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28. 용사론과 신의론

madangsoi 2014. 7. 13. 01:23

3일 후 5교시 국어 시간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는 수행 평가지를 나누어 주었다. 문제는 없고 2008학년도 국어과 1학년 2학기 수행평가라는 제하에 학년, 반, 번호와 성명을 써넣게 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서른 칸 정도의 빈 칸으로 이루어진 수행평가지가 각자에게 나누어졌다.
선생님은 먼저 준비해 온 이인로와 이규보에 대한 짤막한 내용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사(用事)론을 주장한 문벌 귀족 이인로와 신의(新意)론을 주장한 신진사대부 이규보의 삶을 집약한 부분을 통해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재구성해 보라고 말씀하였다. 곳곳에서 답답함을 머금은 푸념 섞인 한숨들이 섞여 나왔다.
  선생님은 오늘도 우리와의 논쟁 대신 바로 각자가 도서관과 인터넷을 통해 체화(體化)한 각자의 생각을 표현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이런 유의 수행평가였으므로 오늘의 국어선생님은 내 편이었다.
 
♣ 이인로(李仁老, 1152~1220) : 옛 사람의 문장을 갈고닦는 ‘用事(용사)’의 정신을 문학에 구현. 현실부정의 보수 성향 강해.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권력 장악했던 경원 이 씨의 후예.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칼날을 피함. 5년 후 환속하여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년)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구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음. 죽림고회를 결성해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했음.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음.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 문집이 여럿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아들 세황이 엮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이 있음.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 답습을 넘어 새로운 뜻을 표현. 현실 지향적 ‘新意(신의)’를 중시. 신흥세력의 자신감 보임. 막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음.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 삼혹호 선생(三酷好 先生)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두주불사,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함. 몽골군이 침입하자 진정표(陳情表)로 물리칠 정도의 문장가였음. 젊어서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서 출셋길에 오르면서 현실 비판력이 약해짐. 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등 그의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모두 정리되어 있음.

- 조현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논문] 부분.

문벌 귀족이었으나 무신란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승려가 되어야 했던 이인로, 5년 후 환속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차별 대우에 죽림고회(竹林高會)를 만들어 대표선수가 된 이인로. 죽림고회 멤버들 오세재, 임춘(林椿), 황보항(黃甫抗), 조통(趙通),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그리고 이인로(李仁老). 이들 중 가장 먼저 현실에 발길을 돌린 이인로는 보수 문벌 귀족의 대표 주자였다. 그리고 이규보는 문벌귀족 대신 지방에서 조금씩 개경으로 세력을 키우던 신흥사대부였다. 그런 그의 글은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하는 것이었으나 군벌 최충헌의 환심을 산 이후로는 비판적 문체가 사라지고 이를 민족주의로 변형하여 자주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이규보가 과거에 안주하려는 이인로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어선생님은 어떤 쪽에 더 많은 점수를 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이번만은 국어선생님이 내 편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다. 그래서 맘껏 내 생각을 펼쳐냈다.
 
이인로 : 이규보, 자네의 신의라는 것은 결국 과거를 버리겠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규보 : 글쎄요?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겠다는 것인데요.
이인로 :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자네는 젊기에 옛 것을 구닥다리라 하고 새것은 보석이라고 하는 겐가?
이규보 : 온고지신이라는 것은 옛 것과 새 것을 동등하게 보는 것이겠지요. 어느 쪽이 낫다가 아니라 어느 쪽이 현재에 더 필요한 것인가의 문제라고 보면 안 되겠습니까?
이인로 : 내가 이야기한 용사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규보 : 죽림고회가 이야기하는 용사는 화려했던 과거의 동경일 뿐, 그 안에는 새것에 대한 갈구가 없지 않았는지요? 저는 신의에는 옛 것과 새 것의 조화, 그리고 오늘에 바탕 한 내일에 대한 새로운 지향이 있다는 믿음 같은 것이지요. 이는 나이와 세대 차이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옵니다. 이만 저는 술이 과해서 자리를 피할까 하는데 용서하시지요.
이인로 : (쓴 웃음을 지으며) 그래, 자네의 참신한 식견이 부러우이. 종종 놀러 오시게.
이규보가 자리를 뜨자 이인로는 성에 못 이겨 술잔을 들어 폭주를 하기 시작했다. 임춘 등이 말렸으나 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바야흐로 이인로의 시대가 가고 이규보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실물화상기로 읽어들인 내가 쓴 글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의외라는 듯이 웅성거렸다. 국어선생님은 내 글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나와 정반대로 이규보의 신의론보다 이인로의 용사 론을 지지하면서 젊음이의 치기를 비난하는 회장 원세의 글이 프로젝트에 나타났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이인로의 기세에 젊은 이규보의 학문적 깊이가 바닥이 나는 대사가 오갔다. 바라보는 아이들의 반응은 감탄사와 함께 팽팽한 씨름이나 소싸움을 보는 것처럼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은 용사 론과 신의론을 대표하는 서너 명의 글이 올라오면서 서로서로의 이야기가 눈에서 눈으로 오가는 묘한 긴장으로 주었다. 말없이 눈으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100분 토론처럼 이인로 파와 이규보 파로 양분되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학업 성적이 상위권일수록 이인로 파였고, 중하위권은 이규보 파였다는 사실이었다.
첨예한 대립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이인로, 그 기득권을 빼앗고자 했던 이규보처럼 우리들의 교실도 기득권을 잡고 있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으로 갈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득권! 오늘의 주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실물 화상 기를 통해 그려진 화면을 프로젝트에 옮기면서도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1대 3 정도로 교실은 이인로 옹호파와 이규보 옹호파로 나뉘어 있었다. 상위권과 중하위권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으므로 교실은 오랜 만에 열린 교육의 장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열린 교육?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국어선생님의 자세에 따라 교실은 난장(亂場)이 될 수도 있었다. 야단법석(惹端)이 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여전히 국어선생님은 이 시간 내내 보여 왔던 모습 그대로 다음 화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팽팽한 줄다리기였으며, 끝없는 평행선처럼 보였다.
 
“용사와 신의, 두 창작방법론은 적어도 이들의 시대에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그것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관직을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 귀족 이인로가 보수적 용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 있게 내달리던 신흥 사대부 이규보는 신의라는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라이벌의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한 판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구세대가 새로운 현실에 대안을 마련하지 못할 때 패배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 중세 지식인을 부딪치게 했던 용사와 신의에 대한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대에 있어 우열은 분명했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이규보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화면을 읽어 내려가는 우리들의 입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긴장감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교실 뒷면의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준비한 다음 화면을 보여주었다.
 
“마, 본래 한문학은 정해진 틀이 있는 규범적 문학이기 때문에 용사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 하지만 용사만으로 창작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규범적 한시에서나 자유로운 현대시에서나 새로운 뜻의 표현, 새로운 의미의 발견은 시의 당연한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가 용사만이 아니라 신의를 말했고, 이규보가 신의만이 아니라 용사를 언급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와, 하는 탄성보다는 아직도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국어선생님에 대한 불만이 양측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듯했다. 국어선생님은 다음 화면을 제시하고는 수업을 마쳤다. 조금은 김이 새는 듯했지만 양 쪽 모두에게 불만을 남기고 서로의 입장을 지지 하지도,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을 부정하지도 않는 완전한 중립이었다.
 
“마,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인로가 용사를 강조하고 이규보가 신의를 중시한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들어간 문이 아니라 나온 문이고, 나온 문의 차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세계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용사 론과 신의론을 배우던 그 시간이 아직도 여운처럼 남아 있다. 국어선생님이자 담임선생님의 열린 시각이 참 좋았다. 이규보의 신의론에 가까운 선생님이었지만 이인로의 용사론도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사상이라는 거,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시대적 상황이나 개인적 상황에 따라 전략은 그대로 두면서도 전술적 변형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진화하고 있다. 신의라는 창조적 글쓰기를 하기 위해 용사라는 답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용사론과 신의론을 배웠던 국어 시간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