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종족 보존 본능의 허와 실
무진(霧津)과 공지영, 그리고 지적 장애와 청각 장애!
김승옥의 무진(霧津)과 황석영의 삼포(森浦)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진(霧津)과 삼포(森浦)는 서울이라는 생존의 장에서 패배하듯이, 도망치듯이 쫓겨난 유배지의 다름이 아니었다. 자본에 의해 쫓겨난 강인호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묘하게 나를 괴롭혔다. 청각장애인 복지시설 자애학교와 자애원의 일그러진 모습은 장애아에 대한 성폭행이라는 중심 사건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자의 일방적 폭력 앞에 쉽게 패배하고 마는 무기력한 다수의 모습이 불행한 결말이라는 다소 정형화된 일련의 소설적 장치, 아니 일련의 현실에의 가늠쇠처럼 보여서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수화조차 못하는 청각 장애인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인 이강석과 이강복 쌍둥이 형제의 캐릭터는 참 우울한 상상을 하게 했다. 족벌 가계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전국의 불특정 사립학교의 소유자들. 그들은 자본에 의해 쫓겨난 이들, 아니면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쫓겨난 인간 군상의 본성을 철저히 정의와 사랑, 교육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유린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소설은 이야기 한다. 물론 학교만이 이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학교 역시 이윤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철저히 능력 위주의 잣대로 인사(人事)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충성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자아실현이라는 교과서적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는 순간, 그는 반동이 된다. 함께 융화할 수 없다면, 함께 동조할 수 없다면, 그래서 저항하고 절이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처참한 뒤끝을 감수해야 한다. 절에 소속된 이들의 야합으로 인해 그가 살아온 작은 실수들과 작은 약점들은 침소봉대(針小棒大) 되어 갈가리 찢겨진다. 강인호의 첫사랑처럼 말이다. 자의건 타의건 자신의 수결(手決)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된다. 함께 탄 절에 대한 내부 고발을 하는 순간 대한민국에서는 유배되고 만다. 아니 도태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라고 진실을 밝히는 순간, 그는 백 배, 천 배로 까발려져 광화문 앞에 목이 베어져 매달린 채 양심선언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연두와 유리, 그리고 민수와 영수의 성적 학대가 사건의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보수와 진보의 오래된 싸움을 보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보수와, 보수의 잘못을 찾아내 응징함으로써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진보의 부질없는 싸움. 하지만 권력으로 사건을 무마하고, 돈으로 진실을 살 수 있는 뿌리 깊은 보수의 가식적 미소 앞에서 무기력하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서유진과 최요한 목사.
무진고와 무진여고, 무진 교회는 자신만의 성(城)이 가지는 진실로,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내는 능력까지를 보여준다. 홀더! ‘홀로 더불어’를 통해 작은 저항을 보여주는 모습은 얼마나 가슴 아픈가? 결국 아웃사이더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작은 저항은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없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보여준다. 우리는 과연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는가?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의 경계에서 [도가니]는 독자의 감수성을 적절히 자극하고 있다.
강인호와 아내, 그의 딸 새미! 사업에 실패하고 가계를 위하여 무진 시의 짙은 안개 속으로 내몰린, 자본에 의해 쫓겨나서 자본에 의해 팔려간 강인호, 5,000만원의 학교 발전 기금을 들고 행정실장을 행정실에서 만날 때, 행정실장과 함께 있던 장하진 경사를 만나는 모습, 이러한 소시민적 모습은 얼마나 낯익은 모습이던가? 지금이라고 한 5,000만 원 내고 와 달라는 학교만 있다면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낯선 꿈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지만 그곳에서 제2의 자애학교를 만난다면 나는 또 후회하겠지? 인간의 본성, 성(性)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그것이 자본과 만날 때는 그 성은 그 본질을 잃고 만다. 가장 추한 자본의 성(性)은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강인호가 바위와의 싸움에서 ‘전관예우’라는 이름으로 패배하던 날, 그리고 계약이 해지될 때까지는 그래도 나는, [도가니]를 읽는 내내 학교에 충성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강인호가 무진으로 찾아온 아내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와 오랜 만에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종족 보존의 본능인가, 합법을 가장한 부부간의 자본주의적 섹스인가?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강인호가 서유진과 함께 그 새벽, 무진시의 민주화 운동 28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비민주적 청부 용역에 의해 폭력의 폭우를 맞는 순간에 처절한 희생양의 이름으로 붉은 선혈 낭자한 핏빛으로 남았으리라는 기대는 처참히 깨어졌다. 하지만 그 반전은 오히려 더 아름다운 서유진의 꽃으로 피었다. 그럴 용기는, 결국 가진 쪽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쪽의 몫이라는 것을 작가 공지영은 말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소외된 채 아픈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가진 것 없는 서유진의 삶은 더 이상 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용기라고 감히 판단한다.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은 뭔가 잃을 게 있기 때문이므로.
최요한 목사나 장하진 경사의 모습이 더욱 내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우리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 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며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시의원과 건설업자의 처남이, 운전면허시험장 직원과 병원장 사모님이, 룸싸롱 마담과 경찰서장이, 밤무대 무명 가수와 외로운 사모님이, 유부녀와 목사가, 교수와 교재 출판업자가, 시교육청과 입시학원 원장이 서로를 봐준다며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해대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 번만 눈 감아 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 - 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 - 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 공지영, [도가니](창비, 2009) 부분.
장하진 경사가 서유진에게 하는 이 충고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관예우는 강남에 사무실 한 채와 집기 일체를 약속받고 ‘그 나름의 사회정의를 위해 농아들 몇을 희생시키는 게 이 고장의 발전을 위해, 말하자면 대의를 위해 옳다고 판단’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진정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을 줄 알아요?” 라는 말은 영화 [공공의 적2]의 명선 재단 이사장 한상우(정준호 분)의 멘트와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우리들은 국회의원 선거 때만 그들과 동격인양 대우를 받는다고 착각하지만 영원히 우리들은 그들에게 벌레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짓이 너무…… 뭐랄까요, 왜 쉬운 길 놔두고 그렇게 어렵게 사는지 답답하고 바보같았어요.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나 바보짓은 말하자면, 예를 들어 처음 경찰이 되고 한 일 년 반 쯤만 하다마는 거잖아요. 스물 몇 살이 되면 없어져야 하는 거잖아요. 결혼하고 애 생기고 여기저기 부모님 아프시기 시작하면 고민하는 거잖아요. 근데 이혼하고 애 아프고 부모님도 성치 않은 당신이 그걸 하고 있으니까…… 어이가 없어요. 더구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 공지영, [도가니] 부분.
장경사의 이 멘트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 강인호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부의 문제와 날이 서는 순간, 그동안 은폐되었던 자신의 개인사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면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내부 고발이다. 물론 서유진처럼 전사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현실보다 더욱 뚜렷한 소설의 공간, 대나무 숲의 공간이기 때문인가 싶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 공지영, [도가니] 부분.
서유진의 대사는 안개 짙게 낀 무진(霧津)에서의 절규다.
하지만 차라리 장하진의 멘트가 더욱 현실적이다.
“……안개도 오래 겪다 보면 앞이 보입니다. 이 세상은 늘 투명하고 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안개는 장벽이겠지만, 원래 세상이 안개 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날들이 횡재인 거죠. 그리고 가만히 보면 안개 안 낀 날이 더 많잖아요?”
- 공지영, [도가니] 부분.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아 보이지만 사실 현실은 장하진 경사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대부분 파국을 맞게 된다. 잠든 척 강인호의 팔을 잡아끄는 아내의 모습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서유진이 법리적 현실 앞에 갈등할 때, 강인호에게 전하는 메시지!
“강선생, 힘들겠지만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구! 법정이 안 되면 거리도 있고 언론도 있어! 그렇다고 저 아이들을 다시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잖아. 장경사가 그러더라.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 과연 이사장 가족의 인권과 귀머거리 애들의 인권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그래? 좋아. 판사, 검사에게, 변호사에게는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이사장의 인권과 귀머거리 아이의 인권은 같아. 단 일 밀리, 단 일 그램의 차별도 안 돼. 난 그걸 위해 싸울 거야.”
- 공지영, [도가니] 부분.
서유진의 이러한 용기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답답한 속을 뻥 뚫리게 하기는 하지만 현실은 소설처럼 그들에게서 처참한 차별과 그에 따른 상처로만 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현실로 돌아간 강인호에게 보낸 이메일은 서유진이 바라던, 강인호가 고민하던 세상 바꾸기의 단초가 아니었을까?
무진 지방 법원의 판결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전형적인 결과였다. 전관예우의 부도덕적이고도 전형적인 판결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이들이 학생들에게 상처를 준 점은 인정하지만 그동안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고, 또 전과가 없는 점, 또한 이들 중 성폭행을 당한 학생들의 보호자들이 그동안 피고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잘 돌봐준 것을 감안하여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낸 것을 참작’하여 집행 유예로 풀려나는 모순된 모습이 그다지 울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내게 깊이 뿌리박힌 도덕 불감증 덕이다.
판결이 나던 날의 '하늘은 날을 벼려놓은 것처럼 푸르렀다.'는 서술자의 표현대로 자애학원 아이들은 자구책을 마련했다. 계란 한 판과 밀가루 한 봉지의 소박한 보복은 참 나를 슬프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겨우 이 정도였기에 그 동안 교장 이강석, 행정실장 이강복, 쌍둥이 형제의 비인간적이고도 야만적인 행태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하는 이 장면이 소설의 압권이다.
빗발 속으로 뿌연 이정표가 서 있었다. 감색 바탕의 이정표에는 안개보다 더 하얀 글씨로 ‘당신은 지금 무진(霧津)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 공지영, [도가니] 부분.
강인호가 떠나던 날의 날씨는 더욱 선명하다. 무진에서 안개가 걷히고 비가 내리고 있다니? 어떤 의미의 비인가? 서유진의 마지막 이 메일은 다시 이야기 한다.
“오늘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저녁 무진(霧津)에 다시 안개가 내린다. 저 지긋지긋한 안개, 또다시 모든 빛들이 희미해지고 사람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으며 들어서는 저 뿌연 안개 속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안개를 통과하는 유일한 것, 소리…… 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최 목사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네가 우리를 잊는다 해도 우리는 네가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 공지영, [도가니] 부분.
홀더!
‘홀로 더불어’ 살아가지 못할 사람들.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서유진의 이 말은 우리에게 뿌연 안개처럼 다가올 것이다. 무진(霧津)의 안개보다 더 짙은 안개가 우리들의 홀더에 있었다. 자본의 뿌리, 서울의 짙은 안개 말이다.
[도가니] 전반부에 자꾸만 보이던 학교에 대한 절대적 충성에 대한 두통은, 후반부로 갈수록 저항 쪽으로 더한 무게를 두게 된다. 보다 깊이 무진(霧津)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악몽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