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빠 닮았네!
행복도시 세종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연상시키는 장남평야 한 가운데, 포구의 흔적을 알려주는 작은 산자락에 무덤을 둘러싼 일곱 그루의 나무들. 일제침략기 1940년 초부터 장장 5년 이상 대토목사업으로 포구를 평야로 만들어내는 기적을 만든 곳. 장남평야! 지역민들의 자기 소유 토지 욕망이 넘쳐흘러서 풋풋한 노동을 통해 수만 정보의 평야가 탄생한 곳. 아마도 동네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는 것은 그 속에 은폐된 진실이 숨어있으리란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흔적은 없다. 장남평야가 사실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대토목사업에서 친일문제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쟁이의 호기심은 아마도 1991년 할아버지의 부음(訃音)에서 바람처럼 스쳐간 동네 어르신들의 귀엣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를 기억할 만한 분들은 사망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진실은 그렇게 토지공사의 보상금과 함께 사라졌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 양화리, 월산리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를 만난다. 나성리 독락정에서 시작한 대왕 세종께서 하사한 전석공의 영지(領地)는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진의리를 거쳐 양화리까지 전서공 임난수(林蘭秀)와 대왕 세종을 만나게 한다.
고려말 장군 임난수는 최영 장군과 더불어 탐라(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공주 삼기촌(현재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은거하며 일생(1342~1407)을 마쳤다. 역성혁명의 부도덕성에 비폭력으로 저항한 장군 임난수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1418년 즉위한 대왕 세종은 이듬해인 1419년 ‘임씨 가묘(林氏 家廟)’라는 액(額)을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하였다. 또한 사제문도 내려주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시기를 도울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만한 공훈을 세웠다!”고 하였다 한다.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탄탄히 하는데 고려 충신 전서공 임난수는 여러 모로 세종에게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척불(斥佛)숭유(崇儒)를 표방한 조선의 4대 임금 대왕 세종에게 전서공은 놓칠 수 없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시 590년이 지난 현재도 임난수의 매력은 여전히 남아 그 홀로 불천지위(不遷之位)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의 자손들은 이름도 잃고, 땅도 잃고, 전서공 묘소의 석물마저 도난당하는 횡액을 당하며 뿔뿔이 흩어졌으니 전서공이 대왕 세종에게 할 말씀이 많을 듯하다. 전서공의 19세손의 자서전을 잠시 참고해 본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학을 하시던 태산같이 흔들림 없었던 조부의 그림자 뒤에서 한문을 배웠다. 조부는 작은 정원을 가지고 계셨고, 많은 전답을 가지고 계셨던 지역의 유지이기도 했다. 그 밑에서 풍류와 사람 사는 방법을 어렴풋하게 배웠다. 커서는 한문을 가르치겠다는 소박한 꿈과 함께 의미도 불분명한 ‘서당’에의 꿈을 꾸었다.
‘선비는 마음이 하는 일을 육신이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어기지 않기 위해 놀기 좋아하던 연세국민학교 시절에도 친구들과의 축구 시합 시간을 방과 후 1시간 이후로 정한다. 그 1시간은 과제물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런 습관은 나로 하여금 계획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미션 스쿨인 성남중학교에서 시작한 기독 학생회 생활은 중고교 6년 동안 내게 대인 공포증과 무대 기피증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아직도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를 다룬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일본인 형사 나까무라 역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지금 5년째 ‘서울학생동아리 한마당 연극마당’에 학생들을 인솔하여 ‘마당극의 세계’에 다가서게 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고향 모교에서 3년 동안 활동했던 기독 학생회의 힘이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통해 연극에 대한 이해와 무대에 대한 친근감을 심어준 연세장로교회와 목사님, 친구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대전광역시 대전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 탓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가 이미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말았던 탓인지,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와 같았던 학급 회장직에 대한 무게 탓이었는지, 고등학교 1학년 학급 반장직을 수락하지 않은 뒤에, 내 삶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한 없이 몰아쳤다. 그리고 학업과 등을 쌓고 방황과 수면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방황의 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첫사랑을 하면서부터-아내는 풋사랑이라고 하지만-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기도 했다.
날마다 일기를 쓰고 첫사랑에게 편지를 썼다. 일기와 편지의 내용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 시를 습작하기 시작하였고, 밤늦도록 문고판 소설을 읽고는 그날 밤이 지나면 그 끝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무슨 멋에서인지 문고판 소설책을 과감하게 버리는 일과가 계속 되었다. 그때는 그게 그냥 좋았다. 결혼 후에 아내는 내 첫사랑을 풋사랑이라고 했다. 물론 자신이 내 첫사랑이라고 했다. 최소한 나와 아내가 만난 것이 대여섯 살 때였으므로 그때부터 시나브로 서로의 첫사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 아무튼 싫지 않은 해석이다.
다시 학문과의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일기와 편지 쓰기는 나를 문학에의 길로 조금씩 다가서게 해주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헌혈은 벌써 100회를 넘어섰다. 물론 헌혈에 대한 주위의 부정적인 생각을 의미 있는 일로 가르쳐 준 사람은 현재 모 대기업 상무이사로 재직 중인 우리 형의 선행에서 본받은 바 있다. 적선(積善)을 넘어서서 타인을 위해, 나의 건강을 위해 꾸준히 계속하려고 한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광역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재수생의 길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다시 나의 자신감과 책임감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량진의 학원가에서 나는 잊었던 내 유년의 그림자를 찾아내었다. 재수와 삼수를 하는 동안 나는 종합반 학원에서 학급의 반장을 맡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희생과 봉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자신감과 책임감을 되찾게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대한국민 만세’의 홍수환 선수처럼 4전 5기로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의 낭만과 학문의 길 사이에서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군 입대를 했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의 생활은 나를 더욱 더 문학에의 갈증을 느끼게 해 주었고, 학문에의 길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하고 보람찬 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책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 시간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제대(소집 해제)와 동시에 나는 다시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의 길로 접어들었고, 막연한 꿈이었던 아이들을 가르칠 준비로 교직 과정을 이수하였다. 대학원 진학과 교단 진출이라는 두 개의 대립쌍이 나를 다시금 갈등의 계곡으로 몰아넣었던 1997년의 여름과 가을은 길고도 아팠다. 결국 두 가지 길 중에서 결혼을 선택했다. 학생들과의 인터뷰를 하기로 결론을 내림으로서 결혼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몸담았던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에 둥지를 틀었다. 짝짓기 철의 수컷처럼 살이 많이 빠지고 나름대로 멋있었다고 회상하는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내 생각에는 심적 갈등이 초인적인 다이어트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다시금 나를 채찍질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은 나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지 않게 했다. 거기에 국문학도로서의 책임감은 늘 나를 자극한다. 물론 우리의 아름다운 아이들과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진지함으로,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재미를 만끽하면서, 오늘도 소중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담임 수당은 학생들에게!’라는 좌우명으로 아내를 설득하고 될 수 있으면 많은 부분 부족한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보듬어 주고 나누어 주려고 노력한다. 측은한 마음이나 동냥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15년을 몸담았던 학교를 뒤로 하고 보다 나은 학교로 이직을 결심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결심일 터. 하지만 마음속으로 이러한 도전을 하지 않는 한, 나는 답보의 그림자 속에 묻히고 말 것이란 생각이 나를 움츠리게 하기도 한다.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움츠림! 학교라는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꾸만 나태해지는 나를 보면서 될 수 있는 한,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질의 수업 시간을 제공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동시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이 된 지금 이 시간이 무척 기쁘다. 그 결과와 상관없이 말이다.
해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그 결과가 태안 앞바다의 기름 찌꺼기처럼 밀려오더라도 나는 부질없는 기름제거 부직포로 모래와 자갈, 해안 바위 절벽을 뒤덮은 기름을 닦는 심정으로 우리들의 아름다운 학생들과 함께 작지만 알찬 꿈을 꾼다. 꿈은 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큰 꿈은 작은 꿈을 이루는 소중한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그리고자 노력하는 자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마실만한, 깨끗한 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믿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크고 푸른 꿈을 꾸게 한다. 그러나 결코 도박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아직 쓸 공간이 많은 백지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대학원에의 꿈을 꾼다.
“커서는 한문을 가르치겠다는 소박한 꿈과 함께 의미도 불분명한 ‘서당’에의 꿈을 꾸었다!”
시골 소년의 작은 꿈은 영원히 이루지 못할 꿈이 되어버렸다. 고향을 잃고 떠나는 마음이 아쉬워서 그만 부질없는 꿈을 꾸어 본다. 행복 도시가 아니라 행방불명된, 행불 도시 원주민을 아버지로 둔 행불도시 막내아들의 몽롱한 꿈은 진지하다.
전서공 :이도(세종의 이름)께서는 이 도시의 이름을 세종시라고 한 데에 대해서 공감하시는지요?
세 종 : 허허, 나와는 무관한 일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마도 세종시보다는 전서시나 행복시가 어울릴 듯합니다. 다만 전서공 난수공과 부안 임씨 가문에는 나름의 배려가 아닌가 합니다만.
전서공 : 역시 군벌(軍閥) 이성계 장군의 손자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문제의 본질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들고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그대로 묻어나시는군요.
세 종 : 아무튼 저야, 전서공의 충절을 기리고자 ‘임씨 가묘(林氏 家廟)’라는 액(額)을 내리고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을 내린 죄 밖에는 없습니다만, 행정수도니 행정중심복합타운이니 하더니 뜬금없이 지역민의 정서를 위로한다면서 세종시라고 하지 않았는지요?
전서공 : 군벌 이성계 장군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개창할 때도 수도를 옮기기는 옮겼지만 실제는 눈 가리고 아옹한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개성에서 한양이야 지척이었으니 말입니다.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 수도 이전은 결국 고려 왕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죄를 지은 신하의 제 발 저린 일이겠지요. 수도 이전이라는 것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세 종 :고구려의 광개토 대제의 아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정복 국가에서 수성 국가로의 변신이었지만 사실은 고구려 왕조의 붕괴의 시작이었음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수도는 국가의 중심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수성과 공격이 쉬운 지형, 강을 두고 있고, 산을 등지고 있는 지형이야말로 최고의 입지가 아니겠는지요?
전서공 : 그렇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는 분명 한 쪽으로 치우친 면이 없지 않나 있습니다만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수도보다는 통일 이후의 수도를 엄두에 둔다면 이번의 행복도시 세종시 이전 문제는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충청 지역의 민심에 환심을 사기위한 정치적 야합, 정치적 쇼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 종 : 하지만 전서공께서는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후손들의 문제는 후손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문제는 다만 우리들의 이름이 거명된다는데 있을 뿐이지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그들, 후손들의 문제입니다. 엎질러진 물을 담으려고 최소한의 노력을 할 것이냐, 아니면 그 물을 닦아버리고 말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지요.
전서공 : 자업자득이라는 말씀이군요. 아무튼 이씨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한 걸음 물러서시는 모습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습니다만 문제를 직시하시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만은 성군(聖君)다우십니다. 누가 이도를 대왕이라 칭하는가? 묻는다면 중용의 도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백(白)만 알고 흑(黑)을 모르는 저같은 이야 대왕을 따라갈 수 없겠습니다.
전서공과 대왕 세종을 만났다. 하찮은 꿈이었다. 두 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던 것같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이 있으니까. 창작도 마찬가지겠지? 누구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하지만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에 매몰되어 내일을 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전서공은 대왕 세종의 나이 열 살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서로 만날 일은 없었을 터이다. 말로만 들었던 지조 있는 충신에 대하여 세종은 참으로 집착이 대단하셨다 볼 수 있겠다. 아니, 조선 4대 임금 세종에게 죽은 전서공은 참으로 쓸모 있는 상대였겠다. 드넓은 영지를 줄만큼 쓸모 있는 신하, 하지만 부릴 수는 없는 신하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