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오래된 편지 한 장
보시게, 친구!
아마도 1961년 6월 초였을 거네. 갑자기 면장과 검은 안경을 쓴 자가 사랑채에 들어왔다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동행하자는 거네. 5.16 군사 쿠데타가 난 지 얼마 안 되던 때였네. 정원의 사철나무가 무척 푸르던 때였고 2모작 논에 보리 베고 모 심느라 바쁘던 시절 아니었던가?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면장과 함께 그렇게 어딘지 모를 곳에 끌려가다시피 했네. 그곳이 공안 분실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었지. 이진수, 자네 이름이 언급되었다네.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에 빠졌던 자네가 6.25 사변을 거치면서도 남한에 남아서 남로당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시인하라는 거였네. 앞이 캄캄했다네. 사실이 아닌 것을 어찌 사실이라고 하느냐고 했더니 주먹세례가 날아왔다네. 내 나이 쉰하나 아니었겠나? 정신이 번쩍 나면서 이제 죽었구나, 했지. 검은 안경의 사내가 내게 이런 얘기를 했네. 나는 선택권이 없다더군. 그저 시인하면 살고 시인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려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네. 면장도 마찬가지였다네. 빨갱이로 죽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 그때는 그 말이면 모든 게 끝나는 세상이었지 않았나? 면장이 오줌과 똥을 지린 채 내게 눈물로 호소했다네. 면장과 민의원인 내가 증인이 되면 일은 일사천리로 돌아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지. 그런데 왜 하필 나였는가 하는 거였네. 그런데 장남평야 개간사업과 관련된 토지 보상 위원회에서 자네가 일제에 맞서 노임 대신 토지를 보상받게 했던 전과를 들었던 거였네. 배들이 드나들던 포구를 평야로 만드는 대토목공사였지 않은가? 반강제로 동네 사람들을 포구 막이 공사며 개토 작업에 동원하면서 노임 대신 전표를 주겠다는 동양척식 충남지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토지로 보상을 받게 한 것이 다 자네 공이었지. 평생 자기 땅을 갖고 싶었던 모든 동리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개간 작업을 했었네. 식구란 식구는 다 나가서 일을 했었지. 내 땅을 갖고 싶다는 욕구는 기적을 만들었네. 5년 예정 공사가 4년도 채 되기 전에 끝이 났지. 그때 나는 구경꾼처럼 이장 일을 보면서 요족을 누리던 때였네. 그때도 나는 자네에게 빚을 진 거였지. 하지만 자네는 내 편에서 이야기 해주었네. 동준이가 이장으로서 우리 동네의 권익을 찾아준 거라고. 그렇게 나를 도와주던 자네였는데. 재판 과정에서 들었겠지만 자네는 이미 남로당 충남도당의 거물로 조작되어 있었네. 재산 몰수와 함께 빨갱이로 몬다는 말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만 지장을 찍고 말았네. 친구를 팔고 목숨을 건진 거였네. 자네 가족은 그 후로 서울로 올라갔다는 얘기만 들었네. 얼마 전에 병원에서 내가 이제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라더군. 그래서 죽기 전에 내 죄를 사죄하려고 자네를 찾았네. 손자사위가 경찰이라서 어렵지 않게 자네 가족의 주소를 알아봐 주었다네.
자네가 사형을 받았다가 무기 징역형으로 감형되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즈음해서 가석방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네. 미국보다 소련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노랫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올림픽 덕이었네. 그때까지도 아직은 레드 콤플렉스가 한창이던 시절이었지. 덕분에 자네가 풀려날 수 있었던 거야. 시대가 가두고 시대가 풀어주는 아이러니가 진실로 여겨지던 어두운 시절이었네. 장장 27년을 옥살이 하고도 아직도 빨갱이의 굴레를 벗지 못한 자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친구의 우정을 저버린 내가 인간일 수 있겠는가? 그저 죽음으로 자네의 무죄를 알렸어야 했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공안 분실의 차디찬 공기에 그저 똥오줌 지린 이 겁쟁이가 평생 짊어진 짐은 배신자란 무거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었다네. 이 편지가 자네에게 전해지면 자네는 이걸 나라고 생각하고 갈가리 찢어 불태워 주게. 내 자네에게 진 빚, 지은 죄 죽어서라도 꼭 갚겠네. 가족이란 울타리, 연좌제의 울타리를 알기에 자네 가족들에게 이 죄 갚지 못하매 죽어서라도 꼭 갚겠네. 정말 미안하네.
정원의 사철나무가 저리 푸른 것이 자꾸만 그날이 떠오르네. 검은 안경만 봐도 오줌을 지린 지난 30년이었다네. 30년을 그저 몸뚱이만 살았다네. 정신은 자네가 있는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네. 나 이제 하늘로 돌아가네. 가서 자네를 기다리며 참회하겠네. 부디 남은 생 건강하게 살다가 오게나. 그때 다시 만나세.
1991년 6월 6일
忠南 燕岐郡 南面 眞儀里 林同埻 拜上.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 임동준 배상!
내가 읽은 게 아니라 엄마가 읽어주었다.
내가 선생님이 준 [도연재원]을 읽으면서 학교생활에 충실해져서인지 엄마가 7월말쯤 내게 [도연재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다시피 읽었던지 다음날 다시 돌려주시는데 얼굴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 피곤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내게 학교를 옮기자고 하는 거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냥 학교 학생들이 대부분 어두워 보이고 불량스러워 보여서 그렇다는 거였다. 사실 전학 올 때 알아봤지만 전학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우리 속담처럼 이방인을 받는 학교는 거의 없었다. 학급 분위기 망치는 망종으로 낙인을 찍는 무서운 현실에서 엄마는 희망을 발견한 딸에게서 희망을 빼앗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엄마는 학교보다 선생님을 더 좋아했다. 학교 아이들 보지 말고 담임선생님만 믿고 살아가라고 했었던 엄마다. 이미 우리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에 대해 나, 사다예만큼 아는 사람이 엄마였으므로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런데 성적도 1등급, 작문 능력도 1등급이라며 좋아서 가족 여행까지 다녀온 바로 뒤라서 엄마의 말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울면서 안 된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백사라와 그림자들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 아이들이 나를 해코지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조용히 작문이나 하면서 수행평가 잘 받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 성적 관리만 잘하면 3학년 2학기 1차 수시에 내가 목표한 대학 스토리텔링과에 입학할 수 있는데,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라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다니? 아빠도 같은 생각이냐고 했더니 아빠는 엄마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거다.
막연했다. 그래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울면서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엄마가 그러는 거다. 이유는 나중에 내가 좀 더 크면 알려주겠다는 거다. 내가 좀 더 크면 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말도 안 돼! 이제 고2,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전학이라니? 하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화가 치밀었다. 이제 겨우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감도 생겼는데 전학이라니,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접지몽(胡蝶之夢)도 아니고 분명 나비인 내가 사람 꿈을 꾼 건 아니었다. 꿈이라면 아예 중학교 때로 돌아갔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당당하게 육상부 선배들에게 내가 직접 설득하고 육상의 꽃이 되었을 텐데,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 엄마의 난데없는 말 한 마디는 나를 혼돈의 늪으로 빨려들게 했다. 밤에는 악몽을 꾸었다. 구체적이지 않아 생각은 나지 않지만 낯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꿈을 꾸었던 것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침대가 온통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엄마는 아침상을 차려놓고 메모지 한 장 남기지 않고 회사에 출근을 한 모양이었다. 밥을 조금 먹고 설거지를 한 후 방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엄마는 무슨 이유로 나를 전학시키려는 걸까? 생각을 아무리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다음 날 아빠 회사에 찾아갔다. 아빠는 처음으로 회사에 찾아온 나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가까운 고급 식당에 갔다. 점심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면서 내가 아빠에게 말을 하려는데 아빠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엄마가 며칠 전에 보여준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 임동준이라는 분, 믿기지 않겠지만 너희 담임선생님의 할아버지란다. 너희 담임선생님 할아버지가 엄마 외할아버지를 27년간이나 사상범으로 몰리게 해서 감옥생활을 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거야. 세상 참 좁지. 운명의 장난인지 네가 힘들게 전학한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된 거잖아.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네가 읽던 [도연재원]이란 책에서 엄마의 고향 지명을 우연히 목격한 거야. 그래서 몇 번 몰래 읽어보려고 했는데 네가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니까 볼 수가 없었나 보다. 견디다 못해 엄마가 네게 빌려 읽었던 모양이다. 밤을 꼬박 새워서 읽고는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었다. 1주일이 지나고 엄마가 아빠 회사에 퇴근 시간을 맞춰서 찾아왔더구나. 아빠는 엄마와 함께 저녁식사 겸 반주를 할 수 있는 스시 전문점 one Bean으로 갔다. 엄마는 죽을 좀 먹더니 최근에 즐겨하지 않던 술, 그것도 소주를 시켜서는 젊은 시절처럼 많이 마시더구나. 집안 내력이라서 그런지 술을 잘 하는 엄마니까, 또 분위기를 봐서도 아빠가 말리지는 않았다. 다만 술 따라주는 시간을 조금 늦출 뿐이었지. 엄마는 속에 있는 말을 못하면 병이 나는 스타일이니까 아빠가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거다. 처음처럼 두 병을 아빠와 거의 똑같이 나누어 마시고 나서야 너의 외증조할아버지와 임동준 씨의 악연을 이야기 하더구나. 그러더니 너희 담임선생님이 임동준 씨의 손자라는 거야. 나도 무척 놀랐다.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인데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엄마 눈과 코에 맺힌 눈물과 콧물을 보고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위로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아빠가 물었다. 엄마는 그냥 전학시키자고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네 엄마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운명의 장난을 받아들일 시간 말이다. 그래서 일단은 여름방학이고 하니까 가족 여행 다녀온 뒤에 엄마 뜻대로 하라고 했다. 너는 아빠가 설득하겠다고 해두었다. 사다예, 엄마를 좀 이해해다오. 일단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엄마의 속도 많이 누그러질 거야. 그때까지 좀 참아줘. 알았지, 우리 맏딸!”
디저트로 나온 아빠의 커피는 처음 그대로 남아 식어 있었고, 내 아이스크림은 형체를 몰라볼 정도로 이미 녹아 있었다. 아빠와 헤어져서 나는 선생님께 엄마가 보여줬던 편지를 스캔해서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사다예에게 이메일이 왔다.
선생님, 운명이란 게 이런 걸까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맞는 걸까요? 현실에서 부부로 만나려면 전생에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속의 옷깃이 스치려면 전생에 잘 아는 사이였어야 한다는 말처럼 인연은 정말 있는 걸까요? ‘레드 콤플렉스는 극복되었는가?’라는 선생님의 글처럼 2002년 월드컵 때만 우리는 붉은색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나라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면서 이미 남쪽은 파란색, 북쪽은 빨강색이 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은 아닐까요? 오래된 편지 한 통 첨부해서 보낼게요. 한 번 읽어보세요.
저, 사다예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개학을 며칠 남기고 온 사다예의 메일은 고등학교 2학년생의 글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흐뭇했다. 사다예가 참 많이 발전했구나, 이제 됐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방학 중에도 사다예의 도전은 멋진 결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연세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입학이라는 신기루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제11회 국립전쟁기념관 주최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쾌거는 꼴찌들의 학교에서 거둘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 이제 후배들은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사다예를 보면서 SKY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짜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선하다. 아직도 나는 그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사다예가 3학년 1학기까지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몇몇 국어 선생님과 사다예 자신에게만 알렸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었다. 서서히 알려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광고를 하면 부담감도 부담감이지만 소외된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정신적 테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우가 작용했던 것이다. 3학년 1학기까지 사다예가 내신 관리를 잘 할 수 있도록 먼발치서 도와주는 게 내 몫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아닌 국어선생님으로서 말이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나는 사다예를 지켜보면서 가끔 조언 정도 해주는 게 이제 내 몫이다. 그 이상은 사다예를 또 다시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사다예가 첨부한 파일이 문제였다.
스캔된 편지 속의 주소와 이름 때문에 처음에 몹시 놀랐다. 하지만 그 주소와 이름이 매치되자 편지의 내용은 나를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만들었다. 세종시의 혼란 속에 빠져버린 내 고향이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늪 속으로 빠져 들고 있었다. 내 할아버지 임동준이 허위 진술을 했고 그로 인해 사다예의 외증조할아버지를 27년 간 사상범으로 살게 됐다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용서를 빌고 있는 할아버지의 편지는 심하게 떨렸다. 할아버지의 필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편지의 글씨를 보고야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심하게 떨면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관리를 잘못해서 편지지가 얼룩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편지는 눈물로 번져서 이미 얼룩이 져 있었던 것이다. 용서하는 자보다 용서를 비는 자에게 더한 아픔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속에 죄를 짓고 살았던 허깨비같은 삶은 어떠했을까? 친구를 배신한 채 가문의 영달을 위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연좌제의 공포에 허위 진술을 한 노인의 회한이 묻어나는 글을 보면서 나는 울었다. 사다예 외증조 할아버지의 삶을 시대의 죄라고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마녀 사냥 식으로 몰아가던 시대의 희생자들이 오버랩 되었다. 반민족 행위를 한 이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민족자존을 외치면 빨갱이로 몰아가던 시대였다. 그들은 반민족 행위를 덮기 위해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미국이 도왔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꺼삐딴 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념을 도구로 보수는 자본주의, 진보는 공산주의로 몰아갔다. 그런 시대였다. 그 역사의 현장에 내 할아버지와 사다예의 외증조할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종시 이전 문제로 시끄러운 내 고향에서 역사적 비밀이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노인!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어떤 진실 찾기를 했던 것일까 궁금했다.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사다예의 외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죄에 대해 용서하셨을까? 아니라면?
1991년 11월 18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이 떠올랐다. 동리 노인들이 큰집 바깥마당에 마련된 술상에 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말 속에 뼈가 있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그냥 푸념이겠거니 했던 그 노인의 말들. 노인들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한 노인의 입을 막으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노인들은 소리 죽여서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 죽여 하는 말들이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영상으로만 남았다. 그때 옆 동네 노인들이 하려고 했던 말 중에 할아버지의 편지 속 이야기가 들어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아래인 노인들, 그들에게 할아버지는 동네 이장이면서 민의원이었을 것이다. 윗말 와가리(瓦家里) 샤만집(샘안집) 이장님! 아랫말 참샘(찬샘) 사회주의자 이진수!
사다예의 외증조할아버지 이진수라는 분에 대한 기사를 검색한다. 노인은 1961년 남로당 충남도당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노환으로 1988년 가석방 되었다. 그리고 1999년 6월 오욕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89세였다. 할아버지보다 8년을 더 사셨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해 신분이 복권되고 1997년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회의 민주평통 자문회의 사무총장으로 입명되었다. 장관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2년 임기를 채우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때에 진실규명위원회에 의해 사건 조작이 증명되어 국가로부터 36억 원의 보상을 받았다. 빨갱이에서 민주투사로서 국가유공자의 지위를 받았지만 이미 흘러간 세월은 돌릴 수 없었으므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감옥에서 자녀들에게 쓴 편지도 있었다. 그 편지가 책으로 나와 있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나는 GS 문고 신림 점에 전화를 걸었다. 이진수 씨의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라는 서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현재는 재고가 없다면서 필요하다면 구해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서점에서 전화가 왔다. 책이 도착했단다. 방학이었으므로 뛰어가다시피 해서 책을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책은 1997년 민주평통 자문회의 사무총장을 지낼 때 편집하여 출간한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300여 페이지 분량의 편지는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원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족 걱정에, 나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동지들에 대한 사죄와 용서의 내용이 구석구석에 묻어났다. 눈물 많은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다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내 할아버지 임동준에게 보낸 편지를 만날 수 있었다. 편지의 초고를 스캔한 듯 군데군데 퇴고한 자욱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정서를 해서 보낸 모양이었다. 편지는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품 어딘가에 있겠거니 생각했다.
내 오랜 벗 동준이 보시게!
연일 바람이 불었네. 그리고 이명(耳鳴)마저도 들리지 않았네. 자네가 끌려갔다던 공안 분실에 나도 갔었네. 여기저기서 고문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네. 4.19 혁명이 일구어낸 민주주의의 싹이 뿌리 채 뽑히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네. 죽을 수는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네. 며칠 동안 고문이 이어졌네. 하지만 견디고 또 견뎌냈다네. 쉰하나 늙은이의 몸이 그 모진 고문을 이겨낼 수는 없었네. 아무리 노동으로 이골이 난 몸이었더라도 세월을 이겨낼 장사는 없었네. 마지막으로 그자들이 꺼낸 카드는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네. 죽을 수조차 없게 만들었네. 자네에게 했던 것처럼 가족의 안위를 가지고 덤벼들더군. 이미 사건은 철저하게 조작되어 있었네. 증거까지 짜 맞추어져 있었네. 게다가 아들과 딸, 손주들의 안위까지 위협하더군.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네. 내 재산과 자유를 가져가는 대신 내 가족에게는 그만한 대우를 해달라고 했네. 굶지 않고 대학교까지의 교육비 일체를 책임져준다면 모든 죄를 달리 받겠다고 했다네. 며칠 동안 비가 그치지 않았네. 이른 장마 탓이었지. 공안 분실 밖으로 나갈 수도 있게 되었네. 감시가 따라 붙었지만 20여일 만에 햇빛을 볼 수 있었네. 아니 장맛비를 볼 수 있었네. 그리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지. 하지만 알고 있었네. 그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는 쓸 만한 카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그 시간에 나는 사형에서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네.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네. 20년 장기수 이진수의 감형을 통해 남북관계에 화해의 무드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보도가 모든 신문마다 똑같이 실렸더군.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은폐하는데 나, 이진수가 멋진 주연배우가 되는 순간이었네. 그때는 교도소에 무슨 꽃인지 하얀 꽃이 꽃비처럼 내리고 있었네. 그때는 계절이 바뀌는 게 무의미했네. 내 나이 이미 70,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무기징역이나 사형이나 무에 차이가 있었겠는가? 내 한 몸 자유를 박탈당함으로서 내 가족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어려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유혹은 나로 하여금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네.
동지들을 버리고 내 가족의 안위를 택한 나도 용서받지 못할 거라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완성하는 좋은 계기였겠네. 노태우 정권은 결국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월북 작가와 납북 작가들의 작품을 해금하는 대화합의 제스처를 썼지. 그 덕에 나는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영어(囹圄)의 삶을 마치고 다시 조건부 자유인이 되었네. 하지만 그게 말이네. 27년을 한결같이 살았던 교도소를 나와서 살게 된 낯선 서울의 낯모르는 단독주택의 작은 정원은 나로 하여금 심한 박탈감을 갖게 했다네. 트라우마(외상성 심리장애) 증후군이 나타났네. 삶의 조건이 바뀌자 몸이 심하게 아파왔네. 가족들과 동지들이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네. 하지만 쉽게 고쳐질 병이 아니었네. 그래서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하루하루 조건부 자유를 누려갔다네.
그러다 1991년 6월 자네에게서 편지가 왔네. 기뻤네. 내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랐네. 자네가 내 재산을 빼앗았다고 오해하는 가족들을 이해시키는 게 힘이 들었네. 하지만 자네가 고향의 내 토지를 내 명의로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오해를 풀더군. 내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에 가족들은 숙연해졌다네. 하지만 내 딸 아이만은 자네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더군.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가 원수를 갚겠노라고 했다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다고 했다네. 이데올로기라는 족쇄를 차고 살았던 사람들의 벅찬 고통일 뿐이라고 했더니 교도소에서 득도하셨냐며 울먹이더군. 그래, 득도란 게 별게 아니라고 했네.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고, 현실에 순응하는 게 득도라고 했지. 나이에 맞추어 세상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변절이 아니라고 말일세.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제 몫을 다하는 삶, 그게 바로 득도라고 말했지.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현실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강도의 현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근대사, 굴욕의 시대라고 말했다네. 억울하게 죽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했네. 이제 잃을 것도 없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제 지켜낼 가족이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족을 지키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현실이기에 가능하다고 말일세.
아이들에게 말했네.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하지 않았네. 용서하고 화해해야할 대상이 없기에 아파하지도 고통 받지도 말라고 했다네. 나로 인해 억울하게 고통 받았던 동지들을 생각하면 내 목숨은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다고. 강도의 시대가 모두를 정신이상자로 만들었던 시대. 그 속에 내 친구 임동준과 나 이진수가 있었고, 또 다른 동지들과 미워할 수 없는 적들이 있었다고 말일세.
나 죽거든 자네 편지를 함께 묻어달라고 했네. 아니 함께 태워달라고 했네. 내용은 책으로 남고 그 뜻은 십자가처럼 분단과 오욕의 시대를 화해의 시대로 나가게 하는 소지(燒紙)로 삼아달라고 했다네. 그리고 내 뼈를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 참샘에 뿌려달라고 했다네. 살아서 떠났던 고향에 죽어서라도 남아서 살고 싶었네. 동무들과 내 조상들이 살았던 그곳에서 영원히 노닐고 싶다고.
동준이, 건강하시게. 6개월이란 시한부 삶이나 27년이란 영어의 삶이나 우리 모두의 역사에서는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지 않겠는가? 배고픔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던 우리들의 꿈은 이루었네. 빈부의 격차는 있지만 한인, 한웅, 단군 조선 이래 가장 요족한 삶을 사는 이 시대가 아니겠는가?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다음 세대에게 맡기면 그들이 잘 하리라 믿는다네. 이제 갈 길을 준비하는 이 마음은 따뜻하다네. 장맛비가 오고 있네. 농토는 물을 흠뻑 머금어 홍수를 조절하고 있겠지. 고향의 옛 포구를 장남평야로 만들던 때가 그립기만 하네.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포구의 흔적을 보여주던 자네 선대 어르신들의 무덤이 평야 한 가운데에 그림처럼 남아있는 풍경이 무척 보고 싶네. 자네와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몸이 아프고 자네도 몸이 아프니 이렇게 편지로 소통하는 이 맘이 무겁고도 가볍기만 하네.
자네 정원의 사철나무는 여전히 푸르겠지. 탱자나무는 아직도 소피간에 그대로 자라고 있겠구만. 우리 함께 심었던 그 탱자나무도 이제 우리처럼 노장이 되어있겠군. 항상 푸르른 사철나무도 겨울이면 조금 그 빛을 잃어야 한겨울을 이겨낼 수 있듯이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오래 버틸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네. 나이가 들면 순해지는 것이야 공자께서도 종심(從心, 70세) 이후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주시지 않으셨나? 마음이 하는 대로 무슨 일을 해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그런 삶. 이제부터 그런 삶을 살아보세. 투병 중에 꼭 이겨내시게.
1991년 6월 28일
영어(囹圄)에서 돌아와 서울 한 동리에서 칩거 중인 벗,
이진수 배상.
눈물을 타고 할아버지와 이진수 씨의 어제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 갔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의 시대를 살았던 시대의 희생양이 갑자기 늘 푸르른 상록수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내 할아버지, 사다예의 외증조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의 주인공 두 사람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측은(惻隱)지심이 인(仁)의 시작임을 안다면 두 분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덕을 이룬 성인임에 틀림없었다.
오후 4시 동네 리버 스카이 미용실에 가서 시원하게 이발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머리가 조금 무겁다. 도연이가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저녁을 먹으러 처가로 간다. 재원은 기분이 좋은지 해맑게 웃으면서 말한다.
“아빠, 막걸리 먹어! 할머니가 고기 삶았어.”
내가 장난스럽게 인상을 쓰자 이내 재원이 말투를 바꾼다.
“아빠, 막걸리 먹어요! 할머니가 고기 삶았어요.”
장인, 장모도 웃고 퇴근 후 바쁘게 샤워하고 저녁 준비하느라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해 머릿결이 더욱 섹시해 보이는 아내도 웃는다. 오후에 군것질을 해서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대고 막걸리 두 잔과 돼지고기 수육을 서너 점 먹었다. 재원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아빠 슐 먹어?’ 하던 녀석이 ‘아빠, 슐 먹어!’로, 다시 ‘아빠, 슐 먹어.’에서 ‘아빠, 슐 먹어……’로 진화하더니 이제는 모든 술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마시는 술에 한정되지만 나름 정확하다. 막걸리, 맥주, 청하, 정종, 소주(참이슬, 처음처럼도 구분한다.)에 양주와 와인까지 다 구분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다. 아내는 탐탁해 하지 않는다. 어쩌랴? 일찍이 중시조 이후 7대조 서하공(西河公) 임춘(林椿) 할아버지께서 술을 의인화 한 가전체 ‘국순전(麴醇傳)’을 쓰시면서 이미 시작한 우리 가문의 DNA가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을. 아내는 업보라고 하겠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느끼는 순간이다.
밤에 아내와 도연, 재원이 잠 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혼자 밖으로 나가서 집 앞 범이 준이 순댓국집에서 술 한 잔 하고 술김에 고향 집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받았다. 혹시 할아버지 친구 이진수라는 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난 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며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 분이 보낸 편지를 아느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서 얼버무렸다. 나의 궁금증은 폭발 직전에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온 이진수 씨의 편지는 어디에 갔을까? 술기운으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궁금증은 생각보다 빨리 밝혀졌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전화를 해왔다.
“네가 어제 말한 이진수 씨의 편지, 할아버지와 함께 산소에 묻혔다. 할아버지 유언이셨다. 그 분의 편지를 꼭 함께 묻어달라고 하셨다. 전후 사정이야 네가 더 알고 있는 것같아서 전후사정은 말하지 않겠다. 그런 시대였다. 두 분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돌아가셨지만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짐이자 업보였을 게다. 할아버지는 이진수 씨가 보낸 용서의 편지를 저승 노자로 삼고 싶어 하셨을 거다.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직장 다닐 때 내 모습 다 보이고 살지 않았다. 자식들이 제 아버지 힘든 거 다 알면 위축될까봐 여유 있는 척하며 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자녀에게 부모의 속내를 다 알게 하는 게 이 시대라지만 우리 시대에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이라는 건 가족 모두를 먹여 살려야 하는 업을 진 사람이란 뜻이었으니까. 너희들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걸 공개하는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도, 이진수 씨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잘 지내라. 감기 조심하고 애들 잘 키워라.”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다 아버지가 한 마디 덧붙였다.
“참, 세종시 개정안 통과하고 공사 재개되면, 우리 동네도 공사가 진행될 테고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산소도 이장을 해야 할 거다. 아마 그때 그 편지도 잠깐 세상 구경을 하겠구나. 그렇다는 얘기다. 잘 살아라!”
수화기 저편에서 전화 끊는 소리가 슬프게 들렸다. 아, 아버지란 이래야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게 이런 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