날에 뜬금없이 국어 상권을 펼치게 하시고는 6-(5)단원 이육사의 [광야]를 펴게 하셨다. 그리고는 분단별로 프린트 한, 양면의 A4 용지를 배부했다. 조금 놀란 눈으로 수업 준비를 하는 우리는 웅성거렸다. 갑작스럽게 평소와 달리 프린트를 준비한데다가 빔 프로젝트와 노트북까지 준비했다면, 이건 영락없는 연구 수업 시간 분위기였다. 하지만 교실 뒤편에는 어떤 선생님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프로젝트를 레이저빔으로 가리키면서 이육사의 광야를 낭독하고는 우리에게도 낭독을 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리듬에 맞추어 낭독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낭독은 돌림노래처럼 우왕좌왕하였다. 선생님은 다음 화면을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마, 문학에 대한 연구는 상상과 확신에서 시작된다고 하면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마,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은 상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문학에 대한 이해 역시 여기서 출발한다. 마, 이육사의 [曠野(광야)]를 교과서에서 배우고, 대학에서 고구려 건국 신화를 알게 되면서 비롯된 몇 개의 단상을 중심으로 하나의 시론을 펴보기로 하겠다.”

숨을 고르고는 선생님은 이내 ‘광야’를 읽어 내려갔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1연을 다시 읽어 내려간 국어선생님은 숨도 쉬지 않고 선생님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마, 여기에서 우리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고구려에 대한 단상에서 이육사의 호 육사(陸史)가 다분히 수인(囚人) 번호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로서의 대륙의 역사를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5부족 사회였다. 저가(猪家), 구가(狗家), 우가(牛家), 마가(馬家), 그리고 왕족이 있었다. 여기서 나는 고유의 민속놀이 윷놀이에 초점을 맞추겠다. 도, 개, 걸, 윷, 모! 이는 돼지, 개, 닭, 소, 말을 하나의 말(매개체)로 하여 치르는 우리 전통놀이인 것이다.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선생님은 우리들의 반응을 잠시 응시하더니 알았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숨도 쉬지 않고 다음을 읽어 내려갔다. 아이들의 반응은 생각 외로 진지해 보였다. 물론 졸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기 일을 하기도 했으나 이내 점점 선생님의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보기 드문 경우였기에 꼴깍하고 침 넘기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마, 그들은 왕족, 계가(鷄家)였던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렸’던 그 순간을 역사의 태동으로 상징되었던 그 닭의 소리. 그것은 시작의 상징이었으며 천상(天上)을 지향하는 주몽의 상징이었다. 육사는 하늘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인 주몽이 하늘을 처음 열었듯이 우리의 어두운 역사에 새로운 새벽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고 할 수 있다. 마, 이러한 육사의 세계관은 다른 시들에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단상에 대해 지나친 비약을 지적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5라는 숫자는 고구려 건국 신화의 해모수의 오장검, 그가 타고 내려오는 다섯 마리의 말, 그리고 함경도 지역에 구전되는 [창세가]에 나타나는 5라는 숫자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마, [창세가]에서는 ‘하늘에서 하강한 금벌레 다섯 마리와 은벌레 다섯 마리가 각각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을 상징하는 다섯의 인간으로 진화한다.’는 내용으로 집약된다. 우리는 여기서 ‘5’라는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임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자 아이들은 정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몰입되었다. 자신을 버려야 주체를 찾을 수 있다는 조금은 위험한 발상에 아이들은 침묵했다. 평소같으면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던 - 조금은 재수 없는 아이들조차 침묵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마, 육사에게 있어서 동방은 빼앗긴 역사에 대한 동경이면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육사의 고향, 안동은 누구의 땅이었던가? 그곳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땅이었다. 고향에 대한 혐오는 역사를 거스르고, 민족을 배반한 사대주의 집단, 신라에 대한 환멸이었다. 육사의 시에는 서풍(西風)이나 북풍(北風)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서(西)나 북(北)은 기대감의 상징이다. 자주성이 상실된 민족이 직면하게 되는 식민으로서의 당위성에 대한 대안으로 육사는 제 살을 깎는 고통으로 어두운 동굴을 헤쳐 나오기 위해 몸부림쳤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계속된 토끼의 잔꾀를 버리고 호랑이의 포효를 기대하면서, 닭의 새벽을 향한 울부짖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시화하고 있다. 마, 14대조 할아버지인 퇴계 이황 선생이 현실에 대해 고민하면서 초인(超人)을 길러내기 위하여 서울과 안동을 수시로 오르내렸음을 그는 이미 경험과 신념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육사(陸史)! 그는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를 실제로 만들어내고, 그를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겨 두려운 현실, 자아를 잃어버린, 주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을 위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하였던 것이다.”

 

선생님은 준비해 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한 편의 시를 화면으로 불러냈다.

 

까치가 울던 날에

현관문이 열리고

어디 군만두 내음 피었으랴.

 

모든 철가방들이

골목을 굽이쳐 딸딸거릴 때에도

차마 단무지를 빼놓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손길이

부지런한 불길에 피어선 지고

짬뽕 국물이 흘러 내렸다.

 

지금 땀 흐르고

짜장 내음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 고추 가루를 뿌려라.

 

다시 몇 잔 후에

소주병 들고 오는 친구 있어

내 방에서 목 놓아 취케 하리라.

방금 전까지의 진지함은 사라진 패러디 작품 한 편이 화면에 나타났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흐뭇한 미소로 선생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 마선생, [중국집에서].

 

이어서 나타난 화면에 뒤늦은, 눈치 없는 아이들도 웃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웃음을 바라보고는 스치듯이 다음 화면을 보여주셨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대륙지사(大陸之史)에서 시작한 이육사의 광야를 배우는 시간은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입이 근질근질한 아이들도 예상치 못한 반전에 헛웃음을 지었다. 국어 선생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속 말씀을 이어 가셨다.

“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고로 우리는 유에서 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표절과 패러디는 분명히 경계하고 분별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체화(體化)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 자기 안에서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그것이 새로운 유가 되는 것이다. 모르고 하는 모방은 괜찮다고 할 수는 없다. 마, 많은 독서와 체험을 통해 체화(體化)하는 과정, 패러디의 과정은 중요하다. 마, 그래서 습작(習作)은 창작(創作)의 새로운 영역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말이 끝나갈 무렵, 아니 수업 종료를 2~3분 남겨 놓고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얘기한 잘난 체 하는, 재수 없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의 질문의 손을 주저앉히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미, 이번 시간에는 여러분이 잘 참아 주었다. 아마도 질문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친구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여러분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두 문사, 이인로의 용사론과 이규보의 신의론을 바탕으로 오늘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져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물론 수행평가라는 사실은 분명히 밝힌다. 마, 다음 시간에는 오늘 수업과 연관하여 용사론과 신의론에 대한 수업을 하겠다. 많은 준비를 하고 오도록!”

국어 선생님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회장의 인사도 받지 않고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이들은 이육사의 광야에 대한 단상에 푹 파져 버렸다. 다음 시간이 기대되는 것은 서양의 이론이 아니라 우리 이론으로 바라보는 ‘창작론’이라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가슴 벅찬 수업이었다.

햇살이 잠을 불러 오기는커녕 오랫동안 식곤증을 날려 버리고 있었다. 훈훈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