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겉모습에 속고 속이는 1Q84(무라카미 하루키, [1Q84]에 대한 단상)
야나체크와 심포니에타, 그리고 주차장에 버금가는 수도고속도로!
1926년에 발표된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조국 체코에 대한 좌절과 아픔을 작곡가 자신의 가슴 아픈 경험에 바탕 한 자기애에서 창작된 음악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26년은 다이쇼 천왕에 이은 소화 천왕이 등극한 해이다. 소화 천왕은 누구인가? 바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하와이를 포함한 전 세계의 절반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전쟁 원흉이다.(아니, 보기에 따라서는 전쟁 영웅이기도 하겠다.)
스타일리시한 암살자 아오마메(靑豆 ; 푸른 콩)는 약속시간(청부 살인)을 지키기 위해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택시기사에게서 소개받는다. 운명처럼 스쳐가는 낯선 경찰복과 낯선 권총은 1984년과 1Q84년의 묘한 대립상의 복선이다. 수학천재이면서 생업을 위해 유도를 선택한 덴고(天吾)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설가를 지망하는 청년이다. 이 두 사람, 아오마메와 덴고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1Q84는 소설이 가지는 개연성과 허구성의 중요한 모티브이자 플롯이다.
패럴렐 월드(Parallell World ; 같은 3차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공간을 의미)로서의 현재(1984)와 또 다른 현재(1Q84) 사이에 벌어지는 현실 공간과 쾌락 공간의 절묘한 배치로 서서히 숨겨놓았던 복선과 익명성을, 구성과 개명성으로 바꾸어가는 하루키 문학의 전형이면서 동시에 치밀한 묘사가 소설의 전개를 미친듯이 따라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일본인과 일본인의 세계관이라는 데에 이르면 한국인과 한국인의 세계관과의 깊은 골짜기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공통점을 만나면서 소설은 1Q84의 늪에 빠져 판타지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
수도고속도로에서 만났던 택시기사의 조언은 이 소설의 바른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플롯이다.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 뿐입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부분.
하지만 1, 2부 1250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의 섬세하고도 엄청난 묘사와 서사, 그리고 설명과 대화, 이 숲에 빠지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집중하게 된다. 아니면 그 반대에 빠지기도 한다.
덴고 아버지의 삶을 통해 일제의 동만주 철도부설과 만주 개발의 역사를 볼 수 있고, NHK와 자민당 보수 정권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든가, 노부인을 모시는 다마루를 통해 재일 조선인의 문제(흑인 혼혈에 대한 문제 제기)에도 다가설 수 있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대하소설 내지는 역사소설의 범주라는 확대 해석도 가능하다. 하루키의 객관적인 시각은 한국 독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1960년 세대로서의 일본에 대한 비판성에 연관을 두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버지 후카다 다모쓰의 권유로 여명을 탈출한 후카에리(후카다 에리코)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인류학자인 에바스노 선생의 보육을 받게 된다. 후카에리의 [공기 번데기]라는 어설픈 문체의 소설, 하지만 기발한 창의성이 발하는 작품을 둘러싼 덴고와 편집장 고마쓰의 일탈! 고마쓰의 인위적인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빠져버린 작가 지망생 덴고, 그리고 디스렉시아(난독증)을 앓고 있는 후카에리!
다카시마 학원의 좌익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시작된 선구(先驅)의 코뮌 운동. 명상과 환경에 집중하는 선구와 무투파(武鬪派) 여명(黎明). 어쩔 수 없는 상상의 차이는 그 둘을 분리시킨다. 이후 무투파(武鬪派) 여명은 무장 투쟁의 근원지로서 경찰에 수색을 당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 무장(武裝)을 한 채 경찰과 대치하다가 자위대에게 철저하게 파멸, 참살된다. 그렇지만 선구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종교 법인으로 옷을 갈아입음으로서 생존하게 된다. 겉으로는 철저한 고립 생활을 시작함으로써 법망을 피한다. 그러면서 사이비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리더’와 ‘리틀 피플’로 비유되는 그들은 동정녀와 닮은 무녀가 리더에게 성은을 입어야한다는 광기를 보인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성(性)과 성역할에 대한 문제는 흥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사회 전체가 가지는 성의식의 잘못된 관습을 고발하기도 한다. 노부인과 다마루의 성범죄에 대한 단죄는 치명적이다. 아오마메의 ‘아이스 픽’은 무서운 여전사 아마조네스의 다른 표현이다.
경찰인 오빠와 경찰인 삼촌의 성폭력 때문에 깊은 상처를 가슴에 묻고 있는 여경찰 아유미의 일탈과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란스러움과 공포를 동시에 발현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아유미 삶의 두 모습. 여경찰로서 성교육을 하는 모습, 그리고 밤의 여자로서 아오마메와 함께 도쿄의 밤을 즐기는 모습은 압권이다.(내가 남자 독자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한 살 반 나이에 뚜렷한 기억으로 남은 덴고의 어머니. 다른 남자에게 젖을 내맡기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스물아홉 살 나이에 서른 살의 유부녀 야스다 교코와의 일주일에 한 번씩의 낯선 외도는 성 폭력 피해자의 두 얼굴에 가깝다. 실제로 성폭력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자행되어진다고 한다. 또한 성폭력에 대한 동양적 가치관에서 서양적 관습으로의 변화이다. 성폭력의 가해자(남성)보다 피해자(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남성 중심의 성가치관은 그래서 무섭다. 동양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성폭력의 정당화는 이른바 ‘나영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아오마메의 유일한 친구였던 다마키의 가정사. 배 안의 아기와 함께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다마키를 위한 복수는 아오마메의 ‘아이스 픽’을 만들어낸다. 친구를 위한 복수는 폭력의 가해자인 남성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단죄로 이어진다. 알고도 짓는 죄, 몰라서 짓는 죄, 후카다 다모쓰(리더)의 목숨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아오마메는 순간적인 성폭력에 대한 혼돈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이건 성폭력은 용서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단호히 이야기 한다. 리더의 목숨을 제거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사랑하는 남자, 덴고의 목숨을 구하는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권총을 입에 물고 비밀을 발설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남성에 대한 동경, 닌자(仁者)로서, 아니면 사무라이(남성)에 대한 동경이다. 또한 일본인의 평등성에 대한 남녀평등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다시 수도고속도로 비상계단을 찾아가다가, 1984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아오마메, 권총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함으로서 영원한 사랑 덴고에 대한 사랑을 완성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장은진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우연히 읽었다. 아니,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그리움에 읽었다면, 장은진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우연히 읽었다. 그 두 작품의 연속선상에서(영향 여부는 조금 다르고, 영향 관계도 다르겠지만) 정말 재미있는 작품을 읽었다는 생각을 한다.
덴고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헤어진 고양이 마을은 그리움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알고도 덮어야하는 비밀이 있다. 내부 고발은 파멸이다.(동양,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기로 한다. 여운과 암시에 의한 결말은 참 허전하다. 이게 무슨 싱거운 결말인가 하고 1250페이지를 마무리 한다. 허탈하다. 엉뚱하게 세 작품에 등장하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싶어진다. 꿈과 이상, 그리고 현실의 갈등을 비판적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달과 6펜스], 그리움은 또 다른 독서를 부추긴다.
[1Q84](문학동네, 2009) 2권 578페이지에서 나는 이 소설이 왜 이렇게 많은, 일본과 한국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는가 하는 단서를 발견하였다. 왜 그렇게 결말이 허하게만 보였던가? 하는 의문이 한 순간에 풀리게 해 준 키-워드!
게다가 내게는 아무래도 리시버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 것같다, 고 덧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이 쓰고 있는 픽션의 세계에 실제로 빠져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여기서 시작할 수는 없다.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는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부분.
마더(Mother)와 도터(Daughter)로 대변되는 공기번데기는 없다. 아니 아버지의 요양소에서 깨달은(발견한) 공기번데기는 죽음과 삶의 양면성이다. 삶을 포기한 아버지가 누워 있던 침대에 1미터 3, 40센티의 움푹 팬 자국에서 찾은 공기번데기! 그 속에 그리도 마음속으로만 찾던 아오마메가 보였다는 대목의 상징은 뚜렷한 현실이다. 1Q84에서 1984로의 복귀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다.
궁금한 점은 소설 속의 픽션으로 남길 일이다. 공기 번데기와 리틀 피플, 그리고 리더(후카다 다모스)에 대한 후카에리의 선문답같은 묘사는 소설을 더욱 안개 속으로 몰아간다. 무진(霧津)이다. 1Q84다. 하지만 현실로서의 1984에만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역사의 끊임없는 진보다. 역사는 마더와 도터의 싸움이다. 선구와 여명의 싸움이다. 그들과 보수의 싸움이다.
여전히 1960년대 세대로서의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도 아오마메처럼 자살용 권총을 준비하고 있을까? 겉모습에 속고 속이는 1Q84년이 아니라 겉모습에 속고 속이는 1984년이다. 오랜만에 장편의 숲에 빠지고, 그 숲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게서 그리움을 맛보았다. 참 달콤 쌉쌀한 2009년이다. 아니다. 200Q년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찾는 사랑은 지금 관악구 서원동 409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