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ngsoi 2014. 7. 13. 01:12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

- 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 부분.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족상의 비전을 제시한다!

작가 공지영의 소설을 서점에서 골랐다. 사실 나는 공지영이란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운동권의 후광을 받았다느니 하는 식의 단편적인 배경 지식 속에 만났던 작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나 등 푸른 자유 운운 하던 [고등어]가 그렇다. 여기에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시점(視點)을 바꾸어 창작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의 작품에서 내 코드를 발견해 내지 못했다. 아주 흔해 빠진 전개와 결말이 될 것이라 지레 짐작하였고 그 전개와 결말에 작품의 재해석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 대한 실망 때문이기도 했다.

오히려 공지영은 내 아내가 더 좋아했다. 아내는 그녀의 호흡에서 동병상련의 느낌이 든다고 했다. 무슨 소리인지,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한 의문은 여성들끼리의 호흡의 동질감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만났다. 나는 공지영의 소설을 처음으로 기껍게 읽어냈다. 그리고 ‘환경결정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설의 한계를 느꼈다. 그렇지만 공지영의 상상력과 현실감에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면 1. 박경리, [토지]

: 대(代)마저 끊기고 재산마저 거의 다 빼앗겼던 최서희는 연길에서 재산을 되찾고 조준구마저 응징하고 평사리로 돌아온다. 그런데 최서희는 남편의 성을 따라 김서희가 되어 있었고 남편 김길상은 최길상이 되어 있었다. 김환국과 김윤국은 최환국과 최윤국이 되어 최 씨 집안의 대(代)를 잇는다.

장면 2. 문화방송, 시사 매거진 2580

: 최진실 씨 두 아들, 엄마 성으로 바꿔. 13일 밤 9시 45분 방송된 ‘시사매거진 2580’에서 최진실 씨는 인터뷰 전문 권순표 기자와 만나 올해 초부터 시행된 자녀의 성 본 변경제도에 따라 두 자녀의 성을 최 씨로 변경하면서 겪은 싱글 맘으로서의 고뇌와 애환을 풀어놓았다. 최진실 씨는 ‘시사매거진 2580’과 진지한 인터뷰를 하면서 “나로 인해 싱글 맘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조그만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심정을 밝혔다. 이어 “연예인이어서 자녀 성 변경 과정에서 더 고통스러웠다”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혼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시사매거진 2580’은 지난 20년간 연기자로서 화려한 영광의 시절과 함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재기에 성공한 배우 최진실 씨를 조명하기도 했다.

장면 3. 법원은 부모의 이혼 이후 조부모 아래서 생활하던 친자를 아버지 사망 이후 어머니가 친권을 주장했으나 그동안 어머니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을 오래 했고 친숙감 등에 있어서 어머니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여 어머니의 친권은 인정하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학생의 정신적, 지적 성숙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MBC 아침 뉴스)

 

다양한 가치관의 세계! 그러다가 2008년 [즐거운 나의 집]을 만났다. 아빠의 결혼식에 평소에 즐겨하지 않던 피아노 연주를 해야 하는 위녕(이때까지 나는 위녕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10여 페이지쯤 읽고 작품을 아내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의 모습이 처연했다. 게다가 소설은 ‘즐거운 우리 집’이 아니라 ‘즐거운 나의 집’이었으므로 개인적인 우리들의 현대사를 표상하겠지, 정도의 선입견으로만 남았다. 2008년 2년제 청소년 학급 1학년 5반 담임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참 다양한 학생들을 만났다. 55명의 학생 중에서 36명의 학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학비 지원을 받고, 그 중 절반 이상은 결손 가정의 학생들이었다. 이 중 28명이 보호관찰을 받고 있거나, 경찰과 검찰에 사건이 연루되어 계류 중이거나 소년원이나 위탁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물론 3월과 4월엔 이런 불명확한 통계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 자주 결석하거나 지각을 하는 학생들의 학부모님, 아니 학부형(아니다, 조손 가정이나 이모, 고모 등의 친척도 꽤 많았다. 그래서 공지영의 소설에서처럼 ‘보호자님께’ 라는 가정통신문에서의 호칭 상 변경의 필요성에 정말 공감했다.)님께 전화하는 대신 문자를 하루에 다섯 번씩 보냈다.

 

오늘 꼭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1교시 시작했는데, 아직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점심시간인데요, 아직입니다. 죄송합니다.

점심시간 끝나고 5교시 시작 전까지 여전히 등교 안했어요, 확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결국은 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꼭 보내주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일주일 내내 학교에 오지 않으면 부득불 전화를 한다. 여러 번의 수고로운 다이얼 누르기가 반복 되고나서야 겨우 통화를 할 수 있다. 그 통화 속에서 겨우 주민등록등본 속에 나타나지 않는 가족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 곳엔 처음 듣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아니 새아버지와 새엄마도 있다.

처음 청소년 학급을 맡았을 때는 잘 몰랐다. 하지만 요즘엔 매우 복잡한 가족을 본다. 막연하게만 보아왔던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 정말 우리들이 통계상으로 보는 이혼과 재혼 가정은 실제로는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결손 가정의 청소년들은 모두 우리 아이들처럼 우울하거나 가족에게서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많은 것일까? 아니면 많다고 생각하고 지레 짐작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5월과 6월 사이에 학생들 몇이 자퇴서를 내겠다면서 어머니 또는 아버지와 동행하여 내교하는 일이 있었다. 아내에게서 받은 [즐거운 나의 집]의 위녕처럼 ‘새엄마’를 ‘엄마’로 알고 살다가 나중에 ‘친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가면서 불규칙하게 살고 있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까지…….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과연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만 있는 일인지, 아니면 위녕처럼 인문계고, 외국어고, 과학고, 그리고 전문계고 학생들도 비슷한지 알고 싶었다. 이유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처참한 목표가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만 먹으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음’을 통계로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물론 통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문학의 힘으로, [즐거운 나의 집]의 힘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 싶어서였다.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어떤 결정을 했으면 그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하는 일뿐이야.

-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부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가시방석이라도 그것을 꽃방석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물론 청소년기 주변인으로서의 그들, 질풍노도의 시기를 사는 그들에게 환경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들 청소년들에게 환경가능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깨닫게 하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올해 들어 자꾸만 청소년 문학에 관심이 간다. 성장소설 말이다. 지금 내 처지에서 보면 많은 부분에서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경험했던 일탈들을 지금의 우리 학교 학생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아마 유치의 극치라고 말할 것이다.

김계령의 [완득이]를 읽으면서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아웃사이더로 성장한 완득이의 대견스러움을 만났던 기억은 흐뭇하기만 했다. 나는 진정 우리 학생들에게 ‘똥주’처럼 반어법으로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 것인가? 어미 게의 자식 사랑처럼 내 스스로는 옆으로 걸으면서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똑바로 걸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근래 김혜정의 [하이킹 걸즈]를 읽었다. 스물여섯 살 김혜정의 눈으로 그려간 어설픈 성장소설을 읽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나와 띠 동갑인 그녀가 15세 때 썼던 [가출 일기]의 가슴 아픈 감동도 어설픔으로 읽었던 사실을 되새김질 한다. 하이킹 걸즈! 비행과 일탈의 죄를 지은 청소년들에게 소년원 대신 80일간의 실크로드 도보여행의 강제를 지운 어른들. 그 속에서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장밋빛 훈계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을까? 그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청소년 비행의 치유에 대해서는 ‘글쎄?’라는 의문부호부터 보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사제동행의 여행을 함께 하고 상담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육철학을 맛보고 싶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부분.

 

우리 학생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결손이 아니라 잉여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갖기를 바란다. 두렵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