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ngsoi 2014. 7. 13. 00:57

제11회 국립전쟁기념관 주최 전국 글짓기 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2학년 1반 사다예 ‘씨줄과 날줄’, 고등학생의 평화 통일에 대한 깊은 성찰 돋보인 수작! 문학소녀를 꿈꾸는 전문계 고교생의 고민과 아픔 담은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소설 쓰고 싶다는 포부!

 

기사와 함께 내 이름이 뚜렷하게 인쇄된 내 글이 지역 신문에 실렸다. 물론 교지에도 실릴 거라고 선생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왠지 낯설었다. 어색한 분장을 한 삐에로가 된 것처럼 남들은 즐거워했지만 나는 바보가 된 것같았다.

 

오늘도 하늘은 더할 것 없이 맑고, 내 주위를 덮은 신록(新綠)은 어제보다도 한 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이렇듯 6월은 59년 전 6.25가 일어났을 때의 하늘을 잊어버리기나 한 듯 한없이 맑기만 하다. 그저 우리의 일상처럼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는 듯하다. 정작 오늘 6.25 59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식처럼, 참전용사들을 위한 위로연이 되는 듯한 씁쓸함이 한 방송사 아나운서의 멘트처럼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은 아마도 시대 변화와 남북화해 무드의 영향 탓이리라.

9년 전,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을 때 솔직히 걱정과 우려, 기쁨과 환희가 교차한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 휴전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후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이 주선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김일성 주석의 죽음으로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제 남과 북의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후 9년, 통일은 더 이상 멀리에 있지만은 않아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만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 무척 감격해서 마치 통일이 당장이라도 이루어지지란 착각과 흥분에 휩싸였던 우리들. 결국 우리는 핏줄로 이어진 ‘한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꿈과 현실을 오고가매,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줄을 혼동하는 뭇사람이 아닌가? 그래도 기분만은, 아니 무늬만은 통일이 지금 당장 우리 곁으로 다가오리란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던 그날의 기억.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현실이, 우리들의 현실이 우리를 속이지 않더라도 기억해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긴장 속에서의 통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다.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교실 책꽂이에서 찾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던 박상연의 [DMZ]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음을 상징하는 판문점을 무대로 하여 남․북의 젊은이들이 서로 동화되어 가며,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순간의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남한의 사병이, 북한의 사병을 죽이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판문점 공동 경비 구역의 남북 초병들의 월경(越境)에 대한 개연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법하지만, 우리는 신문과 방송의 보도를 통해 알게 된, ‘김훈 중위 사망 사건’으로 인해 작가의 치밀한 상상력과 섬세한 현실 인식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비평을 이미 알고 있다. 이후 송강호, 이병헌, 이영애 등이 주연한 영화로 각색된 이 작품, [공동경비구역 JSA]는 신선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도 좋아했고, 서로의 문화에도 길들여져 갔다. 하지만 아직은 전쟁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지프 라이터의 반사된 빛을 권총의 총신(銃身)으로 오해하여 반사적으로 총을 쏘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도 사소한 것으로 서로의 이해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오해였으나, ‘역사’라는 이름 앞에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광장]에서 제3국을 택하는 이명준을 닮은 아버지와, 스위스계 어머니의 사이에서 출생한 제3국 출신의 ‘나’는 유엔 중립국 감시단의 일원으로 판문점에 파견되고, 제3자의 입장에서 남북한 젊은이들의 이념에 대한 상호 이해가 사소한 불씨에서 오해로 바뀌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개인사가 ‘역사’라는 담보에 의해 하나씩 은폐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역사 바로 세우기에 나서지만 역사는 개인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진실 아닌 진실만을 새삼 깨닫게 함으로써, 소설은 끝이 난다.

실제 현실에서 김훈 중위의 죽음이 남북의 긴장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장성 개개인의 진급과 출세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역사는 씨줄과 날줄이 엉성하게 꼬여가는 현실을 인터넷 정보검색을 통해 알게 되면서 혼란이 일기도 했다. 열여덟 고등학생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다양한 독서는 내게 편협한 시각에 대한 폭넓고 바른 이해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무튼 사소함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반대로 사소함은 이해로 발전할 수 있다는 진실 아닌 진실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남과 북도 이런 사소함으로 지난 일들을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고,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통일의 그날은 그리 멀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2000년 당시, 대통령의 방북을 앞두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불거져 나온 김대중 대통령의 안전 문제, 그리고 유고 시 과연 총리서리가 국정을 담보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조용히 불거져 나온 것도, 사실은 그 동안 남과 북의 이념 대립과 체제 대립 속에서 상호간의 오해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기우(杞憂)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 짜인 민족의 역사, 우리를 뒤덮고 있는 이념과 체제의 엉성한 씨줄과 날줄을 제 자리에 촘촘히 짜 맞출 수 있는 상호주의의 모자이크를 준비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분단 64주년, 6.25 전쟁 59주년을 맞이한 21세기에 대한 기대감은,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인 흥분 앞에 다시 한 번 상호주의의 역사적 사명감으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가 바로 상호주의의 밑거름이란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보수와 진보의 촛불 집회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과 같이 평행선을 가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 간에 생각의 차이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의 이름 앞에, 통일의 이름 앞에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사고에게 설자리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자, 그대는 역사 앞에 설 수 없는 편협주의자이리니!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남북통일은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엄연한 실상이라는 사실이다.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는 것이 외교의 원칙이듯이, 우리는 통일의 당위성 앞에서도 굳건히 민족의 이익을 우선할 줄 아는 대아(大我)와 중용(中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역사는 늘 사소함으로 일어나, 사소함으로 오해를 낳고, 사소함으로 그 오해를 풀어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오해는 결국 전쟁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오늘은 6.25 전쟁 59주년. ‘피의 일요일’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자. 마음의 문은 열되 경계의 눈빛은 결코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이 우리를 다시 한 번 평화와 전쟁의 양면성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당신정보산업고등학교 2학년 1반 사다예라는 이름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이어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2학년 1학기를 무난히, 아니 아주 열심히 생활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괌으로 가족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에게 행복의 여신이 다가와 있었다. 그렇지만 거듭되는 행복은, 행운으로 느껴졌다. 혹시 질투의 여신이 내 행복을, 행운을 가져갈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나, 부모님, 담임선생님이라는 멋진 응원군, 든든한 부적이 있었기에 편안히 여름방학의 9박 10일을 괌의 작열하는 태양과 해변, 그리고 독서로 보내는 특권을 누리는 기쁨에 젖어 있었다. 가족 휴가가 끝이 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 휴가에서 돌아온 나는 뜻밖의 희소식을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2학기 수시 1차 특별전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상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철저한 내신 관리는 물론, 논술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랐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에 열린 제11회 국립전쟁기념관 주최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당 대학교가 인정하는 대회였다고 했다. 기분이 무지하게 좋았다. 선생님이 한 동안 비밀로 부친 것은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좀 더 안정을 찾을 때까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정을 찾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가족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무척 기분이 좋아서 개학을 하면 우리 반 전체와 학교 선생님들께 간식으로 피자와 치킨을 사겠다고 성화셨다. 하지만 정작 가장 좋아해야할 엄마는 이상하게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잘 나가던 육상 선수에서 할 일 없는 낙오자로, 다시 갈 곳 없는 문제아에서 꼴찌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행운은 계속 내게 다가와 따뜻하게 포옹하고 있었다.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기상 이변이 일어났다. 오전 내내 청아한 바람이 불고 푸르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우박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더니, 하늘은 밤처럼 캄캄하게 변해서 가로등이 들어오지 않으면 통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변덕스러운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