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angsoi 2020. 8. 5. 09:08
유한양행(柳韓洋行)은 대한민국 제약업계 매출 3위[2]의 중견기업으로, 본사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74 (대방동)에 위치해 있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이름을 따 온 '유한'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을 합친 말이다.[3] 설립 초기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의약품이나 화장품 등을 팔았으나, 이내 국내에서 자체 제조한 제품도 팔기 시작했다. 주요 제품으로는 트윈스타정(혈압강하제), 트라젠타정(혈당강하제), 비리어드정(B형간염 치료제) 등이 있다.

유한양행의 심벌마크이자 상표인 '버들표'는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 있다가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려고 했을 적에 서재필이 유일한 박사의 성(버들 柳)에서 착안해 제작하여 선물했던 것이다.

'버들표'는 실존하는 버드나무를 본따 만든 로고로 1926년 창립 당시 처음 사용하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경된 적이 없다. 1910년에 상표등록한 동화약품의 부채표, 1920년에 설립된 동아일보의 東을 본딴 로고와 함께 지금까지도 장수 중인 오래된 로고이다.[4]

아마도 많은 이들이 유한양행 이름보다 유한킴벌리나 한국얀센[5]이란 이름이 더 친숙할 것이다. 여담으로 유한킴벌리가 곽화장지인 "크리넥스"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때가 1971년이다.

대한민국의 제약 기업 중 7243만원으로 평균 연봉 2위를 찍은 기업이다.[2017년기준][7]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17년 연속 선정되었다.

노조는 한국노총 화학노련 소속이다.

창업주 유일한이 1926년 경성부 종로2가에 유한약방을 설립했다. 초기에 미국 의약품만 수입하다 1933년 '안티푸라민'을 시초로 국산 의약품 개발/판매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1936년 경기 부천군 소사읍(현 부천시 심곡본동)에 생산공장 및 제약연구소를 세우고 주식회사로 법인전환하여 1937년부터 만주, 베트남 등지에 해외지사를 두어 일본 제약회사들과 경쟁했다. 이 때문에 일제로부터 세금 탄압을 받기도 했고, 1945년 8.15 해방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해외 및 이북측 재산들을 잃었다. 1946년 자동차 판매자회사 '코리안모터스'를 세우고 1950년 6.25 전쟁으로 조업이 중단되었다가 1953년에 사옥을 재건해 조업을 재개하였다.

1957년 미국 아메리칸 사이나미드 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1962년에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여 영등포구 대방동에다 새 사옥을 세우며 미국 맥스팩토와 제휴해 화장품을 생산했다. 1968년에 모범납세업체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을 받고 이듬해 사옥 증축 후 소사공장 생산설비를 이전하고 경기도 안양에 원료합성공장을 세웠다.

1970년 미국 킴벌리클라크와 합작해 유한킴벌리를 세워 사세확장을 시작해 1976년에는 군포공장을 착공, 3년 뒤 완공했다. 1977년에 미국 코락스와 합작해 유한코락스, 1982년에 유한사이나미드 및 유한스미스클라인, 유한에스피, 한국에섹스를, 1983년에 한국얀센을 각각 세웠고, 1985년에 유경메디카를 세웠다. 1992년에 인도 현지법인 'GTBL'을 세웠다. 1997년에 대방동 구(舊)사옥에서 옆쪽 신 사옥으로 이전하였으며 구 사옥은 별관으로 바뀌어 '씨어터웨딩 라무르(구 대방웨딩홀)'가 사용하고 있다.

2006년에 군포공장 설비를 오창공장으로 이전했지만, 건설회사가 군포공장 부지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있었다가, 2019년에 한국토지주택공사가 10년 넘게 방치한 옛 군포공장 부지처분비용 1,975억 원을 매각하였다.

경영이념 : 우수 의약품 생산, 성실한 납세,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정신과 이념 : 우리는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이를 위하여
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게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인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

936년에는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 유일한이 가지고 있던 주식의 52%를 당시 사원들한테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그리고 역시 대한민국 최초로 전문 경영인(CEO) 제도를 실시한 기업이기도 하다. 이는 유일한 박사가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계승함으로서 직접 시행했다. 다시 말해, 경영권 세습을 안 했다. 또한 전문 경영인도 외부 인사의 영입이 아니라 내부 인사의 승진을 원칙으로 한다. 전임 대표였던 김윤섭 대표이사(재임기간: 2009년~2015년)도 1976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고 현임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9] 또한 딸에게 묘소 주변 땅 5천평, 손녀에게 학자금 1만 달러를 물려준 것을 제외하고는 전 재산을 기부했다. 그나마 그 묘소 주변 땅도 공원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이 이용하라고 물려준 것이며 학자금 1만 달러 또한 손녀는 처음에 받지 않으려고 하다 반만 받고 나머지는 전부 기부하였다. 그야말로 피는 못 속이는 부녀 사이.
전문경영인 제도도 모자라서 '대표이사는 1회만 연임(최대 6년)이 가능하다'는 정관까지 끼어있어 한 사람이 오랫동안 하지 못하게 했다. 전임인 김윤섭 대표가 제약계 최초로 1조 원의 매출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2015년 주총을 통해 물러난 이유도 이 때문.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땅콩 리턴과 관련한 보도를 내보내면서, 가족 경영을 거부한 기업인의 표본으로 유한양행 사측에 창업주 일가의 연락처를 문의했더니 그 분들 연락처는커녕 지금 뭐 하는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유일한 박사 본인이 임종 직전 회사에 남아 있던 일가 친척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몽땅 해고했기 때문.[10] 유한양행에는 단 1명도 일가 친척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유한양행 창업주의 혈육은 유한양행 및 관련 계열사에 입사가 금지되어 있으며 유한양행과 선을 그으려 하고 있다.[11] 유일한 박사의 추모 행사나 혹은 유한재단에서 여는 시상식에 아주 가끔 참석하는 정도라고 한다. #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정경유착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는 법인세를 철저히 납부했으나 정치자금을 주는 것은 거부했고, 이에 대한 보복인지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았다.[12] 그러나 당시 세무 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안 나는 경우가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조하고 있는 약품들도 관련 기관에다가 검사를 의뢰해 보니 멀쩡했다는 것. 심지어 약품 제조 공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분까지 고려하여 원재료를 손실되는 양만큼 더 투입하여 약품 성분의 함량을 정확히 맞추었다고 한다. 결국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다면 오히려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며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
다만 논란거리가 없는 건 아닌데 계열사인 유한킴벌리는 갑질 및 여러 논란으로 언론 보도된 바 있다. 유한킴벌리는 킴벌리 클라크의 자본이 70%, 유한양행이 30%로 이 기업과 유한양행의 관련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깨끗한 회사의 표본이라고 알려져있긴 하나, 구구직사이트의 재직자들 평은 좀 별로다. 보수적이고 수직적이란 표현이 많다.[13]
10. 여담[편집]
유한양행에서 내놓은 의약품에는 드링크제가 아예 없고 알약과 주사제 형태만 존재하는데, 창업자 유일한이 동아제약에서 박카스를 드링크화하는 것을 보고 설탕물을 의약품으로 속여 파는 짓이라며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92년 생위천(현 까스생위천)을 개발했고 2013년에 숙취 해소용 드링크 '내일엔'을 내놓았으며, 위 두 제품이 유한양행 이름으로 내놓은 드링크제이다. 맥생이라는 드링크도 판매했으나, 일반음료였고 유톤디도 생산 및 판매했지만 현재 단종.
실미도 사건의 인질극은 당시 유한양행 구 사옥앞 도로에서 벌어졌다.
스페인 독감과 기업 설립이 연관된 것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2016년에는 살충제 사업도 시작했다. 제품명은 해피홈.[14] Boney M.의 Happy Song이라는 곡을 가지고 CM송을 만들었는데, 이말년씨리즈 2018 2화에서 이 CM송을 소재로 써먹었다.
많은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지만, 삼풍백화점 부지입찰 신청자 중 한명으로, 최종적으로 삼풍과 유한그룹이 남았는데, 결국 연줄로 삼풍이 입찰받아 건축 사상 최대의 붕괴사고를 일으킨다. 만약 그때 유한그룹이 부지를 얻었다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1936년 주식회사 전환 후 매년 흑자 배당을 하고 2011년까지 거의 매년 무상증자를 해 왔다. 기업의 이익을 주주에게 돌려주는 환원정책의 일환.
제약회사라는 분류와는 다르게 꽤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고 있다. 약품들부터 생활용품(락스, 세제), 살충제(해피홈), 건강기능식품(뉴오리진), 동물사료(웰니스), 칫솔(유한덴탈케어) 심지어 임플란트(아스트라, 원플란트)까지 취급한다.
한때 미국의 남성용 화장품 브랜드인 올드 스파이스도 여기에서 판매되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17]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18]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톨 안나네"[19]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론 당시 상황이 좋아서 넘어가줬다는 의견도 존재한다.[20]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 박사에게도 가족사의 어두운 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또 다른 동생 유명한.[26] 유일한이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 이 사람은 친일파가 되어 애국심이 투철했던 자기 형제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행보를 보인다. 그래서 형님인 유일한 박사와 동생인 유특한 회장이 유명한과 절연해 버렸는데, 이 때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였다. 해방 뒤에도 유한산업과 고려문화사 등을 경영하면서 1951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여객선 사고로 사망했다. 유특한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는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 안 하면 유학이고 뭐고 없는 상황이니... 후일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미국 워싱턴 OSS[14]의 냅코 작전[15]에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하지만 국내침투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냅코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