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슐 먹어(임흥수, 장편소설)

25. 내 인생의 오후 3시

madangsoi 2014. 7. 13. 01:19

고담덕(高談德), 18세에 고구려 태왕의 자리에 올랐다. 남북으로 4천 리, 동서로 6천 리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중국 한족의 만리장성을 넘어섰던 정복 군주 영락태왕. 그의 나이 39세에 나라를 버렸다(기국(棄國))는 기록에서 모티브를 삼아 두절(頭切 ; 머리를 자른다)이라는 서술자를 내세워 개연성 있게 만들어낸 팩션, 대하소설 [신비(神秘)]. 서술자인 두절이 광개토 태왕에게 ‘머리를 바친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름인 ‘생유’를 버린 이유는 각별하다. 흑수 말갈에게 숨이 끊어진 족장 부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 아래에서 숨을 죽이며 식어가는 생유, 아니 두절을 살린 사람이 바로 태자 담덕이었다는 설정은 비장하다.

평생을 왕의 호위무사로 살면서, 아니 죽은 어머니의 빈 젖을 빨면서 살아난 두절은 여러 모로 태자 담덕과 닮았다. 태자 담덕 역시 고국양왕 이련이 왕이 되기 전, 백제 땅에서 백제 족장의 딸,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가족 중 남자는 목숨을 잃고 여자는 모두 노비가 되었으며, 담덕의 어미는 담덕을 잉태한 채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동굴 속에서 미쳐가면서 담덕을 낳는 대목은 더욱 비장하다. 담덕은 동굴에서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면서 생을 연명하다가 외할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 이련에게 넘겨진다.

외할아버지에 의해서 고구려로 넘어온 담덕은 고구려의 태자가 된다. 후사가 없는 큰아버지 소수림왕과 고구려 전사인 아버지 고국원왕 이련의 손에 의해 문무를 겸비한 최강의 고구려 싸울아비로 자란다. 살아서는 영락 태왕(永樂太王)이요 죽어서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되었다. 광개토 태왕을 두려워했던 중국과 변방의 나라들은 그를 안(安)이라 불렀다. 무신(武神) 광개토 태왕이 평안하게 고구려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그들의 반어적 명명법이었으리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아들 장수왕 거련(巨連)에게 왕위를 넘기고, 나라를 버리고(棄國) 그가 가고자 했던 길은 무엇인가?

천하를 얻은 태왕에게도 불가능이 있었다. 그것은 태자 시절부터 사랑해온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 사랑 때문에 고뇌하고 번민할 까닭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 여인이 백제 출신의 서출 신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서술자 두절에 의해 쓰인 소설이지만,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 원래부터 광개토 태왕과 진초영의 사랑은 비운의 결말을 향해 치달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제패한 광개토 태왕은 아직 젊은 39세였다. 사랑을 포기하기에는 무척 이른 나이였다! [남자의 향기]로 세인을 사로잡았던 작가 하병무의 ‘사랑의 기술’이 참으로 탁월하다.

서른아홉 살!

인생의 오후 3시같은 이때에 광개토 태왕은 고구려에서 유이(唯二)한 두 사람을 위해 한 나라, 아니 한 세계를 버리는 용단을 내린다. 태왕이기에 자신이 사랑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여인 진초영. 그녀를 위해 평범한 한 남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사내가 되었다. 부유한 자의 재산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던 태왕, 권력자의 힘을 피지배자에게 나누어주었던 황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아가면서 밖에서 가져와서 안에 나누어주었던 황제! 영락(永樂) ; ‘영원한 즐거움’을 그는 재위 기간에 만백성과 함께 누렸고, 태왕의 자리를 버린 이후에는 한 여인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린 진정한 남자였다.

고구려 백성 중에서 광개토 태왕으로 인해 불행했던 또 다른 한 사람, 이 소설의 서술자 두절. 그는 왕의 친구이자 형제요, 호위무사이며 한 여자를 두고 함께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했던 불행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이 역사적 사실, 역사적 허구 사이에서 인생의 오후 3시에 다른 길을 걷는 태왕의 길을 열어준 벗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태왕의 거짓 무덤을 지키는 능지기로 살다가 [무신비결(武神秘訣)]을 남기고 왕의 무덤 옆에 묻힌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고구려 옛 땅 집안(集安) 땅에서 [신비(神秘)]롭게 재탄생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참으로 그가 부럽다. 광개토 태왕의 선택을 어떤 범인(凡人)이 따라할 수 있을까?

하루의 오후 3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조금은 늦은 시간.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는 시간이 꽤 남아있는 것같은 순간.

인생의 오후 3시!

서른아홉. 이제 마흔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아니,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마흔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철밥통 공무원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환경미화원! 쉽게 떠올린 직업. 아마도 바바 하리 다스가 쓰고, 류시화가 옮긴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명상 서적 탓일 것이다.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던 때에, 일본 큐슈(九州)에 아내와 도연과 함께 한 해외연수에서 구체적인 꿈을 꾸기도 했다. 아내는 가능하면 해도 좋지만 이라며 훗입맛을 남겼고, 맏이 도연은 안정적인 환경미화원보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더 매력 있다며 말렸다.

2009년 2월의 어느 토요일 도연이 학교까지 동행하다가 추운 날씨에 힘겹게 청소차 위에서 무진(霧津)같이 짙은 입김을 몰아쉬며 일하는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도연이 고갯짓으로 청소차를 가리키며 귀엣말로 조그맣게 말했다.

“아빠,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봐! 저것 봐. 얼마나 춥겠어? 그리고 얼어붙은 청소차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어? 저 모습을 보고서도 아빠가 환경미화원을 하겠다면 아빠 학교가 정말 힘든 곳이란 반증이겠지?”

어른스럽게 말하는 앙증맞은 입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혼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실 인터넷을 통해 조사해보기는 했지만 환경미화원이라는 게 모두가 공무원 신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구청에서 위탁받은 용역업체의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말 그대로 비정규직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환경미화원 선발 기준이었다. 특히 여성은 원더우먼을 뽑기라도 하는 듯 힘세고, 빠르고, 체격 조건까지 상당한 수준의 요건을 갖추어야 했다. 물론 필기시험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국가고시, 공무원 시험!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인 시대에 고학력을 가진 이들이 몰려든다는 환경미화원 시험. 응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몸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0킬로그램짜리 모래 자루 메고 빨리 달리기에서부터 윗몸일으키기와 같은 체력장을 통과해야 한다. 오래달리기와 같은 지구력을 요하는 것에서부터 순발력을 요하는 단거리 달리기까지 있으니 웬만한 사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우수한 인력 뽑기는 결국 공무원은 정년이 보장되는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도연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자꾸만 철밥통 공무원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현실에 대한 불만보다는 현실에 대한 불안 때문임에 틀림없다.

마흔 살이 된다. 서른아홉과 마흔, 단지 한 살 차이일 뿐인데 왜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철밥통 공무원과 친구가 되는 거다. 웃긴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하지 않는가? 공무원 친구를 만들고, 그와 친교하다 보면 공무원의 장단점을 낱낱이 알지 않겠는가? 공무원과 친구 되기는 시작되었다.

철밥통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