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13. 이에는 이

madangsoi 2014. 7. 13. 01:05

2009년 7월 23일 목요일, 관악키즈플러스 치과에 간다. 택비(택시를 재원은 이렇게 부른다!)를 타고 간다. 앞니 네 개와 어금니 각 1개씩. 한꺼번에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지난 7월에 헛걸음하고 나서 3주 만에 치과에 들렀다. 재원이 갑자기 엘리베이터 앞에서 쉬를 하고 싶다고 한다. 서울 우유 빈 병 뚜껑을 열려는데 갑자기 도주를 한다. 잡아와서 쉬를 하라고 한다. 쉬가 나오지 않는단다. 재원의 진화는 이제 연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3주 전에 녀석과 함께 ‘택비’를 타고 가다가 서울대 입구 4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녀석을 데리고 내려서 쉬를 하려는데 택시 기사가 물이 반쯤 담긴 생수병을 준다. “남자들은 편합니다!”라면서 건넨 생수병 뚜껑을 열고 쉬를 시킨다. 아주 적당하게 500ml를 채운다. 따끈한 물병을 좌석 밑에 두고 택시는 우리 부자를 태우고 출발한다. 관악키즈플러스 치과 맞은편에서 내려준다. 신호는 파란 불이다. 재원을 안고 뛰다가 생각한다. 재원이 쉬야가 들어있는 생수병을 두고 내렸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었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떠난 택시 꽁무니를 보면서 부질없는 후회를 한다. 저녁에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누군가 심야에 술기운에 재원이 쉬야를 마시면 물이 짭짤하다고 생각할 거라고 웃어댄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이 짭짤하기만 하다.

 

도주하는 재원을 잡아 안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재원은 울기 시작한다. 아마 이것도 연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리얼리티에 위로를 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면서 병원 안팎을 오간다. 장난감 방에서 낯모르는 다섯 살짜리 누나는 재원에게 자동차 가지고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정도 해보고 울어 보기도 하지만 끄떡없다. 아마도 다음 주에 치과에 와서 만나면 주먹이 날아갈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재원은 지금 진화 중이므로. 순박해 보이는 낯모르는 다섯 살 누나가 불쌍해 보인다.

한참 동안의 기다림을 뒤로하고 재원이 호명된다. 재원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재원이 몸은 단두대의 사형수처럼 꽁꽁 묶여 있다. 머리와 다리, 팔이 몸부림쳐 보지만 무릎은 아빠에게, 머리는 간호사에게 잡혀 있다. 입은 기계로 강제 오픈이 되고 갖가지 도구들은 재원의 게으른 이 닦기에 벌을 내린다. 땀으로 범벅이 된 건지, 눈물로 범벅이 된 건지, 불분명한 녀석은 20여 분간의 사투 끝에 하얀 인공치아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땀을 닦으며 투사로 변환한다. '아빠, 나 잘했지?'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재원은 다음 주 목요일에 다시 한 번 반대 편 앞니 두 개와 어금니 한 개를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거다. 다행이다 싶었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신의 이를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외식을 하면서도 아픈 기억을 깨끗이 잊은 듯하다.

 

다음 날은 바쁜 하루였다. 재원과 함께 병원에 가서 감기약을 짓고는 ‘택비’를 타고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린다. 새로 산 아파트 전세 중도금을 받아서는 국민은행 신림점에서 가져온 차액을 더해 전 주인에게 중도금을 주는 날이다. 재원은 택비 타기에 신이 났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육쌈 냉면집에 간다. 세 살짜리 아들과 함께. 녀석은 가위와 집게를 빼앗기자 수저를 가지고 난리를 친다. 일인분을 시켜서 둘이 나누어 먹으려는데 나보다 늦게 온 세 사람 테이블로 먼저 냉면과 고기볶음이 간다. 예약하고 왔겠지 하며 참았다. 이어 그들보다 더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고기볶음과 냉면이 간다. 그러더니 종업원 아가씨 둘이 돌아가면서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 한다.

“저, 주문하셨어요?”

“그럼요, 아까 주문했잖아요, 1인분!”

“분명히 하셨지요, 물냉면?”

“네!”

이번엔 다른 아가씨가 묻는다.

“1인분 맞죠, 비빔냉면?”

“아뇨, 물냉면 1인분이요!”

“물냉면 1인분, 맞죠?”

“그럼, 세 살짜리랑 먹을 건데 그 매운 비빔냉면 시켰겠어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화를 내며 나온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도 다 먹고 있는데 이제 와서 질문이 왜 그 모양이냐, 결국 ‘1인분 시켰다고 퇴짜를 논 모양인데 2인분 안 시켜서 정말 미안하다!’라며 화를 내고 나와 버렸다. 정말 우울한 날이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이러다 점심을 굶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속으로 후회가 되기도 한다. 성격이 급하다는 건 좋은 게 아니라고 푸념한다.

명동 부동산에 들렀다. 푸념을 한다. 중도금이고 하니까 은행으로 서로 주고받으면 편할 일을 왜 이렇게 직접 만나서 힘들게 하냐고 했더니 사람 좋은 중개사가 내 얼굴에 화 난 게 보인단다. 예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내 편을 들어준다. 일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 한다. 늦은 점심으로 짜파게티를 끓인다. 인스턴트 음식 먹이지 말라는 아내의 지청구가 아니더라도 나는 짜파게티를 액면대로 끓이지 않는다.

먼저 물을 계란 두 개와 함께 넣고 냄비에 끓인다. 바닥 깊은 푸라이 팬에 감자를 적당히 썰어 볶는다. 양파도 적당히 썰어 넣어 감자랑 함께 볶는다. 돼지고기도 적당히 썰어 볶는다. 당근도 적당히 썰어 넣어 볶는다. 음식은 역시 색감이다. 배추도 적당히 썰어 볶는다. 냄비에 면을 넣는다. 건더기 스프와 분말 자장 스프는 끓이던 물과 함께 바닥 깊은 푸라이 팬에 넣는다. 이제 면은 면대로 센 불에 끓이고 짜장 소스는 소스대로 중불에 졸인다. 면이 적당히 익으면 찬물에 씻어낸다. 면발도 쫄깃쫄깃해지지만 몸에 해로운 기름기도 한 번 제거해주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찬물에 씻어낸 면을 잘 졸여진 자장 소스에 넣어 30초간 잔불에서 면에 배이도록 하면 짜파게티 요리는 끝난다. 이때 아직 매운 것을 못 먹는 재원을 위해 적당량을 덜어낸다. 느끼한 맛을 덜어낼 비장의 무기를 넣는다. 찹쌀고추장 적당량을 넣어주면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난다. 여기에 유성 스프를 넣고 데커레이션으로 오이를 썰어 올리고 껍질을 벗겨낸 계란을 절반으로 잘라서 올린다. 완두콩이 있으면 올려도 무방하다. 아니 금상첨화다. 요리는 어디까지나 색감이다. 식감, 치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색감이다. 도연과 재원이 맛있게 먹어 준다. 나, 아빠는 짜파게티 요리사가 된다.

도연을 데리고 함께 가연 치과에 간다. 이번에는 내 이를 치료하러 간다. 도연은 재원이 보호자 자격이다. 고2때 금속으로 덮개를 씌워 치료했던 왼쪽 아래 어금니와 오른쪽 위 어금니를 순금으로, 아니 더 나은 K-골드로 하기로 하였다. 거의 영구적인 치아 치료법은 거금이 든다. 전에 있던 금속 덮개를 잘라내고 봐야 치료여부를 정할 수 있단다. 다행히 속에는 이상이 없어서 간단히 갈아내고 틀을 만들고 있는데 치과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재원이 녀석이 안절부절못하며 진료실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아파?”

하면서 내 허벅지를 꼭 눌러 준다. 어제 재원이의 무릎을 눌러주던 내 손길에 대한 보답인가 보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치료를 끝내고 치료비를 내고 도연과 재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시내버스를 타고는 집 앞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신림 사거리까지 가서 아내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족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하는 오후 6시, 아내는 지금 퇴근을 한다.

 

아빠는 참 바보같다. 어제 치과에서 내 무릎을 꼭 누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애정을 과시한다면서 아파서 버둥거리는 내 왼쪽 손을 꼭 쥐어주었다. 난 정말 아파 죽을 뻔 했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치료를 다 끝내고는 하나도 안 아픈 척했지만 땀이 비 오는 듯했다. 하지만 진실은 정말 눈물로 가득했다는 게 맞다. 집에 와서도 엄마랑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아빠가, 내 자랑을 했지만 난 안 믿는다. 언젠가 아빠도 오늘같은 고통을 겪으면 내가 위로랍시고 ‘아빠, 참 장해요!’ 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올 줄은 몰랐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아빠는 육쌈 냉면 집에서 주문한 음식이 안 나온다고 버럭 성을 내고는 그냥 나와 버렸다. 난, 냉면도 좋아하고 고기도 좋아하는데, 정말 억울했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돌아와서 아빠표 짜파게티를 먹고 가연 치과에 갔다. 간호사 누나들이 날 무척 예뻐해서 재미있게 놀아줬다. 물론 손님으로 온 아빠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어제의 복수를 위해 아빠에게 수시로 왔다 갔다 했는데 아빠는 별로 아픈 티를 안 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빠의 오늘 치료는 별로 아프지 않은 거랬다. 그래도 어제의 복수를 위해 내가 아빠 옆에 서서 아빠의 무릎을 꼭 눌러줬더니 간호사 누나랑, 의사 선생님이 나 보고 효자란다. 아빠도 아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로 기분은 좋아지겠다. 아빠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다.

도연은 그걸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아들딸과 부모는 조금씩 닮아가게 되는 거란다. 그걸 가족이라고 부른다고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도연이 해 주었다. 아무튼 맞는 말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주면서 웃어 주었더니 도연이 맛있는 과자와 우유를 주었다. 참 고마운 도연이 누나다. 누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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