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복숭아? 복숭아!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아침에 조조 영화를 보러 간다. 10시 영화다. 도연, 재원과 아내, 그리고 아빠인 내가 함께 영화 [아이스 에이지3-공룡시대]를 보러 간다. 미리 준비한 음료수와 과자는 알뜰함의 상징이다.
하지만 도연이 입술이 한 발은 나와 있다. 아내에게 눈짓을 하고 포도몰 롯데시네마에서 팝콘을 산다. 이내 도연의 쑥 나왔던 입이 쏘옥 들어간다. 며칠 전부터 재원에게 영화를 보여주자고 했더니 아내는 반대했다. 세 살짜리 재원이의 집중력이 짧아서 결국 중간에 포기하고 나올 거라는 거다. 그래도 만화영화를 보여주자고 주장하는 나는 몹시 행복하다! 조금씩 진화하고 있는 녀석이 고맙기만 하다.
결국은 조조로 할인된 영화비로 아내의 불만을 불식시킨다. 드디어 오랜 광고 후에 [아이스 에이지3]가 시작한다. 1편부터 단골인 왕소심 맘모스, 매니는 짝꿍이 생겼다. 엘리, 순수한 그녀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날 기미가 보이면 ‘복숭아!’라고 사인을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참, 귀엽죠~잉!
복숭아의 대부(代父)격인 검치호랑이 디에고와 주머니쥐 형제 크래쉬와 에디, 말썽꾸러기 나무늘보 시드와 동물 조연들의 연기는 참 재미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나무늘보 시드가 사고를 친다. 얼음 동굴 속에 있던 정체불명의 알 3개를 가져오면서 기억 속에서 잊혀진, 멸종된 줄 알았던, 지하세계의 공룡 시대로, 시드를 구하러 가게 된다는 이야기.
알에서 깨어난 티라노사우루스의 아기 공룡 세 마리가 시드를 엄마로 알게 된다는 설정은 참 재미있다. 왕소심 맘모스 매니가 ‘복숭아’를 위해 마련한 놀이터를 악의 없이 부수는 장면은 참 열광적이다. 그때 바로 엄마 티라노가 나타난다. 그리고 지하세계 속 공룡세계와 만나게 된다.
공룡세계로 이끄는 엉뚱, 발랄, 섹시 애꾸눈 벅, 그는 공룡 사냥꾼이다. 그를 통해 공룡의 세계와 만나게 되고 공룡세계에서 '루니'란 악당의 등장은 극의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시시각각의 위험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애꾸눈 벅의 모습은 아동들의 동화 읽기에서 많은 모티브를 보여줌으로 상상력과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익룡(翼龍)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다른 익룡들과 함께 하는 전투신은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게 하면서 아이들 손을 잡고 온 부모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선물하기도 한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은 바로 상상력과 정체성의 재발견, 그리고 추억의 재발견이다.
무엇보다 고무된 것은 재원의 반응이다. 20분을 넘기지 못 하리라던 재원의 집중력은 1시간 30분 러닝 타임 내내 영화의 재미에 흠뻑 빠진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공룡시대 티라노사우루스 아기 공룡 세 마리와 맘모스 아기 ‘복숭아’에 대한 동경을 내내 잊지 못한다. 그날 새벽에 재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공룡시대, 아이스 에이지 속에 푹 파묻혀 익룡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모험을 하는 꿈을 꾼 모양이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소변을 보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간 녀석은 이내 ‘복숭아!’를 연발하며 잠꼬대를 하기까지 한다.
복숭아를 먹고 싶어서 한 잠꼬대는 아닐 거다. 막 태어난 맘모스 새끼처럼 보슬보슬하고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 하지만 육식 공룡들에게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고 싶게 할만큼 맛있는 먹잇감이 아니었을까? 아기공룡들의 대부를 자처한 시드가 주장한 것처럼 채식으로 식습관을 바꾸어 보겠다는 생각은 참 새롭다. 육식이 가져오는 많은 문제점, 유아 비만, 거친 성격과 과도한 행동 유발, 주변과 조화하지 못하는 관계 장애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점점 지나칠 정도로 육식에 눈뜨고 있는 신인류를 위한 작지만 따뜻한 시선이 마냥 흐뭇하기만 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을 빠트릴 수는 없다! 도토리 없이는 살 수 없는 다람쥐 스크랫의 이야기. 3편에서 도토리만큼이나 매혹적인 도토리 라이벌, 팜므파탈 스크래티의 출현은 또 다른 재미를 가져다준다. 공룡시대, 지하세계에서 일상적인 남편으로 살면서 매혹적인 날다람쥐 아내와의 풋풋한 일상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유통 기한이 지나고 서로에 대한 신비함이 사라지자 곧바로 다가오는 사랑 후의 전쟁은 권태기를 맞는 인간을 닮았다. 팜므파탈 스크래티와의 일상적인 삶에 실증을 느낄 때까지 먼발치에서 기다리던 도토리는 남자들 마음속의 첫사랑은 아닐까요? 스크래티를 두고, 도토리마저 두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결단력과 추진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쉽게 잊혀지는 자아 정체성보다, 영원히 간직하고픈 자아 정체성을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할 존재에 대한 깊은 질문같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의 복귀 말이다.
하지만 만화 영화는 만화 영화로 볼 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재원의 첫 번째 영화감상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은 영화 [아이스 에이지3 - 공룡시대], 재원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광복절 가족 영화 관람이었다.
영화를 봤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장면들이 가득하다. 아기 티라노 세 마리와 함께 놀고도 싶고 날아다니는 공룡을 타고 날고도 싶은데 그건 영화다. 진짜로 그럴 수는 없다고 도연이가 말해 주었다. 진짜로 날아다니는 공룡을 타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러면 꿈속에서 날 수 있다고 도연이가 말했다. 자꾸만 물을 달라고 하는데 물을 안 준다. 그러면 복숭아 맛 요플레라도 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냉장고로 가서 물을 가져온다. 진작에 물을 좀 주지! 그랬더니 아빠가 심각하게 내 말을 듣고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엄마에게 뭐라고 한다.
“여보, 재원이가 영화 [아이스 에이지 3]에 푹 빠졌나봐? ‘복숭아’라고 하는데…… 아마도 맘모스 매니와 엘리의 아기 ‘복숭아’에 대한 기억이 선명한가봐! 아무튼 다음에 좀 더 괜찮은 만화 영화 나오면 다시 한 번 영화 보러 가야겠다!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아빠는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했고, 엄마는 그런 아빠의 이야기가 싫지 않은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두고 벽을 바라보면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참 어른들은 왜 저렇게 생각이 많은 건지. 내일은 복숭아 맛 요플레를 아빠에게 꼭 사달라고 해야지! 아빠, 엄마, 잘 자! 아니, 또 혼날라. 아빠, 엄마, 잘 자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