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ngsoi 2014. 7. 13. 01:03

2009년 5월 4일!

하늘은 오랜만에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기에 안성맞춤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아침 바람이 싸늘하게 부는 것으로 여전히 여름보다는 늦봄이라는 느낌을 주는 하루다. 아마도 아침 바람마저 습기를 머금어 불쾌해지기 시작하면 여름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재량 휴업일인 나는 서둘러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한다. 152번 버스는 아내를 태우고 신림 4거리까지 달렸다. 152번 버스가 신호에 걸렸으면 했지만 이내 달려가 버린다. 심호흡을 하고 이내 달렸다. 아내가 저기 30미터 거리에서 살랑살랑 사뿐히 걸어가고 있다. 두산 위브 건물 앞에 들어서기 전에 따라잡을 태세다. 청커버에 노란색과 연두색이 섞여 있는 스커트를 입고, 블랙 스키니를 입은 아내는 애 둘 낳은 티가 전혀 없다. 조용히 다가가 “아가씨!” 하고 부른다. 조금 놀란다. 아니 무척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짐짓 태연한 척한다. 나란히 걸으며 옆을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오늘 밤에는 꼭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신림역까지 에스코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재원이 울고 있다. 제 누나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여덟 살 차이가 나는 누나와 남동생! 그래서 안심하고 제 엄마 배웅 갔다 왔더니 눈에 눈물이 서 말은 흘린 듯 흥건하다. 위로하며 따사롭게 안아 주었더니 뚝 그친다. 아내가 준비해 놓고 간 옷들을 입히는데 응석을 부린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능숙하게 재원을 다루신다. 재원이 위주의 행동지침을 내리신다. 옷도 재원이 입는다. 양말도 재원이 신는다. 그리고 재롱어린이집 버스가 올 때까지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재원이 알아서 텔레비전을 끈다. 반드시 재원이 스스로 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홍수를 이루고, 떼가 밀물처럼 몰려와 이내 전쟁이 시작된다니…….

할아버지가 재원을 업고, 할머니는 가방을 들고, 나는 어제 아내가 세탁해 놓은 재원이 유모차 시트를 들고 온 가족이 아래층으로 이동한다. 내가 차고 문을 열고 시트를 끼우는 사이 재롱어린이집 버스가 오고 재원이 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이내 헤어진다. 오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재원이 ‘아빠, 언제 와?’ 하기에, ‘다섯 시!’ 라고 했다 하신다.

 

집안 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다. 아내에게 문자가 온다. 시키는 일이 좀 많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오늘 밤에 그녀와 꼭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 탓이리라. 도연이 글짓기 투고에서, 치과 검진에, 청소까지! 참, 아내는 고운 시어머니다. 청소를 다 끝내고 조용히 신문을 보고, 읽고 있던 소설을 조금 읽어 나간다. 그리고 도연과의 데이트를 하러 나간다. 매년 한 번씩 도연과의 카페 나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북 카페 대신 ‘크레이지 떡볶이’로 정했다. 카페는 흡연 때문에 가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금연석과 흡연석이 있지만 말 뿐이다. 담배 연기는 배우의 연기처럼 한 곳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까, 누가 담배 연기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짜장 소스 ‘크레이지 떡볶이’ 세트 ; 짜장 떡볶이, 채소 샐러드(도연 왈, 야채는 일본식이란다), 모듬 튀김, 쿨피스 한 주전자에 알밥까지 둘이 먹기에는 좀 많다. 하지만 남으면 Take out 할 수 있다 해서 세트로 시켰더니 풍성하다. 아내에게 카메라 폰으로 찍어 문자로 보냈더니 부럽단다. 맏이와의 데이트를 자랑하러 몇몇 지인이게도 사진 첨부 파일을 보낸다. 아마도 나는 팔불출인가 보다. 재잘거리며 이야기하는 도연의 입이 참 귀여운 고등어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등 푸른 자유를 찾아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고등어처럼 도연은 자유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아빠, 남자들은 조금 조용하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를 좋아하지? 그래서 나도 3학년 때부터 스타일을 좀 바꿨어. 조금 연약해 보이고 조용한 컨셉!”

나는 일부 수긍한다. 조잘거리는 입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맛있게 ‘크레이지 떡볶이’를 먹고 남은 튀김은 Take out해서 GS문고로 간다. 가다가 Macdonald에서 5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저렴하게 사서 먹는다. 그러다 도연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서 Baskin Rabbins 31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은 거하게 아이스크림을 대접한다. 도연이 큰외삼촌 만나 거하게 점심 드시려던 계획이 도로 사정 때문에 도로아미타불, 수포로 돌아갔음을 탄식하는 넋두리도 함께 듣는다. 속으로는 재미있었지만 겉으로는 위로의 멘트를 수없이 날린다.

어른들과 헤어져 GS문고에서 책을 읽는다. 나는 잠에 곯아떨어지고 도연은 독서삼매에 빠진다. 서점을 나와서 헌혈 카페, ‘예그리나’에 간다. 헌혈을 하기 위해 며칠 동안 체중 조절까지 했는데 혈압이 높아서 오늘은 안 된다고 한다. 우울하다. 도연이 위로한다. 헌혈하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란다. 살을 빼는 것도 중요하지만 술을 줄여야 혈압도 내려간단다. 의사 선생님 뺨친다. 참 옳은 소리다.

Baskin Rabbins 31에서 아이스크림을 산다. 1,700원을 포인트로 할인을 받았다. 제 엄마를 닮아서 깎는데 일가견이 있는 도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잘 했단다.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재롱어린이집으로 향한다.

도연은 재롱어린이집에 올라가는 것이 귀찮다며 집으로 향하고 나 혼자 재원을 데리러 간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한다.

“와, 재원이가 아빠, 지금 오고 있다더니 정말이네요!”

선생님 옆에 서 있던 녀석이 환하게 웃는다.

“봐요? 아빠, 지금 온댔줘!”

작은 입이 예쁘게 좌우로 움직인다.

“아빠, 안아줘!”

재원을 걷게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재원에게 존댓말로 하라고 얄궂게 웃어 보인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 바로 존댓말을 한다.

“아빠, 안아 주떼요!”

기분 좋게 웃으며 재원을 안고 비탈길을 내려온다. 아직 지지 않은 태양이 우리 부자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아마도 저 태양도 집에 있는 아들 녀석이 ‘아빠, 언제 와?’라며 푸르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했으리라는 부질없는 상상을 한다. 퇴근길의 태양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 우주의 보금자리에서 손발 깨끗이 씻고 쉬고 싶다고 눈짓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