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가벼움
“20만 원이 비네?”
아침부터 또 돈 이야기다. 아내는 출금 한 적도 없는 돈이 20만 원이나 자기도 모르게 빠져 나갔다고 난리다. 오후에 함께 은행에 가서 확인을 하잖다.
“알았지? 함께 은행에 가자!”
“알았어! 근데 정말 출금한 적 없는 거지?”
“그렇다니까. 내 기억을 뭐로 보고……”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범인을 잡겠다는 결의에 찬 표정은, 이내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는 내게 썰면 두 근은 나올 정도로 입술을 내밀어 보인다. 참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똑 소리 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맞벌이까지 하는 사람이 조금 측은해 보이는 아내를 위해 은행에 가서 확인하는 수고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 자세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둔산의 단풍은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부끄러워하는 듯 붉디붉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들은 대둔산의 허무했던 산행을 이야기하면서 남아있는 늦은 밤의 뒤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료한 시간들 속에서 누군가 퀴즈를 내겠다며 한 권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왔다.
“5공 비리와 한국 소설이라는 표제야. 제5공화국의 파행적인…… 시국 관련 수사 당국의 고문 사건을 크게 다루고 있는 소설 두 편을 찾아보세요.”
이어서 예시가 들려왔다. 다섯 개의 소설 중 내가 읽은 소설은 양귀자의 [천마총 가는 길]뿐이었고, 그 작품이 정답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된다. 문제는 나머지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궁금증은 정읍으로의 학술답사로 이어졌다.
모두 각자의 답사지로 떠난 후 총무 경아와 나는 군자정(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정자, 지방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에 남아 짐을 지키고 있었다. 무료한 마음을 달래려 가방 속에 넣어 온 박덕규의 소설은 나의 무료함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위트와 유머, 그리고 사회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짚어가는 그의 소설은 군자정(君子亭)이라는 옛정취가 물씬 풍기는 장소와 묘한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내 옆에서 답사회비를 계산하고 있는 총무, 경아의 잘 들어맞지 않아 난처해하는 표정과 박덕규 교수의 [날아라 도적떼!]의 박종주 부장의 아무리 계산을 해도 비는 돈 8만 원을 고민하는 모습에서 나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작가 박덕규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니, ‘현대 문학 작품 강독’이라는 강의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이러한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학술답사를 다녀와서의 일이다.
지친 몸을 추슬러 청소를 하려던 나의 눈에 지난 신문 한 장이 들어 왔다. 물론 박일문이라는 작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의 얼굴, 박덕규와 성석제!
세 명의 젊은 작가가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성석제란 사람은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통해 익히 만났던 작가였으나 '박덕규'란 작가는 나의 스승으로서 막연히 만났다는 사실뿐이었다. 박일문은 이미 대중적인 작가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작가였다. 박일문, 박덕규, 성석제! 그 중에서 박덕규의 존재는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나와 한 학기를 맞대야할 사람이었으므로……
[날아라 거북이!]라는 작품, 그가 한 때 출판사에서 근무했다는 점은, 내 소설 읽기를 편하게 하고 있었다. 출판사라는 곳의 허와 실을 보여줌으로 해서 그는 우리 시대의 부패와 타락을 유머와 위트라는 방법을 통해 고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 한 번 박덕규와 만난다. 나는 가끔 신문을 스크랩한다. 물론 대부분은 문학과 관계된 것들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간접 독서와 간접 경험을 하고는 한다. [동아일보], 1995년 8월 6일 독서 에세이가 그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미 일 년 이상 전부터 그의 평론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평론가로서의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믿는 모든 절대적 가치, 즉 종교가 믿는 신, 학자가 믿는 진리, 남자가 믿는 애인 등 자신을 움직여 준다고 믿는 어떤 비밀스런 절대자들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박덕규, [푸코의 진자],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부분.
그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의 작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그런 그가 소설가로서 작품을 내놓았다는 점에 나는 관심과 함께 독자로서의 시각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평론가의 소설 쓰기! 나는 어떤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타인의 작품을 음미하고, 그들을 비평하던 사람의 글쓰기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도마에 올라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알몸을 드러낸 채 도마에 올라있는 작가는 당당할까, 아니면 부끄러움에 죽고 싶을까? 아무튼 입장의 차이이고 가치관의 차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 [날아라 도적떼!]를 해부해 본다.
도둑놈, 도둑년!
김미라는 태연히 “또 돈을 잃어버리셨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는 죄의식조차 없다. 본드 걸로 지칭되는 김미라는 도벽과 육욕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에게, 박종주 부장은 ‘똥돼지’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김석규 기획실장에 대해서는 연민과 사모를 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횡령한 돈으로 자신을 위해 품위 있게 돈을 쓰는 김석규의 생활태도와 그의 멋진 어조에 전율을 느끼고, 침대 위에서의 그의 테크닉과 파워를 무척이나 신뢰한다.
눈에 무엇인가가 씌었다는 표현이 옳다. 박종주 부장의 책상 털기, 사표 낸 회사에서 속옷 빼돌리기, 컴퓨터 파일 박살내기는 그녀의 눈에 조금도 양심에 거슬리지 않는 행위로 해석된다. 당연한 자기 노동의 대가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상습적인 좀도둑이다. 소문 정도에 자신의 인생관을 바꿀 여자가 아니다. 김미라는 향기로운 냄새, 섹스 신이 넘쳐나는 것들에 대한 독서하기를 즐긴다. 왜냐하면 그녀는 독서가 취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즐기지 않는 자회사 출판물에 대해 책임감같은 것은 아예 없다.
“콤팩트디스크 한 장 살 수 있는 정도의 용돈과 젊은 육체만 있으면 된다.”
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므로…….
십여 년 전의 기억이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 과연 아내의 20만 원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누군가가 아내 몰래 아내의 돈을 인출한 것일까? 아내는 비장하게 주거래 은행인 신한은행으로 딸아이와 내 손을 잡고 들어선다. 은행 창구에서 직원과 무언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더니 자신에 찬 얼굴과 몸짓으로 내게 다가온다.
“청원 경찰이 도와줄 거래. 아까 그 직원이 그날 몇 시쯤에 인출이 되었는지 가르쳐 주겠대. 그러면 비디오 판독은 오 분도 안 걸린대. 이제 죽었어, 잡힌 거라고.”
사람 좋게 생긴, 키가 훌쩍 커 보이는 청원 경찰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은행 창구에서 제시한 날짜와 시간을 대입하자 금세 화면이 나타났다. 낯선 남자가 돈을 인출하고 나가자 무인 입출금기에 세련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와 반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여자 아이가 함께 들어와서 돈을 인출하고 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돈을 인출하고 딸로 보이는 아이는 신기하다는 듯이 다른 칸의 입출금기를 조작하고 있다.
청원 경찰이 아내와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내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고 딸아이는 입을 가리고 웃는다. 나도 어이없어 웃는다. 드디어 2인조 도둑을 잡은 듯하다. 청원 경찰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확인 되셨죠? 가끔씩 이런 경우가 있어요.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서요.”
아내는 애써 웃으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2층을 내려와서 서둘러 은행 문을 나섰다. 1층에서 아까 출금 시간을 알려주었던 낯익은 직원이 무어라고 얘기했지만 아내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서둘러 은행을 나갔다. 내가 아내 대신 은행 여직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아무 문제없었다고 이야기 했다. 아마도 그녀는 청원 경찰의 뒷이야기를 듣고 며칠 동안 술자리의 좋은 안주로 삼을 것이다. 그들의 뒷담화를 아내는 며칠 동안 귀가 가렵다고 에둘러 말할 것이다. 은행에서 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아내가 서 있었다. 딸아이가 먼저 제 엄마에게 뛰어갔다. 내가 일부러 천천히 옆으로 다가가서 실실 웃으면서 짐짓 말을 걸었다.
“2인조 모녀 도둑을 체포할까요?”
“왜 그래?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아마도 당신이 출금했을 거라고. 카드도 지갑에 있는데 누가 당신 몰래 출금 했겠냐, 안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 거 몰라. 영화 봐라. 출금하고 다시 지갑에 넣는 장면도 못 봤어?”
“알았어. 그냥 한 소리야.”
아내는 내 농담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아내는 오늘 무지하게 속이 상했을 것이다. 벌써 치매가 온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건망증도 아니고 치매라니? 참으로 소심한 A형의 전형이다. 아내를 위해 위로의 문자를 보낸다.
미안해.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오늘같은 일도 있어야 나중에 나이 들어서 동지섣달 긴긴 밤을 뭐로 보내겠냐? 이런 이야기라도 얘기하면서 서로 그때를 추억해야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자. 당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 가끔씩 깜박깜박하고 산다고. 오쿠다 히데오의 [인 더 풀]이란 소설 기억나지? 다들 그러고 살아.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렇다니까! 사랑해. 오늘 가족 회식 콜♥♡
아내에게서 답문이 왔다.
잘났어. 당신은 실수 안하나 어디 두고 보자. 가족 회식은 콜^^;♡♥
단단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사다예와 네이트 온을 했다. 점점 궁금한 질문만 한다.
사다예(Four many yes)
선생님, ‘씨줄과 날줄’, 제가 쓴 거 맞나요?--
마선생(madangsoi)
그럼, 네가 안 쓰면 누가 썼겠냐?
사다예(Four many yes)
그런데, 제 작품이 아닌 것같아요.
마선생(madangsoi)
누가 또 뭐라고 했구나. 샘이 좀 손을 봐 주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네 글이야.
사다예(Four many yes)
그렇죠?
마선생(madangsoi)
힘 내! 샘, 수업 들어간다. 열심히 해, 사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