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멍에
사람들이 만든 것!
도구! 그 중에서 물질적 도구, 정신적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그것은 아마도 제사(祭祀)처럼 죽은 다음에 간절히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강요하는 것만큼 집착에 가까운 자기 합리화는 드문 것같다. 대단히……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것들에게 발목을 잡혀 산다. 그건 멍에다. 소의 모가지와 등줄기에 채워서, 코뚜레와 함께 작용하여 거구의 소를 지배하는 도구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도구들에 의해 굴종의 멍에를 쓰고 산다.
한 사람이 큰길 한복판에서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세 사람이 모여 한 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자 사람들이 한두 명씩 관심을 보이면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 함께 세 사람이 보고 있던 한 곳을 바라본다.
이것을 동조현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사회 현상에 대입을 해보면 재미있다. 앞서의 세 사람은 일반적인 세 사람으로 비유했지만 실제는 평판이 좋은 소수의 사람이다.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다수가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의 진술과 동조를 통해 축적되고 미화되어 전달된 정보,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열망의 증거이다.
이처럼 동조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이견을 내지 못하게 한다. 소외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교묘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들은 무리를 만든다. 당(黨), 파(派), 족(族), 벌(閥). 친(親)과 불친(不親)의 경계를 만든다. 이러한 당파와 족벌을 놓고 경계하는 자가 바로 리더다. 밀고 당기기에 능한 자, 그가 지도자다. 그는 왕이고, 그는 황제인 것이다.
전쟁도 불사하지만 평화를 항상 내세운다. 경찰국가로서의 지위를 지니려고 한다. 그건 영향력이다. 최근 유행했던 드라마 [선덕여왕]의 전개 역시 당파와 족벌의 다름 아니다. 가야계를 등에 업고 득세한 김유신, 그 김유신을 등에 업고 여왕이 된 덕만, 선덕여왕은 이제 김유신에게서 가야와 복야회를 떼어내려 하고 있다. 더 이상 가야계가 필요 없는 선덕여왕에게 김유신은 또 다른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이제 김유신은 가야계와 복야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금관가야계의 신라 토착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냥 포기할 수도 없다. 그의 정적 비담과의 정치적 다툼 속에서 선덕여왕에게 힘을 보탬으로서 가야계를 살리면서 복야회를 죽여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정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직장을 포함한 소속 집단은 항상 멍에를 씌워서 선택을 강요한다. 리더는 항상 선택을 강요한다. 리더가 원하는 선택에 반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리더는 선택의 순간에 찬반 두 가지를 내놓는다. 하지만 거기에 반대는 존재할 수 없다. 찬성이 있을 뿐이다. 그 찬성 안에 반대가 있다. 반대하지만 반대할 수 없음을 눈물로 감내하면서 찬성하는 척하는 방법밖에 없다. 반대는 퇴출이다. 반대는 쓰디 쓴 패배일 뿐이다.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처럼 항민(恒民), 원민(怨민), 호민은 언제나 함께 살고 있다. 항민은 반대를 감내하면서 찬성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대다수의 우리들이다. 여기에 원민은 비공식적으로만 불만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혼잣말처럼 세상을 욕하고 비판한다. 어쩌리까?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리더를 안주삼아 씹을 뿐이다. 사표를 던진다, 내일 아침까지만. 나에게는 그저 술기운에 리더를 욕하는 정도다. 호민(豪民)! 이들은 세상의 불만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이랑에 올라가 원민을 선동하는 선동가다. 역사 이래에 딱 두 명이 있었다고 한다. 견훤과 궁예! 하지만 오늘날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호민이라고 자처한다. 정치를 하는 이들이다. 원민의 불만을 폭발시키고, 원민과 함께 민중 봉기를 불러일으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항민을 부추겨서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라며 매 선거 때마다 원민과 항민을 부추기지만 결국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대부분 세 번 이내에서 그들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난다. 미디어의 힘도 결국은 한 번 이상의 정치 혁명을 불러내지 못한다.
김치를 담그고,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면서 민생정치를 표방하는 근래 정치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다. 두 번 이상 호민을 자처하는 자들은 없다. 한 번 기득권을 갖게 되면 호민은 더 이상 호민이 아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원민일 뿐이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수업을 마치면 집보다는 몇 사람 직장 동료 붙잡아 술자리를 하고 싶다. 하지만 엄처시하(嚴妻侍下)로 돌아가야 한다. 혁명을 꿈꾸는 호민은 결국 혁명의 날을 위해 오늘은 깊은 숲속에서 잠을 자거나 자숙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오늘 집으로 간다.
야간 수업을 마치고 오랜만에 회식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워킹 맘! 새로 아파트에 입주한 워킹 맘 나세연 선생님에게 지나는 소리로 집들이 겸해서 회식을 하자고 했더니 선뜻 수락을 한다. 그래서 회식비로 집들이를 겸하기로 했다. 야간 수업 끝나고 도착한 아파트 거실에는 조촐한 회식상이 차려져 있다.
우리 부서 회식이지만 다른 부서원도 몇 명 함께 했다. 간단하게 술술 잘 풀리라고 화장지와 세제를 선물하면서 회식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조촐하면서도 화기애애한 회식이 진행되었다. 10시가 넘어 워킹 맘의 사부님이 나타났다. 전부터 아는 사이라서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
주인 부부가 술을 둘 다 좋아하는 지라 부군께서 부족한 안주를 시키기에 손사래를 쳤더니, 오신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단다. 그게 가풍이란다. 내가 본받고 싶은 가풍이다, 아내가 싫어하겠지만. 10시 30분이 넘은 시간에 족발과 치킨 안주가 오고 왁자지껄 술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고, 이야기가 오고 가고 가고 오는 시간이 가고 있다.
맥주도 흐르고, 소주도 흐르고, 간혹 양주도 흐르는 시간이 가고 또 간다. 주인 부부는 아예 자고 가라며 술의 양을 늘리고 마시는 속도는 빨라진다. 무지하게 달린다. 자꾸만 졸음이 다가온다. 졸음에 겨워 졸다가 자다가 새벽 2시 30분쯤 그 아름다운 자리를 나왔다. 외박 절대 불가를 주장하는 가풍에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택시를 탔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이 깼더니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다. 한강대교? 그것도 남에서 북이 아니라 북에서 남으로? 순간 잠이 깼다. 시간은 벌써 4시 30분이 넘어서 다섯 시에 다가서고 있었다.
“아니, 여기가 한강대교 아닌가요?”
“네? 아직도 술이 깨지 않은 모양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한강대교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고 있냐고요?”
“정말 기억이 안나요?”
“네, 본동 가자고 했는데 왜 한강대교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건너고 있느냐, 이겁니다.”
미터기는 벌써 4만 5천원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눈이 돌아가고 잔머리가 돌아서, 택시 기사를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가 희끗한 택시기사는, 그러나 흰머리에 비해서는 젊어보였다.
“나, 참. 들어봐요. 간단하게 말할게요. 3시 넘어서 손님이 신림 사거리 구로 방향에서 손을 들었어요. 그러더니 번동을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반대편에서 타라고 했더니, 막무가내 타면서 번동 가자는 겁니다. 글쎄 나중에 손님이 본동이라는, 그 신림본동을 저는 정황상 의심 없이 강북구 번동으로 알았죠. 제가 번동 사람이니까요. 내 불찰도 있었지만 손님도 신림을 빼고 본동이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허허, 참!”
순간, 하늘이 노래짐을 느꼈다. 한강대교를 이미 지나 상도터널도 지나고 있는 시간은 5시를 향하고 있었다. 미터기는 5만원을 막 넘으려고 하고 답답한 순간이 지나고 있었다.
사람 좋은 택시기사가 내 눈치를 읽었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올해 몇 살이우?”
“서른여덟입니다.”
“우리 큰 애랑 동갑이구만. 우리 애도 그렇지만 술을 좋아해서 가끔 별별 일을 다 하고 다닌답니다. 손님처럼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윗옷은 나뭇가지에 걸고 공원 벤치에서 자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한 번은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아리랑치기 아시죠? 다행히 술에 흠뻑 취해 있어서 지갑만 털리고, 카드로 한 오백만원 날리고 말았지만 잘못했으면 뻑치기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비명횡사할 뻔 했지요. 그 다음부터는 술은 집에서만 마셔요. 끊지는 못하겠대요. 술버릇만 빼면 버릴 것 하나 없는 녀석인데……”
훗입맛이 짠하게 전해온다. 비난이기보다는 자식같은 젊은이에 대한 가슴 따뜻한 조언은 10월의 청아한 새벽바람을 타고 찐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튼 번동을 다녀온 모양인데 택시비가 걱정되었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지갑의 두께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 시간에 벨을 누르고 택시비를 달라고 하면 아내는 난리를 칠 것이다. 사당에서 신림본동까지 택시비 5만 5천원은 상식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아, 어리광이라도 부릴까?’
‘아, 어르신 제 지갑 속에 3만원밖에 없는데 좀 봐주세요. 잘못 알아들은 어르신 책임도 있으니까요. 아, 돌겠네. 어르신, 제발 절 좀 살려주세요.’
속에 있는 말은 욕지기처럼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황은 택시기사가 나를 십분 이해한다는 태도였으므로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공중전화 박스 앞이라고 했던가요? 그래 지갑에는 얼마나 있어요. 5만 5천원은 없을 것같은데…… 한 삼만 원으로 할까요?”
새벽어둠을 뚫고 여명처럼 빛나는 택시기사의 그 한 마디에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홧홧 거렸다. 나는 들고 있던 지갑을 꺼냈다. 3만원 7천원이 있었다. 그래서 3만 7천원이 있다고 했더니 택시기사 아저씨 3만원만 받겠단다.
“됐어요. 신림본동을 번동으로 알아들은 내 잘못도 있으니 그 7천원으로는 음료수 하나 마시고 집에 들어가고, 출근길에 해장국 한 그릇 먹으면 되겠다. 자, 그럼. 서울 구경 한 번 신나게 한 동반자는 이만 갑니다. 학생들 잘 가르쳐요, 국어선생님!”
국어선생님? 아, 한강대교 오기 전에도 잠시 정신을 차렸던 적이 있었나보다. 사람 좋은 택시기사 덕에 집으로 향하는 새벽은 훈훈한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 택시기사가 밥벌이를 하러가는 뒷모습을 향해 마음속으로 큰절을 한다. 24시 편의점에 가서 따뜻한 꿀물을 2천원에 사서 마시면서 달콤했던 서울 야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준 이름 모를 택시기사님께 감사의 건배를 청한다.
‘고맙습니다. 많은 것을 배운 서울 야행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거든 아는 체 해 주세요. 맛있는 기사식당에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다음날 출근을 했다. 택시가사 말대로 해장국을 사 먹고 은행에서 현금을 조금 인출했다. 흐뭇하게 출근을 해서 어제 함께 귀가했던 강승엽 선생님과 어제의 퍼즐을 맞출 겸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잘 가기야 했지. 그런데 마, 서울 시내 한 바퀴를 돌았어요. 좀 같이 가지 그랬냐?”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제가 제 차로 광명 가는 방향에서 내려드리고 갔잖아요. 걸어서 한 정거장이라고요.”
“정말이네. 마, 그 택시기사가 신림 사거리 금천 방향에서 택시를 잡았다더니……”
“그럼요, 그때가 3시 10분쯤이었죠. 저는 운전하려고 술 안 마셨잖아요. 아,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 걸 그랬네.”
“마, 3만원에 서울 시내 일주를 했어요.”
“서울 시내 일주요?”
“마, 본동 가자고 한 모양인데 번동에 갔다가 왔대요. 서울 시내 북동에서 남서로 한 바퀴 돌았죠.”
“……?”
“마, 인상 좋은 택시가사 덕에 택시비 좀 합의 보고 울듯 말듯 귀가했다가 출근한 거죠.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서 잤나?”
“아마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강승엽 선생님에게 어제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는 그렇게 그날의 서울 야행은 마무리 짓는 듯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후 신이문 선생님이 내게 잊지 못할, 아니 믿지 못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글쎄, 그날 밤의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서울 강북구 번동(樊洞)!
왕조가 쇠락하던 고려 말 풍수지리와 도참설을 담은 [운관비기]란 책에 ‘이 씨가 한양에 도읍하리라(李王都漢陽)’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실은 마침 한양 삼각산 아래 지금의 번동 일대에 이 씨를 상징하는 오얏나무(李)가 많이 자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집집마다 울타리(樊)를 삼을 만큼 오얏나무가 무성한데다 ‘이 씨가 흥할 징조!’라는 말이 파다했으므로 왕실에서 ‘벌리사(伐李使 : 오얏나무 베는 관리)’를 두어 모두 베어냈다고 한다. 이로부터 이곳의 지명이 ‘벌리(伐李)’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벌리’란 발음을 ‘번리(樊里)’로 오해해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베다’의 벌(伐)을, ‘울타리’의 번(樊)으로 오해한 데서 시작한 번동의 지명처럼 발음의 오해로 시작한 사연 하나!
2009년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
신림 사거리에서 만난 건장한 사람. 술에 취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혀가 약간 꼬이는 말투로 행선지를 말하고는 이내 존다.
“번동이요!”
“강북구 번동이요?”
그 손님은 코까지 골면서 벌써 자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으니 길이 막히지 않아 한 시간 남짓 번동에 도착했다. 그리고 손님을 번동 네거리에서 내려주었다. 그런데 유턴을 해서 다시 시내로 나오려는데 예의 그 손님이 반대편에서 다시 택시를 잡는다. 얼결에 손님을 태웠는데 신림본동을 가잔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 오전 4시 40분쯤 깨어난 손님, 한강대교 건너다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한강대교 아니에요?”
“맞는데요?”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거죠?”
“아, 손님이 본동을 가자고 해서 갔더니, 맞은편에서 다시 택시를 잡기에 얼결에 태웠죠.”
“마, 미치겠네.”
미터요금은 벌써 4만 5천원을 넘고 있었다. 다행히도 미터기를 원래대로 하지 않아서 요금은 2만 5천원에서 연결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니, 제가 신림본동이라고 했잖아요?”
“네? 신림본동이요. 아니에요. 번동이라고 했어요.”
“신림 사거리에서 신림본동 가자고 한 거죠.”
“그럼, 신림본동이라고 하셨어야죠.”
“아니, 그게 당연히 신림동이니까 본동이라고 하면 신림 본동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죠.”
“하하, 참. 아무튼 젊은 분도 조심하세요. 제 아들 녀석도 술을 좋아하는데 가끔 그런답니다.”
“……”
막막한 그 손님의 모습. 하지만 날이 차차 여명의 빛으로 밝아오고 있고, 집에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미터 요금은 5만 5천원으로 치닫고 있다. 결국 택시기사의 선처로 3만원에 합의를 보았다. 소통의 단절에 대한 서로의 책임보다는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택시기사가 선심을 쓴 것이다.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한다. 술이 확 깼는지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는 길가의 첫 번째 골목으로 유유히 사라지더란다. 아니, 쏜살같이 사라지더란다.
라디오를 듣고 무척 재미있어서 친구에게 전했는데, 그 친구는 그 손님의 같은 학교 동료 신이문 선생님! 자신의 직장 동료 중에 술 좋아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가져다 대입했더니 꼭 맞아떨어지더란다. 그래서 다음날 그에게 이야기 해 주었더니, 그 선생님 하는 말!
“마, 비슷하긴 한데, 내 얘기는 아닐 거야.”
하더란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던지더란다.
“다음부터는 신림본동이라고 해야지!”
푸르게 웃는 그 손님, 참 귀엽다. 푸르게 웃던 그 손님 이제 걱정 없겠다. 관악구 신림본동은 개명하여 서원동이 되었으니 이제 이런 걱정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