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지하철 4-4
신림역 지하철 2번 출구를 향해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빠르다. 반소매는 여름 낮의 한때처럼 시원하기보다는 뜨겁다. 새벽 첫차를 타려는 사람들은 몸이 무겁다. 아니 옷이 무겁다. 대부분이 짙은 색이다. 회색, 갈색, 진남색, 흰색 머금은 빨간색까지, 이를 진분홍이라고 하던가?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모두가 벗이 된듯하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이 익은 듯 서로 인사를 한다. 경로석을 양보하기에는 나이가 부족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골다공증을 핑계로 앉아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노인은 적당히 웃음으로 양보하고, 젊은이는 어색한 미소로 주저앉는다.
새벽 공기가 참 신선하다고 하지만 새벽은 노동의 무게로 짙은 어둠을 안고 있다. 새벽 지하철의 공기는 피로보다 더한 안쓰러움이 있다. 정규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노년보다 중년, 중년보다 청년이 더 안쓰러운 것은 그들이 입은 옷보다 그들 눈 밑에 검게 패인 다크 서클이다. 이태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은 푸른빛을 가장한 단풍이다. 단풍은 이제 얼마지 않아 백설에 파묻힐 것이다. 스키장의 보드보다 연탄길을 밟으며 조심조심 걸어서 신림역 2번 출구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2호선 신림역 4-4번 입출구는 내게 부적이다. 죽을 사(死)가 두 번, 역에 역이다. 역설이다. 아이러니다. 죽음이 반복되면 그것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경명주사다. 붉은 빛, 핏빛으로 살아남아서 투쟁을 한다. 그것은 삶과의 투쟁이 아니다. 죽음과의 투쟁이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다. 행복 특구 용산에서, 행복도시 세종시에서, 원주민은 이미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되어 버렸다. 2호선 사당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4호선 사당역 4-4 출입구로 들어선다. 죽을 사가 넷이다. 신림역보다 두 배는 더한 아이러니다. 역설이다. 모순이다. 살기 위해 4호선 사당역 4-4 출입구를 통해 지하철에 오른다. 2호선은 계속해서 회전을 할 것이다.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2호선은 만원이다.
이수역 14번 출구로 나온다. 우측 보행은 세계인과의 소통이라고 날마다 부르짖지만 자꾸만 부딪히고 꼬이는 걸음들마다 우측보행은 또 다른 구속이다. 지키는 사람이나 거부하는 사람이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들 투덜거린다. 입에서 닭똥 냄새가 난다. 양치를 아무리 해도 지울 수 없는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다. 건강을 담보로 아침마다 화학조미료를 듬뿍 넣은 김밥천국의 분식을 먹은 탓이다. 아니 편리함을 무기로,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지친 오장 육부에 쏟아 부은 게으름의 상징이다. 내장에 두텁게 낀 지방은 더 이상 부의 상징은 아니다. 성인병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미 지방 간(肝)을 갖고 태어났지 않은가? 하지만 내 아들 재원은 서울 태생이므로 서울 간인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비닐하우스 단지들은 이제 그린벨트의 덕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무단 점거를 떠나 도시의 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도시를 도시답게 하자는 정치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서울대 정문 100미터 전 비닐하우스 촌에 붉은 글씨를 머금은 플래카드가 늘어서 있다. 서울대학교 생명공학부인지 수의학부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황우석 교수를 둘러싼 두 가지 플래카드가 아직도 걸려 있다. 개인적 차원의 사기가 아니었기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단다. 반대쪽에서는 환호성이 터지고 민족의 영웅 황우석을 사랑하는 모임은 정부와 거명되는 대기업을 성토하기에 바쁘다. 문화방송의 PD수첩은 덩달아 단두대에 올라야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세기의 사기꾼이라고 욕을 한다. 뉴우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처음엔 가설에서 싹텄다고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도, 상대성 이론도 결국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과 '팍스 아메리카'는 대한민국 정부 일부 지도층과 한 방송, 그리고 또 다른 대기업과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다고 서점에서 만난 한 서적의 저자는 주장한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정보를 믿어야하는가? 정보화 혁명 속에서 만난 서울은 오늘만 숨이 찬 것은 아니다.
아마존 강을 개발하는 브라질을 향해 전 세계가 손가락질을 한다. 아마존 열대우림은 지구의 폐, 지구의 허파라고 부르기 때문이란다. 전 세계 25%의 산소를 생산하고 그만큼의 이산화탄소를 정화한다. 하지만 아마존 열대우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지구는 더욱 온난화의 기세가 가열차다. 아마존을 살려주면 전 세계는 브라질과 아마존강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브라질 월드컵을 주고,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선물한 것인가? 브릭스(BRICs ; 신흥경제주도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첫 글자로 거명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것인가? 브라질처럼 서울의 숲, 비닐하우스를 불법점유하고 있는 이들은 개발의 이익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나 보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이들이 그랬고, 신림7동에서 쫓겨난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쫓기는 새가 되었다. 용산에서 불에 타 죽어간 이들처럼 그들은 미군 부대가 떠나간 그곳에서 닭둘기보다 못한 새가 되었다. 이수역 14번 출구를 나와서 날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직장을 향해 거슬러 오르는 나는 누구인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나는 김밥천국으로 회귀한다. 김밥 또는 주먹밥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한다. 참치주먹밥과 김치주먹밥 사이에서 주저한다.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 사이에서 망설인다. 떡라면과 짬뽕라면 사이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린다. 천 원과 이천 원 사이에서, 삼천 원과 사천 원 사이에서 고민한다. 4,500원짜리에는 눈도 주지 않는다. 눈이 갔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칼로리를 생각한다. 양을 생각한다. 밥을 반 남긴다. 점심시간 전까지 간식의 유혹에 빠진다. 성공한 사람처럼 몸과 마음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고 투덜거린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건 항상 나 자신 뿐이다. 양배추와 된장, 두부와 채소가 기다린다. 유기농이 울다 간다. 비닐하우스의 채소는 죽는다. 하지만 비닐하우스 산인지 노천 산인지 알 길이 없다. 그냥 그렇게 믿는다.
물을 아낀다. 하루 세 번 여덟 번씩 30초 동안 손을 씻는다! 1830운동을 한다. 손을 깨끗이 씻으면 신종플루도 이겨낼 수 있다. 샤워기의 물을 잠그고 비누칠을 한다. 구석구석 물기가 필요할 때에야 샤워기를 가동한다. 흐르는 물에 씻은 채소나 담아놓은 물에 씻은 채소에 잔류농약은 같다. 그러므로 흐르는 물에 씻는 것은 지나친 물 낭비다. 음식이 남으면 집으로 싸오는 것도 좋은 환경보전운동이다. 적당히 먹을만큼만 먹자고 한다. 아예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채식을 하면 지구는 온난화의 속도를 줄일 수 있다. 작은 실천은 지구를 살린다. 하지만 지구는 누가 살리는가?
지구는 독수리 5형제가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