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남자답게 사는 법
오줌 싸지 않기 늦잠자지 않기 남자답게 그렇게
말썽피지 않기 허풍떨지 않기 남자답게 그렇게
크게 한번 웃어봐 멀리 앞을 바라봐
나 혼자면 어때하고 생각해 남자답게 그렇게
술 마시지 않기 방황하지 않기 다짐했던 나지만
앞에 가는 연인 너무 다정해서 내 마음이 흔들려
나에게도 한 때 사랑했던 여인 추억들도 많지만
내 곁에선 이미 떠나간 지 오래야
지금 이 순간 내가 슬퍼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위로해줄 사람 없잖아
앞만 보고 걸어가 멀리 앞을 바라봐
내 모습이 성공으로 빛날 때 사랑해도 늦지는 않아
크게 한번 웃어봐 멀리 앞을 바라봐
나 혼자면 어때하고 생각해 남자답게 그렇게
김범용 작곡, 이건우 작사, 김란영 노래의 ‘남자답게 사는 법’을 듣는다. 김밥천국에서 ‘잊혀진 계절’의 가수 이용이 부르는 ‘남자답게 사는 법’의 가사가 참 재미있다. 아니 S 오일 광고의 송강호같이 슈퍼맨이 되어야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일그러진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욕지기가 나온다. 어제 달린 술자리에서의 피로감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정비소에서 내장을 청소하고, 새로운 엔진 오일을 넣은 자동차처럼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기분이 업 되는 느낌이다. 가슴 속에 쌓아둔 뒤끝을 한 주머니씩, 주제별로 꺼내서 마음껏 내팽개치는 희열은 술자리의 미덕이다.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조직의 섭리, 아니 습성을 절묘하게 내던지는 미덕이 여기에 있다. ‘내 모습이 성공으로 빛날 때 사랑해도 늦지는 않아. 크게 한 번 웃어봐. 멀리 앞을 바라봐. 나 혼자면 어때하고 생각해 남자답게 그렇게’라는 가사가 여운처럼 다가온다. 내 모습이 성공으로 빛날 때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 하지만 현재는 그럴 수 없다는 자괴감이 묻어난다. 경제적 능력 없이 결혼을 서둘러 했다가는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빠질 것이 분명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노랫말. 대중가요를 들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는 동일시(同一視)! 특히 1인칭의 서술자, 아니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자신의 분신처럼 느끼지는 것은 당연지사. 동일시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대리만족하려는 모습이 참으로 가상하다.
‘사표를 날려라 내일 아침까지만 나에게는 모닝 케어가 있다!’ 라는 광고처럼 대중가요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물론 미디어와 텔레비전 매체, 인터넷 매체의 흡입력도 마찬가지다. 불특정 다수의 비애, 대중(大衆)의 고립을 이야기하는 노랫말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고독한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대중매체의 세계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아무리 상업적이라고 해도 대중은 미디어의 자극성에 귀와 눈과 가슴을 맡기고 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퇴근하며, 깔끔하고 완벽한 복장과 말투는 남자를 더욱 남자답게 만든다. 여자 친구와 데이트할 때 먼저 계산을 하고 포인트와 판촉행사의 모든 혜택은 여자 친구에게 양보하는 것이 남자의 미덕이고 센스가 된 지는 오래다. 쪼잔 한 남자는 남자답지 않은 것이다. 남성 인권보장 위원회, ‘남보원’은 그저 웃자고 하는 말일 뿐이다. 박성호와 황현희의 애드립은 남자답게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꽃다발은 기본 옵션! 곰 인형은 부록이냐? 바라는 게 없다더니 그 표정은 무엇이냐? 네 생일엔 명품 가방! 내 생일엔 십자수냐? 정성 따윈 필요 없다! 같은 가격 선물해라!”(황현희)
“여성 여러분, 자동차 있는 남자 친구만 골라 사귀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사실, 우리 남성들 차가 있어도 고생, 없어도 고생입니다. 차가 있다 하면 그 순간부터 대리 기사 노릇 해야 되고, 없다 하면 무시합니다. 자기 친구들한테 소개도 안 시켜 주고.”(박성호)
양념장처럼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이 버무려진 세상에서 슬픈 일들을 기쁜 일들로 만들어주는 센스. ‘남보원’은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남성들의 위트 섞인 풍자다. 소심한 구호로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고발하는 성토가 줄을 잇는다.
방청석에 앉아있는 연인들! 박성호와 황현희 그리고 신인 최효종의 북 장단에 맞추어 공허한, 남자답지 못한 구호를 들으면서 즐겁게 웃고 있다. 이어서 볼멘소리로 객석의 남성들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앞에 있는 남성들에게까지 궐기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어물쩍, 어슬렁어슬렁, 쭈뼛쭈뼛 여자 친구의 눈치를 보며 일어선 남성들은 ‘남보원’의 야무진 구호를 어색하게 따라하지만 왠지 표정만은 비장해 보인다. 남자답게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에 대한 묘한 동정심의 발현일 것이다. 아름답지만 남자답지 못한 현실에의 순응을 강요받는 남성들의 자기발현이 이루어지는 현실풍자 개그의 결정판이다.
1억 원이 없으면 결혼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24평짜리 전세가 최소 1억 원이다.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집 문제는 당연히 그의 몫이다. 1억 원? 모두가 억, 억 하는 세상이지만 사실 적은 돈이 아니다. 직장인이 아껴 쓰면서 5년 이상은 모아야하는 돈이다.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하면서 쪼잔 한 남자가 될 수는 없다. 10여 차례나 되는 기념일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벤트를 할 수는 없다. 결국 사랑하는 이를 붙잡아 두기 위해 지출되는 비용으로 인해 저축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빈익빈! 빈곤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아버지의 재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그도 결국 남성이다. 그는 자녀 교육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장만한 집 한 채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지청구를 감내해야 한다. 가족사진 속에 없던 한 사람. 항상 가족사진 밖에 있을 수밖에 없던 한 사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고 직장을 위해 충성을 다했던 한 사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3억 원 정도의 저당이 필요하겠다. 생명보험 하나 들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집 한 채와 적금, 연금, 그리고 보험금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살을 뜯어 먹으면서 성장하고 가족을 구성한 아들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야 한다. 가시고기만 불쌍한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남자들이 애처로운 이유다.
자, 그럼 생명보험 하나 들어 볼까?
문제는 누군가 이 남자에게서 숟가락을 빼앗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죽는 것도 어렵다. 남자답게 사는 법, 참 쉽죠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