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화상
사다예에게서 암호같은 메일이 연이어 왔다. 뜬금없이 관악구청에서 주관한 인헌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자화상’이란 내 작품이 첨부되어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여기군 남면 진의리에 계시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가쁜 숨과 함께 어머니는 한 동안 말씀이 없다. 부엉이마저 잠들었을 시간임을 감지하며, 불길한 징조 앞에 어렵고도 무거운 대꾸를 한다.
“엄마! 무슨…….”
결혼 후 5년이 지났건만 여태 이런 여명의 새벽에 시골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한 통화도 없었다. 하물며 어머니 당신이 눈길에 다리가 부러져 작은 수술을 했을 때도 없었던, 어찌 이 어둠의 시간에 어머니께서는 전화기를 들고서 묵직한 침묵만을 나누고 계신 것인가? 오랜 침묵의 끝에 던져진 어머니의 푸념같은 어휘는 한 마디 뿐이었다.
“가셨다!”
누가 어디에 가셨다는 것인가? 난 수표같은 어머니의 말씀에 기대기보다는 형에게 연락하는 수고를 택했다. 차마 상상하기조차 싫었던 내 예감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처럼 아주 서럽게 맞아 떨어졌다.
어머니의 건강이 아주 좋지 않게 되면서부터 아버지에게 강요되었던 밥짓기, 설거지 등의 부엌일! 그 사소한 일에 대한 부담보다 백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원앙의 꿈이 이제 수포로 돌아간다는 이유에서일까? 그때부터 아버지도 그렇게 여위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는 가셨다.
아버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아버지의 부음을 받고 무척 놀랐다. 전화기 앞 거울은 내 아버지를 진짜 닮았다. 누가 본다면 ‘붕어빵’이라고 놀릴 듯하다. 정말 똑같다. 깊고 검게 구불거리던 아버지의 주름살 몇 개 옮겨 놓으면,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다.
아버지는 늘 거기에 계셨다. 나는 언제든지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착각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로 태어나 큰아들 몫을 해야 했다. 부와 명예를 버리고, 아버지는 고향과 가문의 심부름꾼으로 남았다. 하지만 오늘 아무런 기미도 없이 공허한 부음의 영상으로, 내 눈앞에 시린 그림자로 둔탁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거기에 있다고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다가선 시골집 대청엔 영정만이 내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소주 몇 잔 기울이며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애창하시던 당신은 작은아들인 내게도 당신과 같은 길을 가달라고 당부하셨다. 당신처럼 고향을 지키면서, 부와 명예보다 가문을 지키면서 동량을 키울 수 있는 교사가 되어보라는 무척이나 소박한 당신의 꿈! 부득불 아들을 낳아 형이 못한 일을 내게 대신하라던 아버지. 탤런트 임현식 씨같은 해맑은 미소로 동네 사람들의 일꾼으로 남았던 당신의 부음은 내게 소나기처럼 그렇게 빠르고, 순식간에 모든 반목과 질시의 세대차를 쓸어 가 버렸다.
수많은 안면 있는 얼굴들이 아버지를 찾아온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인들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정말 똑같아……. 무서울 정도로…….”
그분들은 내게서 아버지를 느끼나 보다. 그것이 정말로 무섭다. 아버지는 지금 저 산속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내 가슴 속에 있어 정말 행복하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노인들 몇은 아버지를 추억하며 슬퍼하고 노인들 몇은 아버지를 추억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왜 그들은 화를 내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따르릉 따르릉.
잠이 덜 깬 내 귀에 아내의 짜증 섞인 숨소리가 들려온다.
“전화야! 아버님……. 또야, 지금이 몇 신데…….”
순간 볼을 세차게 꼬집어본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귀에 댄다. 틀림없는 아버지다. 흉몽도 이만하면 꾸어 볼 만하다. 아니, 개꿈이면 어떤가? 아버지는 지금 내게 하소연인 듯 명령인 듯, 듣기 싫은 소리로 내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아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잔소리처럼 오늘은 아버지의 쇳소리가 참으로 청아하게 수화기를 타고 내 가슴에 뜨겁게 다가온다.
참, 오늘 날씨는 무척 맑으리란 일기예보가 아름다운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로 청아하게 들려온다.
오늘은 붕어빵을 좀 사 먹어야겠다.
선생님, 사람은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하는 거겠죠? 그게 행복한 순간이든, 불행한 순간이든 관계가 없겠죠?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과의 이별은 언제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온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슬퍼할 테니까요. 선생님, 저는 지금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무서워요. 누군가가 저의 행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것같아요. 그냥 제 느낌이에요. 금방 끝날 것같았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행복에 겨울 수 있다는 게 두려워요. 그래도 행복하답니다. 선생님! 저, 사다예 믿으시죠? 저는 선생님을 만나서 지금 행복합니다. 건강하세요. 또 연락드릴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다예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불안하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사다예의 강인한 정신력을! 하늘은 여전히 가을하늘처럼 맑았으나 폭염은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에어컨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여름 방학이 아직도 반이나 남은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