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숨은 그림 찾기
내가 이미 찾아본 곳에 태연하게 꼭꼭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어쩌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이곳저곳을 뒤질 때마다 마음에 묻어드는 이 묘한, 섬뜩한 두려움.
무서운 일이다.
잃어버린 물건이
내가
이미
뒤짐질 해 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인쇄된 자기 이름을 보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노릇이다. 이것이 바로 전화번호부가 최다인쇄부수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소이연(所以然)이기도 할 것이다.
- 이윤기, [숨은그림찾기1] 부분.
성명(姓名)에는 이름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性)이 있고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다. 가문이 있고, 가계가 있으며 운(運)과 명(命)이 있다. 최근에는 D씨 카드 광고가 히트를 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귀한 성씨를 자랑한다. 또 왜 자신의 성은 광고에 나오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한다. 한 술 더 떠 광고회사나 해당 카드사에 자신의 성도 광고에 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난리라고 한다. 나도 처음에 내 성이 나오지 않아서 불평을 하기는 했다. 속으로 말이다.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우리 장모님은 겉으로 불만을 토로 하셨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이틀 후부터는 우리 성도 해당 카드사 광고에 나왔다. 우리 종친 중 누군가가 해당 카드사에 민원을 제기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소비자들의 심리를 감안한 광고기획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장모님 말씀은 전자를 더 믿는 듯하였다.
아무튼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이름을 지을 때 종말이, 끝순이, 말자, 꼭진이 등등 희한한 이름들이 많았다. 이유는 하나다. 남아선호사상의 반영이다. 줄줄이 딸을 낳은 집안 어른들의 노골적인 불만의 토로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도 버린 자식, 일곱 번째 딸의 이름이 아니던가! 하지만 버림받은 서사무가 속 ‘바리’가 부모를 구하기 위해 무장승과 결혼을 하듯이 소설 속 ‘바리’는 이슬람계 남편 압둘, 즉 무장승의 변형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름은 결국 그 사람의 운명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개입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화다. 그리고 그 조화에 이은 성(姓)과 명(名)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성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제가 강석경의 [숲속의 방]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소양의 아버지는 세 딸의 이름에 양(羊)자를 넣어 작명(作名)을 하였다. 소양이 어머니의 띠가 양(羊)띠였으므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기 위해 세 딸의 이름은 미양, 혜양, 소양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사랑의 결실인 세 딸의 이름에 반영한 아버지의 로맨스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딸을 낳으면 아내의 띠를 상징하는 한자를 넣어서 이름을 짓겠다고 다짐한 나는 1999년 결국 바라던 딸을 낳았다.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에서 상경한 아버지는 아내가 순산한 병원, 가인 산부인과의 ‘아름다울 가’와 형의 딸 재은(栽恩)의 ‘은혜 은(恩)’자를 넣어 가은(佳恩)이라고 짓자고 즉석 작명을 하였다. 부르기 좋고 뜻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즉흥적인 아버지의 작명이 정말 싫었다. 즉흥적인 작명을 남아선호사상의 반영으로 오해한 탓이 컸다. 물론 스물아홉 살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반항심의 토로였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께 정중히 사양의 뜻을 밝히고 내 소망대로 이름을 짓겠다고 했다.
아내는 나와 동갑인 돼지띠! 하지만 돼지라는 의미의 한자를 그대로 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음차(音借)를 하기로 하였다. 윷놀이의 도, 개, 걸, 윷, 모, 즉 돼지, 개, 닭, 소, 말에서 돼지를 뜻하는 ‘도’를 음차하기로 했다. 돼지 도를 대신하여 길 도(道)자를 쓰기로 하였다. 여기에 날개 연(鳶)을 넣어 도연(道鳶), ‘큰 연’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하듯이, 자유로운 생각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바르게, 올곧게 살아가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이런 얘기를 언젠가 맏이 도연에게 했더니 가은이란 이름이 훨씬 예쁘다고 물어내라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도연이란 이름의 ‘도’자가 남자 같단다. 그래도 이미 도연이가 되어버렸으니 어쩌겠냐며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아들 낳으면 짓겠노라고 만들어놓은 이름, 재원(栽願)! 집안 돌림자인 심을 재(栽), 그리고 ‘바라다’라는 뜻의 원(願)! 600년 집성(集姓)촌에서 자라면서 같은 항렬(行列)의 돌림자 때문에 부지기수 같은 이름을 보았던 내게 운명처럼 남아있던 ‘원’이란 글자. 하지만 집성촌에서 서울로 이사한 지금 아마도 ‘원’이란 이름은, 고향에서는 또 다시 흔한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재원이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다.
전서공 난수(蘭秀) 공께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곳, 그 땅에 대왕 세종(世宗)께서 하사하신 땅에 살기 시작한 600년 세월에 우리 가문은 행정중심복합도시, 행복도시 세종시(世宗市)로 이름을 바꾸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령을 받았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다시 기업형 자족도시로 명패를 바꿔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욱 우리 가문을 아끼시는 원로들은 노익장을 발휘하고 계시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과 중견기업, 대학 등이 포함된 인구 50만의 교육과학 중심 경제 도시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또 다른 정치 쇼가 벌어지면서 세종특별자치시는 다시 짙은 연기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행복도시가 아니라 행방불명, 행불도시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판세다. 계속되는 입방아 속에 연기군이란 이름이 도마에 올랐다. 연기처럼 자욱한 이름 덕에 계속 계획인 연기되고 있다, 정치인들이 그럴싸하게 리얼 연기를 한다는 등등. 아무튼 대왕 세종의 이름을 따왔으니 앞으로는 대왕 시절처럼 태평성세를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돌림자, 항렬(行列)라는 게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금(金)의 오행(五行)이 순환하는 구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작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은 항렬(行列)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얘기한 오행을 반영하는 집안이 있는가 하면 한자 안에 한자 일(一), 이(二), 삼(三), 사(四), 오(五) 등을 넣기도 한다. ○수(○洙), 재○(栽○),○묵(○黙), 규○(圭○), ○호(○鎬) 식으로 수(水), 목(木), 화(火), 토(土), 금(金)의 글자의 배열을 지그재그로 정하기도 하고 중간이나 끝에 한결같이 배치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가문 또는 문중에서 정하는 나름의 규칙을 지키면 된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경향이 점점 늘어나기도 한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 열 권을 다 읽어 보면 항렬에 대해 박사가 될 수 있다. 항렬과 불교 미술, 그리고 백제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의 많은 탐독을 기대한다.
뿌리를 안다는 게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이다. 하지만 뿌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뿌리를 더 중시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가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사람일수록 자녀의 자유연애를 반대하는 모습에서도 우리는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문(家門)이란 단어가 거창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인류 본연의 본성이다.
2009년을 살면서 1400년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구시대적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니, 구시대적이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행복도시에 대한 노인들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면 지금 잘못된 수도 이전 사업을 접어야하지 않는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논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수도를 옮기려고 했다가 모두 실패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남북통일 이후를 생각하더라도 행정중심복합도시, 행복도시 - 세종특별자치시는 허울 좋은 유령도시가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사실이다. 기업도시, 자족도시도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지나지 않은 말의 장난일 뿐이다. 충청권의 표를 의식했던 몇몇 정치인의 잘못된 과거사의 사산아(死産兒), 세종특별자치시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00년 한 가문의 뿌리를 흔들다 못해 아예 뿌리 채 뽑아버려 고사(枯死)시키려는 사람들! 그리고 돈으로 조상을 팔아 부자가 될 줄 알았던 사람들. 그러다 자신의 뿌리조차 빼앗겨버린 사람들. 형제도 종형도, 백부도 숙부도, 당숙도 재종도 팔아버린 사람들. 지금 충남 연기군 남면 등의 행복도시는 내란으로 인해 속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느 날 아침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가 선산의 소나무처럼 서슬 푸르게 머릿속에 아직도 이명(耳鳴)으로 남아있다.
“선산의 소나무 팔아버리고 조상 산소 팔아 팔자 고치려는 자식들 등살에 동네 노인들 조상들 찾아서 하늘로 돌아들 갔다. 한둘이 아니다. 잘 살아라. 나는 절대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이지만 한 푼도 못 주니까, 알아서들 잘 살아라. 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