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수리 5형제
지구는 누가 지키는가?
답은 독수리 5형제다. 하지만 처음 우리 학교에 부임했을 때 2학년 2반에는 실제로 독수리 5형제가 있었다. 학교생활 열심히 하는, 개근상을 예약한 채 2학년 2반 교실을 지키던 다섯 학생들을 선임 교사들은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아무 느낌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도 그렇게 따라 불렀다. 그때 2학년 1반은 진학 반으로 55명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취업반인 2학년 2반은 독수리 5형제가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2학년 2반 학생들은 4교시나 되어야 한두 명씩 얼굴을 내밀었다. 절대로 독수리 5형제 외에 아침에 일찍 오는 학생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일찍 등교하면 함께 독수리 5형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2009년 3월, 서점에서 만난 장 루이 푸르니에의 [아빠, 어디 가?(원제 Ou on va, papa?)](열림원, 2008)는 내게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생각하게 했다. 장 루이 푸르니에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이 장편소설은 장애아를 가진 부모, 특히 아버지의 입을 통해 장애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을 뒤엎는 블랙 유머 성격이 강한 소설이었다. 서술자인 아버지가 두 명의 장애아, 마튜와 토마를 통해 장애아에 대한 편견과 위선을 지나칠 정도로 미안하게, 통쾌하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 두 아이 도연과 재원, 이들이 장애아가 아니라는 데에 감사하는 위선적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쓰게 웃었다.
2003년 8월 16일 금요일, 용산구에 있는 중증 장애 시설 가브리엘 학교에 갔을 때 정말 힘들었다. 천직(天職)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그때의 심정을 옮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자꾸만 허기가 몰려 왔습니다.
포만감을 동반한 기운은, 실로
내 몸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합니다. 느낄 수 없는 그것은
아마도 낯선 천국에 대한 뜻 모를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산구 후암동 가브리엘의 집.
나들문조차 찾을 수 없는 그 곳에
대형 교회 모퉁이, 쪽문이란 이름으로
저주 하듯이 앉아 있습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덟 시간의 서슬 푸른 일정 연수에
발목 잡혀, 필수 교과 봉사 활동은
눈이 보이지 않는 이를 이해하는 양
천사표를 자임했던 나를 나를,
자꾸만 허기지게 하고 있습니다.
삼십 년 특수 교육 운운 한다고 자꾸만
의심합니다. 의심이라니요?
통유리 인테리어 속에 짚신처럼
어색하기만 한 나를 자꾸만 시간 속으로
몰아냅니다.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자꾸만 허기가 몰려옵니다. 원인 모를……
- 마선생, [용산구 후암동 가브리엘의 집] 전문.
사실 우리 학교 ‘독수리 5형제’는 상담조차도 필요 없는 학생들이다. 사실 나는 ‘독수리 5형제’와 상담을 하고 그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그래서 그들과의 상담은 될 수 있는 한 피해 왔다. 가끔씩 말 한 마디 인사 치례가 상담의 전부였다. 나름대로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상위 10% 이내의 학생들과는 진학과 성적에 대한 상담을 하고, 대부분의 문제 학생들에 대해서는 전화 상담, 가정 방문, 부모 상담까지 하면서 정작 학급의 근간이 되어주는 ‘독수리 5형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방관해 왔다.
그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잘 다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 루이 푸르니에의 소설은, 읽는 내내 나를 ‘독수리 5형제’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만들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독서를 권했다. 아내의 반응은 보다 이기적이었다. 내 아이들의 건강함에 감사를 하면서 골치 아픈 곳에 관심을 가지는 남편을 질책했다. 장애아에 대한 관심은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데로 결론을 명쾌하게 맺어 주었다.
내 아들 재원은 이제 세 살이다. 그 녀석은 제 엄마의 사주를 받아서, 내게 ‘아빠, 슐(술) 먹어?’를 반복한다. 내가 전화를 하면 녀석은 이 말을 반복한다. 요즘은 혼잣말을 하다가는 일방적으로 이야기 한다. ‘아빠, 끊어!’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이 녀석은 지금 똥강아지에서 인간으로 서서히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장 루이 푸르니에의 소설 속 마튜와 토마는 진화 자체를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장 루이 푸르니에는 독설과 저주 대신 아이들이 영원히 읽을 수 없는 소설을 선물한다. 장애아에 대한 사회의 위선적 시선에 대하여 그는 아름다운 블랙 코미디로 욕설을 퍼붓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우리 부서 선생님들께 선물했다. 강요된 독서를 위하여 4월 1일 만우절에 선물을 했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선생님들이 무척 힘들어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장애(障碍)라는 것이 지체장애와 정신장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학교 학생들 중 대다수, 70% 이상은 진화를 하다가 어느 순간 퇴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독수리 5형제는 진화도 퇴보도 없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스무 살이 조금 넘으면 장 루이 푸르니에의 소설 속 마튜처럼 하늘나라로 가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우리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하지만 장 루이 푸르니에의 소설처럼 부모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내 사견은 결코 아니다.)
선물을 주어도 좋은 줄 모르고, 던진 공을 찾아서 한 나절을 찾아다니는 아이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는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천사를 가장한 악마적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본다. 하지만 앞서 용산구 후암동 가브리엘의 집, 원장과 그의 가족과 교직원을 보면서 이 또한 내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다. 우선 우리가 할 일은 독수리 5형제보다 더 심각한 우리 학교 70%의 퇴보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재생과 진화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냐다.
사실 나는 재미있어서 이 연구를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답답하기 때문에 장 루이 푸르니에처럼 세상을 직시하고 싶었다. 지난 해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을 보면서 가족 해체에 따른 청소년기 학생들의 상처와 그 치유에 대하여 살펴본 연장선상에서 우리 학생들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알게 해서 위험성을 몸소 느끼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인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문제는 현재 우리 학교 대다수, 70% 이상의 학생들이 확고한 자아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배유안의 성장소설 [스프링 벅](창비, 2008)의 ‘스프링 벅’처럼 삶의 목표인 ‘풀’을 놓치고 이유도 모른 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절벽을 만나 떨어져 수천 마리가 익사(溺死)를 하고 마는, 그런 바보처럼 일탈의 늪에 빠져있는 우리 학교 학생들, 그들에게 맹목적인 경쟁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목표, 신선한 ‘풀’을 뜯게 만들고 싶었다.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 벅이라는 양 이야기 아니?”
“한 번 뛰기 시작한 수천 마리의 스프링 벅은 성난 파도와 같이 산과 들을 넘어 계속 뛰기만 하는 거야. 계속 뛰어, 계속. 여기가 어딘 지도 몰라. 풀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아. 그냥 뛰어야 해.”
그날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익사하는 양 떼를 생각했다. 남보다 앞서는 데만 신경 쓰다 풀을 뜯어 먹는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달린다고? 그러다가 멈출 수도 없게 된다고? 정말 웃기는 일이다.
(중략)
“너희는 대학생이 되기 위해 사니? 지금 이 순간순간이 너희들의 삶이야.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풀을 뜯어 먹으라고. 풀, 맛있는 풀!”
- 배유안, [스프링 벅] 부분.
다른 학교 학생들이 성적에 대한 막연한 목표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면 우리 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그저 졸업이라는, 아주 편한 졸업을 위해 불나방처럼 수업 끝나기 바로 전에 나타나는 행태는 정말 안타깝다. 하지만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교사들 대부분은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학교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면 답답하기만 하다. 칭찬이란 것도 움직이고 반응하는 자의 몫이 아닌가?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청소년에게서 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는 견해는 우리 학교에 짧지만 아름다운 빛이라고 생각한다. 실망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교육이 아닌가? 그 속도가 느리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기만 해준다면 더 열심히 학생들을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울러 특수한 학생들을 위해 특수교육 전공의 교사 초빙도 기대하고,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지원받아야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가 어렵다면 교육청이 나서야하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내가 맡고 있는 2학년 1반 보호자 53명을 상대로 전화 질문을 하여 보았다. 특히 맹목적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졸업장을 따겠다고 지각과 결석을 남발하는 학생들의 보호자 반응이 궁금했다. 질문은 단순하다.
①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말을 잘 들었습니까?(진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② 초등학교 입학 이후에도 말을 잘 들었습니까?(진화와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③ 언제부터 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습니까?(퇴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는가?)
④ 언제 자녀를 포기하셨습니까?(쉽지는 않지만 퇴화의 끝을 인식하였는가?)
④-㉮ 심증적으로 포기한 경우가 있다면 언제였습니까?(정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
⑤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앞으로 어떤 기대를 하고 계십니까?(퇴화의 끝에서 진화의 싹을 보았는가?)
단순비교가 어렵겠지만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삼성고등학교 2학년 8반 42명 보호자의 의견도 조사하여 제시하였다. 전화 설문 조사는 예상 밖이었다. ①, ②의 질문에는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칭찬과 기쁨, 사랑으로 가득했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③의 질문에는 한숨과 자조가 섞여 있었다. 짧은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속상하다는 대답들. ④의 질문에는 ‘솔직히’라는 전제 하에 ‘포기하고는 싶은데, 그래도 자식인데 진심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라는 답이 92%를 차지했다. 아니, 100%라고 해야 했다. 나머지 2% 역시 평상시에는 저주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셨으나 예의 질문에는 담담하게 포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⑤에 대한 질문은 시간이 지나고 철이 들면 예전처럼, 자아정체성이 흔들리기 전의 희망이란 이름으로 돌아오리라는 기대로 끝을 맺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삼성고등학교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 수 있다. ①, ②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③의 질문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인문계 고교에 정상적으로 들어간 학생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난 시기가 고등학교 1학년에 집중된 것을 보면 성적과 학교 적응의 문제가 이때에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④의 질문은 자식에 대한 기대의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④-㉮의 질문에서 보면 삼성고등학교의 경우에 심증적으로도 포기하지 않은 경우가 45.2%를 차지하는 것은 본교와 가장 큰 차이가 났다. 마지막 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설문의 결과가 상당히 인위적이고, 주관적이지만 다른 통계와 달리 이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계량화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통계숫자상의 허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교사로서 청소년 학생들에게 지워진 선입견이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꼴찌들의 학교에서 일등이 나오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일등들의 학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살 사고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을 상대로 하는 교육은 일방적으로 진화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 루이 푸르니에의 장편소설 [아빠, 어디 가?]가 이야기하는 독설과 풍자는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의 블랙 코미디는 우리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인간 사랑의 교육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청소년 학생들의 진화를 기대한다.
“아빠, 어디 가?”
고속버스를 타러 간단다. 역방향으로 말이야.
알라스카로 가지. 가서 백곰을 쓰다듬어주자꾸나. 그리고 백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야.
버섯을 따러 간단다. 독버섯을 따서, 그것으로 맛있는 오믈렛을 해먹자꾸나.
수영장에 가자. 가서 제일 높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자. 물 한 방울 없는 풀장으로 말이야.
바다에 간단다. 몽셀 미셀에 가지. 가서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걸어 다니자꾸나. 그러다 그 모래 속에 둘 다 빠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야.
태연하기만 한 토마는 계속해서 묻는다.
“아빠, 어디 가?”
아마도 이번에는 신기록을 세울 것만같다. 백 번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들으니 슬슬 재미있어진다. 토마와 있으면 지겨울 일이 없다. 토마는 러닝 개그의 대마왕이다.
- 장 루이 푸르니에, [아빠, 어디 가?] 부분.
아울러 특수 교육 학교를 통해 우리가 놓치기 쉬운 교육 현장을 고발하고 자성하도록 소설 한 편을 소개한다. 앞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통해 교육과 현실의 중요성을 고발했던 작가 공지영. 환경결정론과 환경가능론 사이에서 개인이 최악의 환경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고발한 작가!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고발했던 공지영의 최근작 [도가니](창비, 2009)다. ‘독수리 5형제’처럼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던 청각 장애 학생들이 겪었던 불행한 사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학교 ‘독수리 5형제’도 상담 받을 권리 분명히 있다. 지난 7월 15일 수요일에 30분 일찍 도착한 보라매공원의 인조잔디축구장에서 2년 만에 처음으로 신나게 축구장을 누비며 축구를 즐기던 그들, 독수리 5형제! 어김없이 그들은 주전으로 뛰지 못하고 5분 정도 머릿수를 채우다가 이내 교체되었다. 정말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지 않은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가슴 속에도 주전으로 뛰고 싶은 욕구가 1학년 때보다 더욱 강하게 남아있으리란 사실이다.
진실은 그들만이 아는 것이겠지만 ‘독수리 5형제’들에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서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외부로 표현하는 것보다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사사건건이 미미하기에 우리는 항상 스쳐가는 일로 덮기 바쁘다. 2007년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총기사건을 일으켰던 한국계 청년 조승희 씨도 작은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는 연구 결과를 보면 우리는 자성과 함께 그들에 대한 작은 배려, 상담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 그 적기라고 생각한다.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이면서, 폭력피해자로서의 보복행위로서 가해자였던 조승희 씨는 죽기 전 스스로 촬영한 비디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 기분이 어떤지…… 니들이 알기나 할까!”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약(飛躍)이라는 게 이런 거다. 그래서 우리는 독수리 5형제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대다수(70%이상)의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상담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거다. 우리들의 은닉(隱匿)된 폭력과 자폭으로부터 뒤바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을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독수리 5형제’와 함께 상담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