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33. 사다예가 떠났다

madangsoi 2014. 7. 13. 01:30

교육과학기술부 주관, 문화방송, 경향신문, 삼성전자, 두산중공업이 후원하는 제61회 1억 원 고료 편지쓰기 공모 금상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2학년 1반 사다예!

대상 상금이 1,000만 원, 금상도 상금 500만원이나 되는 권위 있는 대회에서 나, 사다예가 또 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번 공모는 담임선생님도 모르게 나 혼자서 써냈는데 일을 내고 말았다. 이제 선생님으로부터 독립할 때가 되었다기보다는 백사라와의 오해부터 풀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내 실력을 내 스스로 인정받고 싶었다면 오만일까? 긍정의 심리학은 이렇게 고래도 춤추게 하는 기적 아닌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나 보다.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게 어려워 보였지만 결국 내가 그렇게 되다니? 선생님도 무척 좋아하셨다. 아빠와 다함이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어쩌겠는가, 아빠 말대로 시간이 필요한 것을.

항상 죄송하고 감사한 부모님께!

 

지난 해 여름은 정말 힘들었어요. 모두에게 바람이 불어도 저에게 시원함보단 짜증을 전해주는 그런 여름바람이었어요. 아마 바람도 짜증이 났나 봐요. 바람도 여름이랑 싸웠나 봐요. 저랑 엄마, 아빠처럼요. 육상을 그만두고 중학교 겨우 턱걸이로 졸업하고 턱걸이로 인문계 진학하고 적응 못하겠다며 전문계로 전학을 하겠다면서 신경질 부리던 그때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해요.

우리 학교,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에 전학해서도 불안하기만 했어요. 우연히 담임선생님과 상담하고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서 180도 달라졌죠. 담임선생님은 저를 위해 담배도 끊었고요, 저 사다예는 지각을 끊었죠. 참가하는 글짓기대회마다 입상을 하면서 작문에 대한 흥미를 느꼈어요. 성적도 1등급을 유지하게 되었고요. 연세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에 대해 꿈을 꿀 수 있었죠. 육상 그만둘 때만 하더라도 불가능한 꿈이었죠. 하지만 꿈은 현실이 될 것같았어요.

이상한 일도 있었죠. 제가 전혀 모르는 외증조할아버지와 담임선생님 할아버지의 악연이 인연으로 승화되는 상황은 한 편의 영화처럼 아름답기만 했어요. 아마도 담임선생님은 이 이야기로 소설을 써보겠다고 하실 거예요. 우익과 좌익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우정보다 가족을 찾았던 두 사나이의 애증의 이야기 말이죠. 그런데 저는 외증조할아버지가 영화 속의 영웅들처럼 보였어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온몸으로 이데올로기의 전쟁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역사를 증명했던 외증조할아버지는 의인이었어요. 마지막 무덤으로 가시면서 담임선생님의 할아버지의 편지를 가져가셨죠. 소지(燒紙)함으로 해서 경건한 의식 속에서 신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은 숭고함 자체였죠. 시대를 원망하기보다는 시대를 온몸으로 품어 안았던 외증조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어요. 물론 담임선생님의 할아버지도 좀 밉기는 했지만 한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담아내셨고, 자신의 과오를 감추기보다 질책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책임을 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어요.

이 이야기가 내 일이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나는 담임선생님의 할아버지, 임동준이란 인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외증조할아버지의 편지를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이야기에선 감동을 받았죠. 아무튼 두 분의 우정처럼 저도 선생님과 망년지우(忘年之友)의 길을 가볼까 합니다. 아닙니다. 이제부터 혼자 힘으로 성실한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의 버팀목이 될까 합니다. 선생님을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말입니다. 저와 백사라가 누렸던 호사를 후배들도 누려야 하잖아요. 기회를 양보하는 마음, 참 어렵습니다만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선생님은 또 다시 속을 끓일 겁니다. 아마도 술을 끊을 지도 모르죠. 마, 선생님만의 향기로 후배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겁니다. 아참, 선생님이 술을 끊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선생님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재원이의 ‘아빠, 슐 먹어’를 들을 수 없잖아요. 그렇다는 얘기에요.

엊그제, 짜증 가득 부린 제 모습이 떠올라 죄송하기만 합니다. 저 때문에 지친 여름 더 지치셨죠? 죄송해요. 항상 편지를 쓸 때마다 죄송하단 말이,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말보다 더 가득 편지지를 채우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작년 여름보다는 흐뭇해하시는 일이 많아져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멋진 사다예로 다시 태어날게요.

제가 첫째여서 그런지 항상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웁니다. 철들어야지, 철들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철이 반밖에 안 든 것같아요. 육상을 그만두었을 때도, 전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저를 믿어주신 나의 부모님. 동생을 챙겨야지, 챙겨야지, 하면서도 많이 못 챙긴 것같아 많이 아쉽고 후회가 됩니다. 누군가 후회할 때가 가장 빠른 시기라고……. 지금부터라도 후회 하지 않을 일만 하는 맏딸 사다예가 되어야겠네요. 요새 들어 동생 다함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시야가 약간 흐려진 것인가요? 최근 싸운 일로 인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는지 저도, 다함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는 것같아요. 누나인 제가 먼저 다가가 볼까 해요. 그게 바로 효도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제 생각입니다. 동생과 사이좋게, 의좋게 지내는 것…….

이제 1년 반 후면 저도 어엿한 스무 살, 법적 성인이 되네요. 편지에 효도하겠다는 말 꼭 지키고 보답하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바람이 말합니다. 우리 사다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왜내고 물었더니,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강한 바람처럼 힘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님이 아니라, 해님처럼 온화하고, 아름다운 말씀과 칭찬으로 자녀를 가르치시는 살가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라네요 ^.^ 그래서 저 사다예는 땀의 소중함으로 알고 언젠가는 부모님의 따뜻함을 닮은 사다예가 될 거랍니다. 땀은 언제나 거짓을 모른다네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2009년 8월 29일

 

아버지, 어머니의 맏딸 사다예 올림.

사다예의 감동적인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1년 전에 왔던 윤영주 선생님의 이메일이 오버랩 되었다.

 

일본 여행기 잘 봤습니다.

재원이가 나중에 이 글을 읽고 이해할 쯤이 되면, 아마 무수히 더 많은 글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무척이나 든든하고 기쁘겠어요.

제 동생이 전에 공지영 씨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을 읽고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 엄마도 나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고 싶었는데 좀 더 낫게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러 이런 글을 써서 전해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저도 그 말에 공감을 하며 그 점에서 그런 말을 때때로 작품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위녕이 부러웠습니다.

아마도 재원이는 아버지의 이런 글을 읽고 마음이 아주 부자가 될 것같습니다.

연수 방식은 제시하신대로 30초 이내로 발표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각자 2분씩은 다른 사람들이 좀 지루하겠지요.

다음 주까지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에 국지성 호우가 계속 내릴 거라고 하는데 인제 내린천은 괜찮을지 걱정이 되네요.

이번 여름 방학은 올림픽 경기 보느라 일손이 잡히지 않아요. 우리나라 정말 대단해요. 이 좁은 나라에서 정말 못 하는 경기가 없죠?

오늘 있을 중국과의 야구 경기도 기대해보면서 이만 ^.^

 

p.s 아직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네요. 재원이네 가족 모두 건강 조심요!

아마도 사다예의 엄마도, 내 아버지도 좀 더 멋지게 외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좀 더 나은 표현을 찾아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말은 글보다 훨씬 주워 담기가 어렵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아니, 설령 주워 담는다 해도 잃는 게 더 많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글은 어떤가? 퇴고하고 재고하고 하다보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글이 위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활자로 인쇄되어 여러 사람의 손에 쥐어지면 후에 오탈자가 발견되어도 고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더 많은 노고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실수가 적어진다. 누가 썼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진일보 했는가가 중요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이 아닌 인간의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답습이 아니라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낯섦이 바로 창작의 시작이다.

 

나는 또 다른 사다예를 기다린다.

사다예가 떠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